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안으로
바로 그 시각,
오프러스 공국 수도에 자리한 대공성의 알현실.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 차림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왕좌에 앉은 사내 앞으로 나아갔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각하.”
날카로운 눈빛과 금욕적인 인상이 눈에 띄는 건장한 사내.
이 공국 최강의 권력자인 칼 오프러스 대공이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나의 리아나여.”
여전히 고혹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얼굴,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희게 빛나는 어깨.
지나가는 누구든 한 번씩은 돌아보게 만드는 마성의 미녀를 대공은 냉담한 눈길로 빠르게 훑었다.
“각하,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네 보고는 잘 받았다.”
리아나의 보고는 소상했으며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녀의 아들, 팰러스가 레핀 공작 살인교사죄, 법정모독 및 습격죄로 수배당했고.
재판 당시의 총격으로 팔 부상을 입었으며.
『···지금은 타릭 벡카드의 가문 소유인 가야르 요새에 숨어 요양 중입니다.』
부상자를 데리고 수배령을 뚫고서 국경을 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타릭이 부득이하게 팰러스를 데리고 가문의 요새에 숨어든 것은 바로 그러한 연유였다.
“각하,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본디 라페스 자작의 별장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리아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공국으로 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 둘의 힘으로는 국경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하께서 도와주신다면.”
리아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각하께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걸 좋아하시지 않아.’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여인이라고 해도, 그녀 또한 한 명의 어미였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식의 목숨을 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리아나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말했다.
“팰러스를 이곳으로 데려와 후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제 아이가 큰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헬리오스 가문을 비롯해 아직 그를 따르는 가문이 제법 있으니-”
“···팔 병신이 된 녀석을 반란군의 수장으로 앞세우겠단 말인가?”
“···!”
차갑다 못해 냉혹한 목소리에 리아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대공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간신히 다음 말을 꺼냈다.
“벡카드 가문의 주치의가 붙어서 치료 중이라고 합니다. 큰 부상인 것은 확실하지만 회복된다면 얼마든-”
“이미 1안은 물 건너간 상황이다. 왕위 계승권 없이 왕좌를 주장하는 자는 반역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판결을 내리듯 떨어지는 목소리에, 리아나의 심장이 철렁했다.
칼 오프러스는 혀를 찼다.
이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1안은 레핀 공작을, 그리고 소년 국왕을 어떻게든 암살한 후 왕위 계승 순위 3위인 팰러스를 왕위에 올리는 것.
그리고 그 꼭두각시의 줄을 조종하는 자신이 에스닐의 진짜 실세가 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물 건너간 상황이고.’
그나마 2안이라 하면,
세자르 측이 제기한 ‘호적 파기의 소’가 허무맹랑한 정치적 공격이라고 주장하며 팰러스를 향한 동정 여론에 불을 붙이고.
팰러스를 옹호하는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반란 세력을 일으켜 그 힘을 공고히 다질 생각이었는데.
“···이게 다 네 아들이 멍청하게 대처한 탓이다.”
“가, 각하···.”
“재판관들에게 ‘버러지 같은 놈들’이라고 일갈하며 멀쩡한 시민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범죄자를 누가 옹호하겠나!”
리아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이 주먹을 꼭 쥐었다.
“그놈은 이미 쓸모 없는 패다. 그러니 네 아들을 살려내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
“나가라, 리아나.”
대공은 리아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 리아나 따위는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이십여 년에 걸쳐 공들여 세운 계획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은 화나는 일이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10대 후반에 이미 음모와 계략이 판치는 정치계에 몸 담은 그였다.
칼 오프러스는 빠르게 감정을 가라앉혔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발톱을 숨겨야 한다.’
팰러스가 무너져내렸다고는 하나,
그것이 에스닐의 왕권 강화를 의미하지는 아니니까.
‘지켜본다면 파고들 틈은 얼마든 나올 터.’
오히려 처음 이 계획을 구상했을 당시의 에스닐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강국이었다.
유스톤 3세가 쌓아올린 수많은 업적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왕권.
그러나 칼 오프러스는 그 안에도 반드시 빈틈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것을 찾아내 서서히 공략해왔다.
‘그리고 여기 있는 리아나가 그 시발점이었지.’
사창가에서 태어난 최하층 계급의 소녀.
타고나길 아름다운 외모로 신분 상승에 성공했지만, 졸부의 아내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남편을 죽여 받은 유산으로 새로운 남편감을 물색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마침내 덜미가 잡힌 그녀는, 흥미가 동한 대공의 앞에 끌려왔다.
