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03화 (103/176)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법

바로 그 시각.

리아나 모건은 왠지 모를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왜 이렇게 예감이 좋지 않을까.’

대공성에 도착한 첫날.

그녀의 간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대공은 그다음날 리아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타릭 벡카드가 네 아들의 가신이 맞는가?’

‘네, 맞습니다. 헌데···.’

‘그에게 약을 전달했다. 상처 치료에 즉효라고 들었으니 금세 건강을 회복할 거다.’

그렇게 말하는 대공의 얼굴은 자애로웠다.

리아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각하,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니다. 네 말대로 그 아이 또한 내 핏줄이 아니던가. 어제는 나 역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애꿎은 네게 화를 내고 말았다만···.’

대공은 리아나의 고개를 들게 했다.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실수를 했기로서니 내 자식을 내칠 수는 없는 법. 일단은 그곳에서 몸을 추스르기를 기다리고, 소식이 오는 대로 다음 일을 도모해보자꾸나.’

‘네, 각하.’

리아나는 눈물을 떨구며 약속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은혜를 갚겠다고.

···그 진심 어린 맹세에 대공이 설핏 미소를 지은 것은 보지 못한 채.

다음 날 야심한 시각.

그녀는 대공의 집무실이 자리한 복도 끝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곳을 들락거릴 수 있는 것은 대공과 그의 비서관뿐임은 잘 알지만.’

알 수 없는 직감에 이끌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죽여가며 대공의 집무실 근처에 다다른 순간.

문 안쪽에서 오가는 대화가 들려왔다.

···대공과 비서관의 목소리였다.

“그 계집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 계집이라니.

비서관이 ‘그 계집’이라고 칭할 만한 여인이 자신 외에 또 누가 있을까.

“진상을 알게 되어 일을 그르치기라도 할까 봐 염려가 됩니다만···.”

“흠, 글쎄.”

“필요하시다면 조용히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리아나는 비서관이 늘 저를 호시탐탐 노린다는 것을 잘 알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손을 뻗치려는 속셈일까 싶었지만.

‘진상이라니, 대체 뭘 말하는 거지?’

엄습하는 불안감에 가슴이 죄어드는데, 대공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 지금은 때가 아니다. 계집은 아직 쓸모가 많으니.”

“하지만···.”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 역시 잘 알지 않느냐?”

“···.”

저 말을 들으니 확실해졌다.

‘그 계집’이란 다름아닌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이.

“사내라면 누구든 상관없이 저의 추종자로, 아니 백치나 다름없게 만들 수 있는 계집이다. 그런 귀중한 도구를 또 어디서 얻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명심하겠습니다.”

리아나는 차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꽉 쥐었다.

대공에게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잘 알았지만, 저 정도로 취급되는 줄은 몰랐다.

조심스레 몸을 돌리려던 순간,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팰러스 놈이 드디어 죽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팰러스가 죽다니?

‘분명 오늘 아침만 해도 약을 보냈다고 했는데.’

리아나는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에 들려오는 말은 더더욱 놀라웠다.

“기다렸던 소식이로군.”

“하지만 작은 문제가 생겨서···.”

“문제라니?”

“약은 예정대로 잘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팰러스가 약을 먹고도 곧바로 죽지 않자, 타릭이 놈을 목 졸라 죽이려 했다는군요.”

“허, 이것 참.”

“게다가 그 타릭은 에스닐 왕실에서 보낸 군대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요.”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가 비서관의 말이 이어졌다.

“팰러스의 시체를 부검하면 독이 검출될 테니, 자칫하면 이들 뒤에 우리 공국이 있다는 것을 저쪽에서 눈치챌 수도 있는 상황이지요.”

“···혼란스럽게 할 만한 정보를 흘려야겠군.”

“안 그래도 그리 말씀하실 줄 알고 이미 손을 써뒀습니다.”

그제야 대공의 목소리가 좀 밝아졌다.

“좋아. 이번 일은 계속 예의주시하고, 주기적으로 보고하게.”

이어서 둘은 다른 화제를 주제 삼아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리아나의 귀에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팰러스에게 보냈다는 약이··· 독이었다는 건가.’

