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04화 (104/176)

국왕의 비밀

제 아비를 살해하려 했던 천하의 불효자 팰러스가 시체가 되어 돌아온 지 3개월째.

수도를 시끌시끌하게 했던 사건은 종결되었으나, 거기서 파생된 불안 요소들은 종식되지 않았다.

『여전히 불안정한 왕권, 흉흉해지는 민심』

『재판정에 폭탄을 투하하기까지··· 귀족층의 탈선은 어디까지인가』

『정교단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과격파 교단을 본격 해부한다』

이렇게 불안정한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반기는 이들이 있었으니.

수도 번화가에 자리한 고급 커피하우스.

오로지 귀족들만 드나들 수 있는 이곳에서는 그들만의 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렸다.

“정세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군요.”

신문의 머릿기사 문구를 훑어보던 귀족 하나가 운을 떼자, 다른 이가 말을 받았다.

“어차피 이건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총명해봤자 열 살짜리 어린애가 왕좌에 앉아 무엇을 하겠다고.”

“듣는 귀가 있으니 말을 조심하게! 물론 자네 말이 틀린 건 아니네만, 그래도 한동안은 몸을 사릴 필요가 있어.”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선왕 시절과 달리, 지금의 귀족들은 활개를 치고 다녔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불안한 정국을 틈타 횡령과 탈세, 영지민 착취가 일상처럼 이뤄졌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모든 게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으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이어지던 귀족의 말을 누군가가 끊었다.

“···크로이츠 공.”

모임 참석자들의 이목이 그 주인공인 노엘 크로이츠 백작에게로 향했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셈이오.”

호랑이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 노릇을 하기 마련. 이곳 모임에는 에스닐의 양대 가문인 레핀 가문과 노바스 가문이 참석하지 않는다.

덕분에 ‘에스닐의 3인자’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크로이츠 가문이 대장 노릇을 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크로이츠는 신문에 작게 난 기사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세자르 레핀 공의 성공 신화는 언제까지 계속되나’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나라에서 가장 강대한 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왕과 지나칠 정도로 가깝다는 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소?”

“···왕권과 귀족권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오!”

때때로 ‘음흉한 너구리’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이답게, 크로이츠는 다른 점을 지적했다.

“현 상황이 이대로 장기적 국면에 접어든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병약하다는 소문이 파다한 열 살짜리 소년 국왕.

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단명한다면···.

“···세자르 레핀이 다음 왕이 될지도 모른다, 이 말이십니까?”

그 말을 한 것은 벡카드 가문의 후계자, 찰스 벡카드였다.

그때 누군가 반발하듯 외쳤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낱 사생아 따위가 왕위에 오르는 게 말이 됩니까?”

“옳은 말이오! 사창가에서 굴러먹던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가 왕이 되다니···.”

술렁거리는 회합장 안을 크로이츠는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그가 이 화두를 꺼낸 것은 처음부터 이런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니까.

저마다 흥분해 떠들어대는 귀족 무리를 바라보던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세자르 레핀이 왕좌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 외의 누가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 대담한 발언에 모두의 눈이 커졌지만.

“···세자르 공 다음의 왕위계승순위가 어떻게 되지?”

누군가 이렇게 대꾸한 것을 시작으로 그들은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했고.

그 결과, 왕위계승순위 3위인 에드윈 레핀의 이름이 튀어 나왔다.

크로이츠 백작은 그들의 의견을 정리하듯 말했다.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지 않소. 어디서 굴러먹던 말뼈다귀인지 알 수 없는 서자보다 이 에드윈 레핀, 혹은 그의 적자 퍼시 레핀이야말로 좀 더 정통성 있는 왕의 재목이라는 것.”

그는 참석 인원을 죽 둘러보며 덧붙였다.

“이 의견에 모두가 동의한다면, 우리 귀족회 차원에서 움직임을 취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날.

노엘 크로이츠 백작을 필두로 한 귀족 세력은 은밀한 합의를 보았다.