‘네가 세 명의 남편을 살해한 과부 독거미가 맞느냐?’
대공은 놀라고 말았다.
무려 세 번의 결혼을 했다는 여인의 나이가 꽤 어려 보였기에.
‘그렇습니다.’
‘몇 살이냐.’
‘열일곱입니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건지 짐작도 되지 않는 소녀 앞에서 대공이 잠시 말을 잃은 순간.
‘각하, 저를 써주십시오.’
‘너를 써달라고?’
‘저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매혹의 이능.
그 정체를 알게 된 대공은 그녀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깨달았다.
‘지금 에스닐의 왕위 계승 순위가 어떻게 되지?’
왕가는 대대로 자손이 적었다.
직계 왕손인 두 왕자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순위에 있는 것은 왕가의 사촌뻘인 레핀 가문의 직계들.
‘로건 드 레핀이라.’
대공은 그를 철저히 뒷조사했다.
로건의 여자 취향은 물론이고, 그가 대를 잇지 못하는 몸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가서 놈에게 접근해라, 리아나.’
‘네 능력으로 놈을 홀려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고’
‘네 배 속의 아이를 에스닐의 왕으로 만들려므나.’
그 모든 것은 착착 진행됐다.
다만 마지막 단추를 잘못 끼웠을 뿐.
‘곧 과실을 거둘 순간이 다가온다.’
그런 만큼 더더욱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팰러스는!”
-라고 이어져오던 대공의 사고 흐름을, 리아나의 앙칼진 목소리가 끊어버렸다.
“그 아이는··· 각하의 자식이잖습니까!”
대공은 하, 하고 한숨을 내뱉더니.
그대로 고개를 들어 리아나를 돌아보았다.
“나의 리아나여.”
리아나의 눈에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제 앞에 무릎을 꿇을 준비가 된 그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의 자식이 네 아들뿐인 줄 아는가?”
“···!”
“지금까지 수고했다.”
마지막까지 침착을 유지하던 리아나의 몸이 무너졌다.
그녀의 통곡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대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알현실을 나갔다.
“각하.”
알현실 앞에서 대기하던 비서관에게 대공은 이름 하나를 말했다.
“타릭 벡카드.”
반병신이 됐다는 팰러스를 돌보고 있는 인물.
더불어 그의 입김이 닿는 에스닐 귀족 가운데서는 그나마 가장 이용하기 좋은 장기말이다.
“그놈과 접촉할 방법을 찾아봐라.”
칼 오프러스 대공.
그가 오늘날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포기를 모르는 근성 덕분이다.
그의 근성은 1안이 실패할 경우-
‘2안을 세우고 그 즉시 실행하라.’
-라고 명했으니.
대공의 지시에 비서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바바를 내보낸 후.
나와 단둘이 남은 우만이 입을 열었다.
“다른 놈들이 그런 말을 하면 허세라고 여기겠지만, 왠지 네가 말하니 믿음이 가는군.”
“그걸 이제 알았단 말야?”
내 대꾸에 우만이 눈알을 굴렸지만.
“출석은 잘 하고 있나?”
“출석?”
뜬금없는 질문에 그의 말을 되풀이하자.
“아니, 나야 아카데미를 졸업했지만.”
우만이 창문 밖에서 훈련 중인 가신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너나 롯은 아직 재학 중이잖나. 출석일수가 많이 부족하면 졸업이 안 될 수도 있는데.”
그 말이 맞긴 하다.
봄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출석한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그나마 카렌과 리암은 알아서 잘 챙기는 것 같긴 하지만.’
나를 따라 아예 공작저에서 지내고 있는 롯과 디터는 아무래도 수업을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급생들의 출석상황을 손수 챙겨주다니, 역시 모범생답네.”
우만의 얼굴이 썩으려는 순간 바로 선수를 쳤다.
“학장이랑 다 얘기가 됐으니 걱정할 것 없다.”
“리히터 슐츠 학장님을 말하는 건가?”
학장을 무슨 동네 개처럼 말하는 내 말투에 우만은 헛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믿음직스럽네.”
“그럼 그럼.”
슐츠 학장은 이제 완벽한 내 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예전에도 꽤 협조적으로 나왔지만, 레핀 가문의 적자로 인정받은 후에는 아예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으니까.