비명을 지르려는 제 입을 필사적으로 틀어막았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데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팰러스!’

저의 소중한 아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그 아이에게···.

‘아비라는 자가 독을 먹였다고?’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이라는 게 이런 걸까.

리아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을 느끼며 다짐했다.

맹세코 저자를, 칼 오프러스를 제 손으로 파멸시키고 말겠다고.

바로 그것이,

리아나가 모든 자료를 훔쳐가지고 대공성에서 도망쳐나온 이유였다.

* * *

팰러스와 타릭의 장례식이 각각 치러진 지 약 석 달 후.

나는 한동안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했다.

일단은 가장 큰 적대 세력이었던 팰러스와 리아나 부인이 떨어져 나간 덕이 컸다.

‘그 둘이 암살자를 보내지 않으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수밖에.’

그와는 별개로 에스닐의 정국은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는데.

“···그 혼란의 중심에 있는 건 벡카드 가문이야.”

심각한 표정의 카렌은 벡카드 가문이 본격적으로 헬리오스 가문과 협력을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벡카드 가문과 헬리오스 가문이라···.”

여느 때처럼 내 집무실에서 가신들을 모아놓고 보고를 받던 나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타릭의 장례식 때 가주인 벡카드 백작 부인이 혼절했다고 했던가?”

내 말에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 해도 충격이 컸던 것 같다.

“벡카드 가문의 여론은 절반으로 나뉘었다고 해. ···백작 부인을 중심으로 하는 반란 찬성파, 후계자인 장남 찰스 벡카드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로 말이지.”

벡카드 백작 부인은 헬리오스 백작의 처제가 되는 셈이니, 그쪽 가문과 얼마든 협력할 여지가 있을 거다.

“좋아, 카렌. 앞으로도 계속 벡카드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줘, 특히···.”

나는 새로 생긴 어느 도전과제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반란의 조짐을 파악했나요?’라는 과제가 있는 걸 보면, 그 시작점은 필시-

“벡카드 가문과 오프러스 공국의 물밑 접촉. 거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될 테니까.”

칼 오프러스 대공이 벡카드 가문을 내버려둘 리 없다.

이건 터무니없는 추측 같은 게 아니라, 확실한 정보와 증거를 가지고 추론해낸 결론이다.

왜냐하면.

‘그 둘이 비밀리에 접촉한다는 내용이 특별외전에 언급되었으니까.’

얼마 전 도전과제 세 개를 한꺼번에 달성하며 받은 보상인 <후일담 - 미처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

여기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 도입부를 잠깐 살펴보자면.

『레핀 공작가의 적장자, 팰러스 레핀은 왕좌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나 금세 ‘피에 젖은 폭군’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저의 충실한 가신들을 숙청하는 것으로 시작된 악행은 점차 정도가 심해졌고.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다! 누구 없느냐! 여기, 여기 우만이 내 목을 조르려···.’

허공을 가리키며 헛소리를 하는 것은 예사였다. 나중에는 궁중의조차 그의 광증이 중증을 넘어섰다고 판단할 정도였으니.』

뒤늦게 든 생각이긴 하지만, 팰러스는 이미 어느 정도 강박증적인 단계에 들어서 있었던 게 아닐까.

임종 직전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칼 각하마저도 나를, 모두가 나를···.’

아버지가 자신의 친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던 영민한 아이.

그는 칼 오프러스 대공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평생 주변인을 세뇌하며 살아온 인간이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게 오히려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다.

『즉위한 지 정확히 1년째 되는 날, 팰러스는 해로드 왕가에 충성했던 페킹튼 가문원들의 칼을 맞고 숨졌다.

특히 팰러스 레핀의 목숨을 직접 끊은 가문의 차남, 리암 페킹튼은 ‘폭군 처단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니.

팰러스가 죽은 뒤, 에스닐의 왕좌는 왕위계승법에 따라 그의 당숙인 에드윈 레핀에게 돌아갔다.』

충격 포인트는 두 가지.

나는 옆에 앉은 리암을 돌아보았다.

“리암.”

“응?”

“너 혹시··· 가끔 욱해서 회까닥 돌아버릴 때 있지 않냐?”

