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뒷맛
취사실에선 굳이 피를 볼 필요도 없었다.
무기조차 들고 있지 않던 취사병들은 디터의 몽둥이질 몇 번에 그대로 기절했으니까.
금세 상황이 종료되자 세자르가 지시했다.
“나와 우만은 위로 올라가 팰러스를 잡겠다. 그 사이 너희들은 성벽 쪽으로 이동해 도개교를 내리도록.”
“맡겨주십시오, 도련님.”
발닉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발닉 자네라면 최단이동경로를 알고 있겠지. 대부분의 병력이 그쪽에 몰려 있는 만큼, 다들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
그 말을 끝으로 일행은 두 개로 나뉘었다.
위층으로 향하는 세자르와 우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디터가 고개를 돌렸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것은 본관을 나와서부터였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며 이동하던 그들은 순찰 중이던 경비병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렸고.
“너희는 누구··· 컥!”
“누구 없나! 침입자, 침입자가 발생했다!”
디터의 몽둥이질 한 번에 경비병의 투구가 우그러졌다.
동료가 그대로 기절하는 모습에 당황한 다른 경비병이 소리를 높였다.
그의 부름에 무장한 경비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침입자라고? 어디, 컥···.”
“다들 무기를 쥐어라!”
더는 안 되겠군.
디터는 몽둥이를 내버리고 강철 메이스를 들었다. 그대로 휘두르며 경비병 사이로 돌진하려던 순간.
부우웅! 푹!
···롯의 검이 선수를 쳤다.
“크악!”
그녀의 오빠들이 감탄하며 한 마디씩 했다.
“우리 여동생 실력이 좀 뛰어나야 말이지.”
“자네 혼자 싸우려고 하지 말게!”
“공은 나눠야 제 맛이지!”
기합과 함께 적진으로 뛰어드는 3형제의 모습에 디터는 헛웃음을 흘렸다.
한 명을 더 처리한 롯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다 죽이고 가죠. 침입자의 존재를 떠들고 다니면 곤란해지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여기선 왼쪽으로!”
발닉이 그녀의 말을 받으며 방향을 알렸다.
가신 일행은 발닉의 지시를 필두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는 곳마다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부웅! 퍽! 쿠왁!
맨앞에서 디터가 휘두르는 메이스 앞에서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으악, 괴, 괴물이다!”
“어떻게 이곳에 침입자가··· 커억!”
“야만인, 야만인들도 있다!”
디터뿐이 아니었다.
3형제는 제 키만 한 창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사정없이 넘겨버렸고.
롯의 검날 또한 바람처럼 움직이며 상대의 목숨을 한 방에 끝장냈다.
“살아 있는 공성전차 수준이군.”
디터와 3형제, 롯이 펼치는 사기급의 무공에 발닉이 감탄하는데, 앨빈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흑의 기사로 빙의할까요?”
“여긴 앨빈 님의 평소 실력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발닉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앨빈이 당황했다.
“그간 실력이 일취월장하셨다는 거 압니다.”
“···.”
앞에서 디터 무리가 병사들을 날려버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후방을 주의하며 조심스레 전진했다.
···성문까지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 * *
대체 몇 시간이나 잔 걸까.
팰러스는 잘 뜨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실내가 어둑어둑했다. 방에 들어오는 빛이라고는 창문 너머에서 환히 빛나는 달빛뿐.
“타릭, 타릭, 어딨나.”
목이 바짝 마른 탓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타릭의 이름은 불렀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집어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자는 없었다.
“거기 아무도 없나, 컥···.”
갑작스레 움직인 탓인지, 돌연 갈증보다 더한 통증이 엄습했다.
고개를 돌리자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이 보였다.
···너덜너덜해져 흉하기 그지없는 팔뚝 총상도.
‘주치의 말로는 금방 좋아질 거라 합니다.’
‘생각만큼 깊은 상처가 아니라 하니···.’
‘진통제를 더 드릴까요?’
타릭은 대수롭지 않은 상처라 했지만, 팰러스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기절했다가 하루 후에 의식을 되찾을 정도였으니까.
“여기 온 지 대체 얼마나 된 거지···.”
흐릿한 천장을 눈에 담으며 팰러스가 중얼거렸다.
통증 자체는 둔해졌지만 총상은 아물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었다. 이제는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으니.