···에드윈 레핀과 물밑 접촉하여 그를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기로.

하지만 그때의 그들은 몰랐다.

그들 말마따나 어디서 굴러먹던지 알 수 없는 말뼈다귀 같은 세자르 레핀이,

그 독사처럼 교활한 두뇌를 이용해 그들보다 이미 한 발 앞서 나갔다는 것을.

덕분에 며칠 뒤, 보좌관에게 에드윈 레핀의 근황을 물은 크로이츠 백작은 기함하고 말았다.

“···에드윈 공은 이미 초대를 받아 저택을 떠났다는데요?”

“뭐? 초대를 받다니, 누구에게?”

“음, 그것이···.”

‘세자르 레핀 공자에게 정식 초청을 받았답니다.’

보좌관의 보고에 노엘 크로이츠는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아카데미의 학장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학장님.”

내가 학장실에 있는 이유는 별 것 아니었다.

간만에 아카데미를 방문했더니.

‘아이고 우리 세자르 공 오셨나!”

리히터 슐츠 학장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반긴 탓이었다.

슐츠 학장은 손수 우러낸 차를 내 앞에 놓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군. 그간 공사다망한 것은 소문으로 들어 익히 짐작하고 있었네.”

나는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학장실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처음만 해도 ‘덩치’와 시비가 붙은 탓에 학장실로 불려온 거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학장의 최애 손님이 되었다니, 세상사란 참 모를 일이다.

“간만에 오니 감회가 새롭군요.”

“감회? 아, 그렇겠군.”

학장은 내가 말하는 바를 알아차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이곳 아카데미는 고아한 상아탑 같은 곳이 아니네.”

“저도 잘 압니다.”

“이해해주니 고맙군.”

“그간 사정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말에 학장은 두 손을 내저었다.

“감사하긴! 나랏일로 바쁜 학생에게 그 정도 편의야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이대륙을 건너왔다는 귀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학장님을 뵈러 온 것이기도 하고요.”

“나를 보러 온 거라고?”

“인재 영입차 방문했다고나 할까요.”

“그게 무슨···.”

영문을 몰라하는 학장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 사둔 땅에서 금광이 발견됐다는 건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계실 테고.”

학장의 표정이 바뀌더니 눈빛에 기대감이 어렸다.

“거기서 나오는 자금을 투입해 ‘세자르 레핀 장학재단’을 만들 생각이거든요.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장학재단.

오늘 내가 아카데미를 방문한 주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아카데미야말로 이 나라 최고의 인재들을 떡잎부터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니까.’

고위 귀족 자제들이 오는 교양학부는 예외이지만, 그 외 학부의 입학생들은 모두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이들.

···그들 중에는 경제고에 시달리는 이가 적지 않다.

‘이들 중 일부를 선발해 세자르 레핀 재단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수여한다면?’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한 복지 사업일 뿐이지만.

결국은 나와 레핀 가문을 위해 일할 인재들을 배출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맙소사, 이건 정말··· 파격적이군.”

내가 건넨 장학재단 사업 서류를 홀린 듯이 읽은 학장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장학 사업에는 단순한 장학금 외에도 다양한 지원책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학생들을 위한 고급 기숙사를 제공하는 안건도 있었다.

‘이른바 세자르 레지던스랄까.’

미래에 나를 위해 일하게 될 이들인데, 좋은 곳에서 편하게 먹고 자고 해야 하지 않겠어?

새로운 인재들을 영입할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학장과 장학재단 얘기를 어느 정도 마친 뒤, 나는 지나가듯 한 마디를 던졌다.

“아, 그리고 학장님. 한 가지 작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큰 부탁도 상관없으니 뭐든 말하게!”

학장은 충성심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호기롭게 대답했다.

“혹시 조기졸업 가능할까요?”

* * *

학장과 있었던 이야기를 다 들은 테오 2세가 배를 잡고 웃었다.

이게 그렇게까지 우스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워 보이니 그냥 놔두자.