“무슨 소리야.”

리암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더니, 꼼꼼히 작성한 서류를 건넸다.

“그나저나 이거나 봐봐. 이번 분기 기사단 현황 보고서인데···.”

가문의 이름을 달고 있되, 실상은 내 개인 기사단이나 다를 바 없는 ‘레핀 기사단’.

기사단의 모집은 무사히 잘 끝난 터였고, 리암은 그 총괄보조로서 관리를 맡고 있었다.

나는 리암이 내민 보고서를 죽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꼼꼼하고 온순한 리암이 폭군 처단자가 되었다니.’

운명의 장난 같은 걸까.

아니면 리암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충성심을 누군가가 이용한 것일까.

어쨌거나 이 점이 첫 번째 충격 포인트라면, 두 번째 충격 포인트는.

“아 그리고 카렌.”

“응?”

“한 가지 더 조사해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카렌은 뭐든 말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최근 검은손 길드에서 가장 유능한 인재들만 뽑아 ‘세자르 레핀 밀정대’를 구성한 터였고.

‘세자르, 우리 밀정대의 최장점이 뭔지 알아?’

‘뭔데?’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소문조차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자들로 이뤄져 있다는 거지.’

최하층민으로 이뤄진 덕분에 민심에 즉각적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밀정대라는 것.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그녀에게 나는 이름 하나를 댔다.

“에드윈 레핀이라는 자를 알고 있나?”

“에드윈 레핀이라면 로건 공의 사촌형제라고 알고 있는데.”

그 말이 맞다.

팰러스가 죽은 뒤 새로이 왕위에 오른 에드윈 레핀.

내게는 당숙뻘이며 현재로서는 왕위 계승순위 3위에 해당하는 사내였다.

‘그러고 보니 왜 그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았을까.’

원작의 세계관에 갇혀 있었던 탓일까.

팰러스가 죽고 나서 누군가가 또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못 해본 내게는,

이 사실이야말로 두 번째 충격 포인트였다.

“에드윈 레핀, 그리고 그자의 아들인 퍼시 레핀을 최대한 자세히 조사해줘.”

“탈탈 털어서 먼지 나올 구석이 있는지까지 조사해볼게.”

“그리고.”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 둘이 오프러스 공국과의 접점이 있는지도.”

오프러스 공국. 이 말을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왕도의 대가 특별외전’은 이런 내용으로 마무리되었으니까.

『그러나 세간에서 모르는 사실이 있다.

···아무리 왕위계승법에 따른 결정이라고는 하나, 에드윈 레핀이 결코 순조롭게 왕좌에 앉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

그 뒤에는 오프러스 공국과 그 최고 권력자 칼 대공의 보이지 않는 원조가 있었으며.

‘이로써 우리 에스닐은 오프러스 공국과의 오랜 원한을 청산하고, 건실한 우호 관계로 거듭날 것을 왕의 이름으로 천명한다.’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드윈 레핀 아니 에드윈 1세는 본디 벡카드 가문의 영지였던 로안 강 지대를 공국에 돌려주는 초유의 수를 강행했다.

···그것이 정말로 순수한 우호 관계를 위한 첫 걸음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원조’에 대한 대가인지는 후대에서 판단할 일이리라.』

그 외에도 가신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금광 사업은 순항 중이며 3형제가 이끄는 기마부대의 육성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집무실을 나선 나는 총관 카얀에게 향했다.

“카얀, 자네가 아버지의 허가를 받아 초청장을 하나 써줬으면 하는데.”

“누구에게 말씀이십니까?”

“아버지의 사촌형제이시자 내 당숙뻘이 되는 분이 계시다고 알고 있는데.”

카얀은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에드윈 레핀 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에드윈 공과 그 자녀인 퍼시 레핀과 도나 레핀을 이곳으로 초대해주게.”

총관은 그 이상 질문하지 않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꾸벅 인사하고 물러서는 총관의 뒷모습을 보며 결심을 되새겼다.

‘칼 오프러스 대공이 에드윈 일가에게 손을 뻗치기 전, 내 손으로 불러오기로 말이지.’

역사의 흐름을 피할 수 없다면,

내 손으로 바꿔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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