···설마, 이대로 팔을 도려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 타릭이 오늘 새로운 약을 주지 않았던가.’
효과가 빠른 약이라는 얘기에 팰러스는 대뜸 그것을 삼켰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그 후로 몸이 영 좋지 않았다.
온종일 미열과 오한에 시달렸고, 식은땀에 침대보가 젖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팰러스는 타릭의 이름을 불렀지만 자신의 마지막 남은 충신은 어쩐지 모습을 드러내질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이건 꿈일 거야.’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열에 들뜬 팰러스가 눈을 감았다.
그의 의식이 현실과 환상 사이를 수차례 오갔다.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자 사교계의 총아로 꼽히는 자신.
대공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왕좌로의 계단을 한 개씩 밟아올라 가는 자신.
늘 보이는 무뚝뚝한 얼굴과는 달리, 자신의 공적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아버지.
저 아래서 자신을 올려다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네가 해낼 줄 알았다는 눈빛을 보내는 어머니.
그리고 저 구석에서 맹수처럼 눈을 빛내는 건···.
‘빌어먹을 세자르가-’
탕!
그의 환상은 언제나 세자르의 총에 맞는 것으로 끝났다.
“컥!”
팰러스는 감전이라도 당한 듯 번쩍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이성이 되돌아왔고 현실을 깨달았다.
“여기는···.”
너덜거리는 팔. 아무도 오지 않는 골방.
식은땀에 절어 축축한 몸.
방 안에 가득한 죽음의 냄새.
고개를 돌리자 다 식어빠진 스프 그릇이 보였다.
오늘 아침에 타릭이 약과 함께 가져다준 것이다.
‘그 후로 오지 않은 건가.’
하, 한숨이 나왔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신세로 전락하게 된 걸까.
‘우만 네가, 네가 나를 배신해?’
단 한 순간의 오판.
그것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음을 다시금 절감하는데.
또다시 그 지긋지긋한 통증이 덮쳐왔다.
“흐윽···.”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을 때, 옆에서 기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 열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는데?’
그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 순간, 팰러스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듯 커졌다.
“···너는.”
벽을 뚫고 나타난 우만과 세자르의 모습에,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 * *
그로부터 10분 전.
대부분의 병사가 성벽을 지키고 있다는 발닉의 보고는 정확한 듯했다.
본관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죽하면 우만은 그 점이 되려 불안했는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너무 휑한데? 이거 설마 함정은 아니겠지.”
“그럴 린 없어.”
요새의 본관이란 애초 성주와 그 가족들이 전시 중에 쓰는 공간이다. 이곳을 지키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병사들이 들락거릴 일이 없는 곳.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성주 가족이 아닌 골칫덩이 막내와 그가 데리고 온 애물단지 범죄자가 아닌가.’
벡카드 가문 입장에서도, 병사들 입장에서도 절대 달가운 존재는 아니다.
그 말인즉, 우리 입장에서는 거의 방해받지 않고서 두 발로 걸어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
게다가 발닉은 최적의 경로를 따로 알려주기까지 했다.
‘이대로 가면 단 한 명의 병사도 마주치지 않고 목적지에 닿으실 겁니다.”
“···정말이군.”
우만이 감탄하며 말했다.
우리는 정말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2층, 문제의 방 앞에 도달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방에 팰러스 혼자뿐이라면 문제가 안 된다. 부상당한 몸으로 우리에게 반격하긴 무리일 테니까.
하지만 타릭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불, 물, 바람, 흙이라는 4대 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원거리형 딜러.
‘더불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잔학성까지 갖추고 있지.’
그와의 정면 승부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최선은 뒤에서 기습하는 것, 차선은 그가 내 목숨을 노리는 순간-
‘절대 빗나가지 않는 권총을 쓰는 거지.’
이 권총의 유일한 약점은 상대가 내 목숨을 노려야만 발동시킬 수 있다는 거니 말이다.
나는 그 점을 우만에게 상기시키며 속삭였다.
“일단 네 이능을 써서 안으로 들어가고, 타릭이 안에 있다면 곧바로 기습한다.”
우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 팔을 내밀었다.
“잡아라.”
팔을 붙잡자 우만이 두 눈을 감고 이능을 시전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강렬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고.
우만을 따라 그대로 몸을 움직이자.
‘대박.’
내 몸이 그의 뒤를 따라 그대로 벽을 통과하는 것이 아닌가.