한참을 즐겁게 웃던 국왕이 눈꼬리를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칭찬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큰 걸 제시하고 작은 걸 거저 얻어낸다, 짐 또한 교훈을 잊지 않겠네.”

본인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럼 세자르 공은 6개월 뒤에 졸업하는 셈인가?”

“그렇죠.”

학장은 내 요구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학칙을 뜯어고쳐서라도 졸업시켜주지!’

이놈의 세계도 돈과 권력이 최고다, 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쨌거나.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면 정식으로 왕의 가신으로 활약할 수 있는 자격과 명분이 동시에 생긴다.

그리고 이미, 테오 2세는 내게 많은 것을 약속해놨다.

“짐이 이곳 왕궁에 그대의 자리를 마련해뒀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대답은 이렇게 장난스럽게 했지만, 내심 기대가 컸다.

테오 2세가 내게 약속한 자리는 다름 아닌 의전관이었으니까.

‘보통의 아카데미 졸업생은 궁내의 최하위직부터 시작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의전관은 향후 왕실 고문관, 재상 등으로 승진할 수 있는 엘리트 보직이라 할 수 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왕궁회의에 참석할 권한이 있을 뿐더러.

국왕이 호출할 때마다 언제든 달려가 보좌해야 하는 최측근이다, 이 말이지.

내 얼굴에 떠오른 기대감을 알아차렸는지 테오 2세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리는 물론이고 일거리까지 마련해뒀다네.”

“참으로 현명한 군주이십니다.”

“짐이 현명한 건 그대가 알고 짐이 알고 세상 모두가 아는 사실이네.”

···그렇게 말하는 소년이 얼마나 깜찍한지, 나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그대의 아카데미 졸업을 짐 또한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 잊지 말게나.”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는 소년 국왕의 얼굴이 유난히 화사해 보인다.

요즘 건강이 좋아졌다더니 그 덕분인가.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키도, 체격도 한결 커졌다. 이목구비도 뚜렷해져 어린 아이 같은 느낌이 사라지고, 제법 소년다운 미모가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폐하가 올해로 열한 살이 되시는군요.”

만으로 열한 살. 우리 식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 정도의 나이다.

“그렇지.”

소년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묘한 불안감을 파악하지 못한 채, 나는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때가 되면 폐하께 간언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해보게.”

고개를 들어 국왕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 이 정도면 이제···.

“폐하, 세간에서 왕실의 힘이 불안정하다고 말하는 가장 큰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짐에게 후계가 없어서이지.”

역시. 국왕이 모를 리 없다.

“나이가 어리시니 후계가 없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도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려는 제안 또한 예상 못할 리 없을 텐데.

국왕이 내 말을 가만히 경청했다.

“그건 바로··· 약혼입니다.”

이 시대의 왕족과 귀족들은 대부분 정략혼을 한다. 그 상대는 보통 10대 초반에 정해지기 마련.

“이른 편이시긴 하지만, 왕비 후보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두는 것은 좋지 않으니까요. 적당한 신붓감을 물색해 혼약을 맺어두시면 그것만으로도 왕권 강화에 큰 보탬이 될 겁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의구심이 들었다.

이런 단순한 생각을 테오 2세나 그 주변인들이 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짐작했던 대로 테오 2세는 이미 그 가능성을 생각해봤던 모양이다.

“그대 말은 틀리지 않아. 그런데···.”

왕권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그가 왜 이런 쉬운 일 앞에서 몸을 사리는지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서 말이야.”

“문제라뇨?”

테오 2세가 나를 빤히 마주 보았다.

요즘 들어 더욱 또렷해진 눈매.

앵두 같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입술.

유난히 고운 얼굴선과 점점 부드러워지는 몸의 라인···.

‘잠깐만, 혹시.’

그 순간, 얼마 전 봤던 도전과제 항목이 떠올랐고.

-국왕의 비밀을 알아냈나요?

뭔가를 깨닫고 말았다.

“···설마.”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국왕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자르 공. 그대에게 고백하고 싶은 사실이 있네.”

꼴깍.

나는 침을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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