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05화 (105/176)

세자르의 해답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테오 2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하지만 세자르 공, 그대에게 고백하기에 앞서··· 한 가지 양해를 구했으면 하는데.”

“편히 말씀하시죠.”

테오 2세가 책상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보아하니 가루약이 담긴 봉지 같은데.

“그게 뭡니까?”

“이 약의 이름은 ‘발설 금지의 약’. 나의 할머님께서 과거 이대륙의 상인을 만나 사들였다는 아주 귀한 물건일세.”

아, 그러니까.

지금 내 입막음을 하시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폐하, 외람되오나 한 말씀 드리자면··· 지금 저를 믿지 못한다는 의미이십니까?”

내 말에 테오 2세가 신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

“세자르 공. 그대도 그런 말을 할 때가 있군. 하지만 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네.”

“···.”

한참 앳돼 보이는 어린애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다니.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폐하, 그 약을 쓸지 말지는 얘기를 마치신 뒤 결정하시는 게 어떨까요. 폐하가 고백하시겠다는 비밀이 뭔지 대충 짐작이 가니.”

“···짐작이 간다고?”

테오 2세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사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이 얘기를 하시려던 거 아니셨습니까?”

“···!”

입을 벌린 채 아무 대꾸도 못하는 국왕.

나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나저나 진작에 못 알아차린 나도 멍청하구만.’

새삼 국왕의 모습이 달리 보였다.

사내아이처럼 목덜미 근처에서 싹둑 잘랐지만 유난히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

어머니 안느를 닮아 유순하고 부드러운 인상에 뽀얀 우윳빛 피부.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귀여운 어린애 같았는데.’

시간이 제법 지난 지금은 어엿한 소녀가 다 되었구나 싶다.

···카렌의 남장을 못 알아채는 남들을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에만 해도 워낙 어렸잖아?’

내가 딱히 둔해서 못 알아차린 게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리는데 국왕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

“짐은 올해로 열한 살이 아니라 열세 살이 되네.”

그렇담 우리 나이로 중2 정도인 건가.

‘나이보다 어려 보이긴 하지만, 위기감을 느낄 만하군.’

소년, 아니 소녀는 자신의 본명이 ‘테레사’이며 나이 또한 죽은 남동생의 나이에 맞췄다고 털어놓았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소년 국왕이 어릴 때부터 지병을 앓아 병약하다는 설정까지 만들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숨기기 어려워질 테니, 적절한 기회를 엿봐 그대에게만은 진실을 고백하려 했네.”

“···어째서 저입니까?”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서.

“일단은 그대야말로 짐을 위해 힘써줄 가장 유능하고도 충성스러운 인재이기 때문이며.”

이런 상황에서도 말은 청산유수처럼 한다.

잠시 망설이던 소년 국왕, 아니 테레사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내 사촌 오라비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

거기까지 말한 순간, 나는 테레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세자르 공. 내가 그대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진짜 이유는 이거일세.”

그녀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짐이 ‘테오’의 행세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네. 더는 숨기지 못하는 상황이 될 때···.”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짐의 뒤를 이어 이 나라의 왕좌에 앉아줄 수 있겠나?”

이런 젠장.

* * *

‘문제의 그 일’이 터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에르곤 전하께서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전하와 테오 님의 마차가 절벽으로 굴러떨어져···.’

여느 때처럼 교외로 소풍을 나간 2왕자와 그 자제가 마차 사고로 사망한 사건.

한참 후에야 그것이 사고가 아닌 누군가의 사주로 계획된 범죄임이 드러났지만.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잃은 안느 드 노바스는 식음을 전폐한 채 사건의 진상을 알아볼 생각조차 못했으며.

“큰일이구나.”

그보다 훨씬 냉정하고 이성적인 그녀의 아버지, 전 노바스 공작은 다른 고민으로 머리가 아팠다.

“큰일이라고요? 에르곤과 테오가··· 그 둘이 동시에 목숨을 잃었어요. 이게 그저 큰일이라면-”

“정신 차려라, 안느!”

아버지의 불호령에 안느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너는 일개 여인이 아니라 왕자비다. 지금 상황이 너뿐 아니라 우리 노바스 가문 전체에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느냐?”

현재 국왕인 유스톤 3세는 노환으로 병석에 누운 지 오래였다.

왕위를 물려받을 이언 왕세자가 작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했고.

그 뒤를 이어 에르곤 왕자마저 세상을 떠난 지금, 유스톤 3세가 생사를 달리하기라도 한다면···.

“이 나라는 대혼란에 빠질 거다.”

아무리 계승법에 따라 왕위를 물려받는다 해도.

왕가의 직계가 아닌 다른 가문의 누군가에게 왕관이 넘어갈 때는 필연적으로 잡음과 혼란, 더 나아가서는 피바람이 불기 마련.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레핀 공작은 권력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하나, 그 아들은···.”

안느가 씁쓸하게 대꾸했다.

“팰러스 레핀이라면 우리 가문을 멸족하고도 남을 인물이지요.”

팰러스 레핀.

그 야심 많은 청년과 그의 어머니가 수도 사교계를 어떻게 뒤흔들고 있는지 모르는 자는 없다.

‘그리고 그 둘이라면 능히 이 나라를 피바다로 만들고도 남을 만하다.’

하다 못해 죽은 것이 테오가 아니라 테레사였으면.

노바스 공작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테오만 살아 있었어도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텐데···. 테오 말고 테레사를 데리고 나가지 하필이면-”

“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리 하세요! 테레사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안느가 발끈하며 화를 내자 노바스 공작이 머쓱해하던 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둥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제가 테오가 되면 되지 않을까요?”