‘내가 언제나 세자르 공을 지지하는 것, 잘 알아줬으면 좋겠네.’
‘출석일수? 그런 건 신경쓰지 말게! 자고로 진정한 배움이란 상아탑이 아니라 생생한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
‘자네의 가신들? 오, 그렇단 말이지··· 그것도 내게 맡겨두게.’
그래.
역시 세상은 돈과 권력이지.
얼마 전 나눈 학장과의 대화로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터였다.
시간 나는 대로 가신들을 데리고 아카데미에 한 번 가야겠다.
그럼 이제는.
“본격적으로 작전 구상을 해볼까?”
* * *
내 부름에 그날 저녁, 모든 가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리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가야르 요새라면 쉽지 않을 텐데. 지난 몇십 년에 걸쳐 단 한 번도 공략된 적이 없는 곳이거든.”
최근 군사학부에서 열심히 수업을 들었던 디터 또한 그에 동의했다.
“제가 알기로 그곳이 대표적인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맞나요?”
“그래, 맞아.”
나는 디터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디터, 어떤 점에서 가야르 요새가 난공불락이라고 불리는지도 설명해줄 수 있나?”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을 활용하게 됐다는 생각 때문인지 디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요. 일단은 오각형으로 설계됐고, 그 모서리마다 포루가 설치돼 있으며···.”
그 외에도 참호, 해자, 둔덕 등 다양한 요소가 이어졌지만 결론은 이거였다.
“한마디로 하자면,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구조물이라는 겁니다.”
리암이 거들었다.
“그뿐이 아냐. 이 정도 요새를 공략할 만큼의 대부대를 데려가면 아무리 조심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고, 벡카드 가문이 자기네 영지에 허가없이 군대를 끌고 왔다는 것을 빌미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한마디로 상황이 몹시 복잡해질 수 있다는 얘기.
물론 내가 다 고려해봤던 사항이기도 하다.
“디터, 리암. 너희 말이 모두 맞다.”
“그럼 어떻게···.”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해결할까 해.”
나는 이 자리에 있는 가신들을 돌아보았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리암과 앨빈, 디터.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우만과 발닉.
무한한 신뢰를 담아 나를 바라보는 롯과 3형제.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인지 어색해 보이는 카렌과 바바, 그리고···.
[앙, 옹옹, 부르릉.]
“···아이다페올트 왕자님이 말씀하시길 요새에 들어가기 어려우면 순간 이동을 하면 되지 않냐고 하시네요, 하하.”
그저 천진난만한 농농이까지.
‘어쩐지 감개무량한걸.’
처음만 해도 홀홀단신으로 하루 하루 살아남기에 급급했는데.
지금은 어느덧 뛰어난 능력자들을 이렇게나 내 사람으로 만들어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니.
가슴이 기분 좋게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가야르 요새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 알고 있나?”
“비밀··· 통로라고?”
난생 처음 들어본다는 듯 반응하는 리암.
“이건 가야르 요새의 비밀도면이다.”
나는 눈앞의 탁자에 준비해온 도면을 펼쳤다.
그중 한 곳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가야르 요새에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만들어둔 지하통로가 있어. 본성 제일 안쪽, 요새의 주인들이 지내는 공간으로 이어지는 통로이지.”
원래는 화재 등의 사태가 발생할 때,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외부로 탈출하기 위해 만들어둔 통로이지만.
“우리는 이걸 역으로 이용한다.”
안에서 밖으로가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최소한의 병력이 지하통로로 들어가면, 그들이 정문 근처의 병사들을 제압해 안에서 문을 열고 도개교를 내려주는 거다.”
“···!”
“그다음에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레핀 가문의 사병대가 안으로 쇄도하는 거지.”
가신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저들도 알고 있는 거다.
‘이것이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작전이라는 것을.’
그러고 보니 이제야 기억난다.
팰러스가 트리니다드 수도회의 과격단원들과 협상을 통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 사태를 해결한 화에서.
역4가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남겼다.
‘1330년 노팅엄성 비밀작전을 재현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네요.’
노팅엄성의 비밀작전.
지하통로로 노팅엄성에 잠입한 병사들이 에드워드 3세의 섭정이었던 이사벨라 왕비를 납치하고, 그녀의 정부를 처형한 사건.
···고작 스무 명의 병력으로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꼽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단 열 명이서 에스닐의 역사를 바꿔보지 않겠나?”
그 말에 가신들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