벽이 아니라 뭉글뭉글한 젤라틴을 통과하는 감각을 느끼며 방 안으로 들어서자.
어쩐지 시큼한 냄새가 감도는 가운데, 생각보다 단출한 실내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다지 귀한 대접을 받는 건 아닌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희뿌연 어둠 속, 침대에 상체를 세워 앉은 인물의 모습에 몸을 흠칫했다.
땀에 흠뻑 절어 있는 금발,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린 안색, 시커먼 눈 아래까지.
환자가 아니라 유령처럼 보이는 저 사내가···.
‘정말 팰러스라고?’
팰러스의 고개를 천천히 이쪽으로 향했다.
생기 없는 눈의 초점이 차츰 생겨나더니 핏기 없는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너희는···.”
도저히 제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
하긴 아무도 없던 방에 갑자기 나와 우만이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여기에 숨어 있었나.”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지만 속으로는 당황한 터였다.
그와의 전투에 대비해 품에 숨겨온 권총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을 줄은 몰랐는데.’
내 옆에 선 우만은 더더욱 표정이 안 좋았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복수의 칼을 갈았을 테니.
병자 같은 팰러스의 모습에 느끼는 당혹감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
우만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데, 팰러스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보는 게··· 환상인 건가?”
환상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정도인 건가.
파랗게 질린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죽음을 목전에 둔 건가? 죽기 직전에 내 원수들이 나를···.”
“팰러스.”
나는 그의 말을 자르며 한 발 다가갔다.
팰러스의 눈이 유령이라도 본 듯 커졌다.
“네가 보는 건 환상이 아냐.”
“···.”
“우리는 국왕 폐하의 교지를 받들어 수배자인 너를 체포하러 왔다.”
“···수배자.”
팰러스가 혼잣말처럼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수배자라니, 이런 내가 수배자라니···.”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웃던 그가 우리에게 시선을 맞췄다.
“세자르. 이게 믿겨지나?”
“···.”
“나는, 나는··· 얼마 전만 해도 가장 빛나는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시선은 더는 나를 향하지 않았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혼잣말 비슷한 것을 이어나가는 팰러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는데 옆에서 우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아닌데.”
“우만?”
“내가 생각한 복수의 순간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우만은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이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팰러스를 여기서 죽일 거냐는 질문에 나는 그의 의사를 되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지?”
“···나는.”
우만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내가 직접 심판하기보단··· 제대로 된 처형을 받게 하고 싶다.”
“네 뜻이 그렇다면.”
나는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든 팰러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우리의 등장에도 사람을 불러올 생각조차 못한 것 보면 상태가 심각한 것 같았다.
“들것 같은 게 있나 이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
우만이 벽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기절해버린 팰러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씁쓸하군.’
어쨌거나 팰러스는 한때 내가 열광했던 소설의 주인공이었으니까.
뒷맛이 개운치 못한 동시에 실망스럽기도 했다.
‘<왕도의 대가>에선 순수한 악과 카리스마의 결정체로 묘사되었던 팰러스였지만.’
그 실상은 세뇌의 이능으로 주변을 홀리고 다닌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팰러스 역시 더 힘 있는 자의 꼭두각시뿐이었을지도.
‘칼 오프러스 대공.’
그자와 팰러스, 리아나 부인 사이에는 대체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는 걸까.
시체나 다름없는 팰러스를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 너머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나는 그 즉시 구석에 있는 옷장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문짝 사이로 바깥을 주시하며 숨을 죽이는데.
철컥,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타릭이 왔나.’
예상대로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타릭이었다.
긴장감 때문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린다.
타릭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침대 앞에 섰다. 인기척에 의식을 되찾은 건지, 반쯤 눈을 뜬 팰러스가 입을 열었다.
“타릭, 너인가···.”
“정신 차리셨습니까.”
“팔이, 팔이 불타는 것 같아. 약을 먹어도···.”
지금 이 상황에서 타릭을 실수 없이 처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선의 방책을 고민하느라 여념이 없던 중.
천천히 이어져오던 팰러스의 목소리가 돌연 멈췄다.
나는 다시 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어?’
눈앞에서 펼쳐진 의외의 광경에,
빠르게 돌아가던 뇌가 순간적으로 활동을 멈춰버렸다.
“컥, 크윽, 타, 타릭···.”
···타릭이 팰러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