올해로 일곱 살이 된 테레사였다.

두 살 더 어린 테오와 쌍둥이처럼 똑 닮은 얼굴의 등장에 안느가 깜짝 놀라 외쳤다.

“테레사, 무슨 말이니! 이건 할아버지가 그냥 홧김에-”

“할 수 있겠느냐?”

노바스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제 앞으로 걸어온 손녀의 어깨를 힘주어 붙들었다.

“테레사, 이건 너 하나의 목숨이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의 명운이 달린 일이다. 정말로 할 수 있겠느냐?”

“아버지, 무슨 말씀을!”

“안느, 넌 잠시 조용히 하거라!”

노바스 공작의 가슴 속에 희미한 희망이 생겨났다.

생각해보면 테레사는 어릴 적부터 왕궁 학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영민했다.

‘공작 각하, 테레사 아가씨는 그야말로 수재 중의 수재입니다. 여느 아이들과는 세상을 보는 안목부터가 다르시지요.’

‘정치, 경제, 수사학 등의 학문에 능하실 뿐 아니라 화술도 얼마나 뛰어나신지···.’

그때마다 공작은 한탄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테오가 아니라 테레사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테레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곱 살 어린애라고는 믿기지 않는 깊은 눈빛이 노바스 공작을 마주했다.

“이건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잖아요, 할아버지.”

“···!”

“이것 외에 우리 가문이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면 제가 테오가 되겠어요.”

그 말에 안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반응이었지만.

테레사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노바스 공작에게 말했다.

“일단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테오의 죽음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는 겁니다.”

“···그래.”

“그리고 테오의 죽음을 저, 테레사의 죽음으로 위장하는 것. ···두 분은 그것에만 집중해주세요.”

테레사는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나중 일은 어떻게든 될 겁니다.”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남동생이 되어 국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

그것이 고난과 절망의 가시밭길이 되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실제로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국왕의 일과란 실로 살인적인 스케줄에 가까웠으니까.

한순간도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일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중대한 결정들에 숨이 막혀왔지만.

가장 힘든 것은 이런 순간들이었다.

‘누군가 내 비밀을 알아차린다면.’

지금껏 간신히 쌓아올린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진다면.

소중한 이들의 죽음으로 결말이 난다면!

‘헉!’

일주일에 몇 번씩 악몽을 꿨다.

식은땀에 절어 새벽에 깨어나는 그 기분은, 사춘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세자르의 등장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꽤 믿을 만한 조력자였던 그가 자신의 사촌오빠임을 알게 된 후.

‘세자르 공이라면.’

‘그 사람이라면 문제를 능히 해결해줄 거야.’

세자르는 그런 그녀의 믿음을 단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고.

테레사는 언젠가부터 세자르를 구원의 동아줄로 여겨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애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이 사람이라면 왕좌를 맡겨도 된다.’

이 사람이라면 자신의 야욕이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해 일해줄 테니까.

그렇게 이어져오던 사고의 흐름은, 세자르의 목소리에 끊겨버렸다.

“제가 왜요?”

“···뭐라고?”

테레사는 두 눈을 꿈벅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생각에.

하지만 아니었다.

“저는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폐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는 세자르.

“정말로, 요만큼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 단호한 거부의 말에 테레사는 허, 하며 혀를 차고 말았다.

* * *

‘짐의 뒤를 이어 이 나라의 왕좌에 앉아줄 수 있겠나?’

그 말을 들은 순간.

딱 2초간 고민했다.

‘지금 왕이 나를 떠보는 건가?’

역심을 품고 있는지 시험하는 건가.

그 생각에 눈이 번뜩 뜨이고 온몸이 긴장되었지만.

‘어차피 국왕은 내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잖아?’

전에 말한 바로는 상대의 심장 박동을 체크하며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한다고 했다.

그렇담 내가 어떤 연막을 치든, 국왕은 내 본심을 알아차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제가 왜요?”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 하자면.

‘내가 왜 굳이’가 되겠지.

“저는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없습니다, 폐하.”

이건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이다.

나는 정말로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1도 없으니까.

‘무슨 폭탄 떠넘기기도 아니고, 왕좌를 막 넘기고 그러시나.’

내 희망사항은 어디까지나 제1권력자의 총애를 받으며 꿀을 빠는 제2권력자다.

왕좌에 앉아 총알받이, 욕받이가 되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그런 내 반응에 국왕은 꽤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니,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모습이랄까.

“방금 그 말··· 진심인가?”

“제 목과 심장을 걸고, 진심입니다.”

3형제 스타일로 맹세하자, 국왕이 납득한 듯 한숨을 쉬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짐은 그대만큼 한 나라의 군주에 적격인 사람도 없다고 보는데.”

“취미와 특기가 언제나 일치하리라는 법은 없지요.”

헛웃음을 짓는 국왕.

기력이 죄다 빨려나간 듯한 그녀를 보며 슬쩍 운을 띄웠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폐하만큼 한 나라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에 어울리는 분도 안 계십니다.”

“말만 들어도 고맙군.”

“아뇨, 진심입니다.”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왜 다른 이에게 왕좌를 넘기려 하시는 겁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나. 짐의 비밀을.”

“단지 그뿐입니까?”

“그뿐이라니?”

“어깨의 짐이 너무 무겁다거나, 자유를 얻고 싶다거나···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니고요?”

국왕이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아니라고 하면 거짓이겠지. 그러나 그보단 내 비밀 탓이 더욱 크네.”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왕좌에서 내려오려는 이유가 단지 그것 때문이라면.

“이유가 그뿐이라면, 왕이 아니라···.”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왕이 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테레사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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