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98화 (98/176)

공략법은 있다

* * *

‘마지막 순간에 팰러스를 배신해달라.’

우만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하게 해내 보였다.

그야말로 하나의 반전극에 가까웠으니.

‘너희가 감히 날 심판하려 들어?’

이성을 잃고 본 모습을 드러낸 팰러스의 모습은 놀라웠지만 말이다.

그다음은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4대 원소를 다루는 자’ 타릭의 화염, 팰러스의 호위들이 터뜨린 연막탄 때문에 재판정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덕에 타릭 일행은 팰러스를 빼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크윽!’

‘팰러스 님!’

상황을 보아 하니 경비병이 쏜 총에 팰러스가 맞은 것 같았다.

이곳을 나선 뒤에는 미리 대기시킨 마차를 타고 입구를 유유히 빠져나가 도망쳤다.

‘정문 초소를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미리 뇌물을 먹여놨다고 하던가.’

저쪽도 나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재판에 임한 모양이다.

“···세자르 넌 아쉽지도 않나?”

“응?”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리암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금광 사업건을 관리하고 오느라 이번 일에 뒤늦게 합류한 리암은 혀를 차며 말했다.

“다 잡은 걸 코앞에서 놓친 셈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나라면···.”

“어디 세자르 님이라고 아쉽지 않으시겠습니까, 리암 경.”

나훔의 대꾸에 나답도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숙적의 모가지를 따버리고 싶으시겠으나, 우리 가신들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시는 것뿐-”

“그런 거 아닌데?”

내가 픽 웃으며 끼어들었다.

“···네?”

“하나도 아쉽지 않으니까, 다들 그런 말은 그만하란 얘기다.”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는 카렌.

눈알을 굴리는 리암.

두 눈을 껌벅이는 디터 등.

가신들은 제각기 다양한 반응을 보였지만.

‘진심인데?’

아쉽기는커녕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놈은 마지막 패를 제 손으로 버린 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팰러스가 마지막 순간까지 침착을 잃지 않았다면.’

우만의 폭로에 차분하게 이성과 논리로 대응했더라면.

혐의를 마지막까지 부인하며 시간을 벌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재판관들이 판결을 다음 재판으로 미뤘을 테고, 그 사이 빠져나갈 방안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더구나 지금 수도 사교계의 여론은 팰러스에 호의적이지.’

특권을 오래 누린 자들일수록 굴러온 돌을 경계하는 법. 특히 그 돌이 박힌 돌을 빼내기까지 했다면?

‘자신들 또한 그런 신세가 될것이 두려워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겠지.’

팰러스가 조금만 약을 팔아도.

바깥에 있는 리아나 부인과 놈의 수하들이 조금만 여론을 호도해도.

지금으로선 명백해 보이는 놈의 유죄가 하루 아침에 뒤집힐 수도 있었다.

‘애초 이곳의 법치란 그 정도 수준에 불과하니.’

그러나.

팰러스의 냉철함이 흔들린 순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원인은 뻔하지.’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우만의 배신.

원작의 팰러스가 처음으로 이성을 잃어버렸던 순간 또한, 우만이 자신을 배신했을 때였다.

‘네가, 네가 감히 나를 죽이려 들어?’

가장 믿었던 수하의 배신에 팰러스는 광분해 제 가신들을 모조리 죽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피에 미친 폭군’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진심이십니까?”

디터의 조심스러운 말에 나는 픽 웃어 보였다.

“덕분에 팰러스 레핀 수배령이 떨어졌지 않나.”

그 말에 가신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원래 죄목은 ‘로건 드 레핀에 대한 살인교사’라는 것 하나였지만.

이제는 살인교사죄에 법정모독죄, 습격죄까지 더해졌다.

그뿐이 아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나를 심판해?’, 충격적인 팰러스의 민낯』

『팰러스 레핀의 진면모를 낱낱이 분석하다』

『레핀 가문에서 십 년 일한 사용인의 충격 폭로! ‘팰러스 공자님은 사실···’』

그날 법정에서 팰러스가 보인 태도로 여론이 완전히 그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

···이로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팰러스가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 수배 당하는 범죄자 신세가 됐다는 것.

‘팰러스가 총까지 맞았으니 지금쯤 그쪽은 피가 말리겠지.’

나는 가신들을 차례 차례 돌아보며 말했다.

“덕분에 우리에겐 명분도 생겼잖아? ···팰러스를 언제 어디서든 즉결처분해도 되는 명분 말이다.”

그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놈의 목줄을 천천히 죄는 것뿐.”

나는 책상 위에 얹은 두 손을 맞잡았다.

···이 세계로 떨어진 지도 어느덧 2년에 가까워지는 시점.

‘드디어.’

팰러스와 세자르의 상황이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 * *

전국에 팰러스 레핀이 수배령이 내린 지 일주일째.

경비대나 수비대는 여태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꽁꽁 숨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철저하게 숨을 줄은 예상 못 했다. 나의 가신들 또한 백방으로 흩어져 팰러스의 행적을 수소문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결국 기댈 것은 하나뿐인가.”

“뭐 뾰족한 수라도 있나?”

우만의 물음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지?”

“아니, 그냥.”

내 대답에 우만은 돌 씹은 얼굴을 했다.

매번 저렇게 반응하긴 하지만, 은근히 성실하단 말이지.

지난 주, 재판정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가신들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말했다.

‘너희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우만이 쭈뼛거리며 나서자, 가신들의 눈이 커졌다.

‘···!’

‘우만의 얼굴은 다들 알고 있겠지. 덧붙이자면, 이번 작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나는 우만이 그간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낱낱이 얘기했다.

‘우만이 팰러스의 곁에서 첩보 활동을 하며 넘겨준 정보가 아니었더라면.’

민망해하는 건지 불편해하는 건지.

우만의 얼굴을 슥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공작 각하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을지도 모른다.’

처음만 해도 당황하던 가신들의 표정이 차츰 바뀌었다.

‘그러니 너희가 보는 앞에서, 우만을 정식으로 내 가신으로 맞이하려 한다.’

우만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 우만, 세자르 님을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담백한 서임식을 마쳤고.

이제는 제법 그럴싸한 군신 관계가 되나 싶었지만···.

“팰러스한테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내 질문에 우만이 미간을 좁혔다.

“···존댓말 쓰지 말라고 한 건 본인 아닌가?”

“아니, 딱히 존댓말의 문제가 아니라서.”

‘다른 가신들한테는 예의 바르면서 나만 보면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처럼 군단 말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상관없어. 아, 이제 다 온 것 같네.”

“오다니, 누가?”

“아까 뾰족한 수가 있냐고 물었잖아. 그 뾰족한 수가 제 발로 찾아온 것 같거든.”

“그게 무슨 말···.”

우만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바바였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휘황찬란한 비단을 걸친 데다 머리에는 터번까지 쓰고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대륙 출신의 부호라고 해도 믿겠다.

“너 요즘 좀 잘나가나 보다?”

내 말에 바바가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와 앉았다.

“헤헤, 가끔 부업도 뛰니 말입니다요.”

이 욕심 많은 사내는 내 아래서 받는 월급도 성에 차지 않는지, 시간날 때마다 ‘거리의 점술사’로 한 탕씩 뛰며 돈을 쓸어담고 있는 모양이다.

바바는 눈치를 보며 팔에 찬 ‘제어의 팔찌’를 흔들어 보였다.

“요거 요거, 제가 잘 차고 다니는 거 아시죠? 제 충성심은 저 깊고 넓은 바다와 같아서-”

“시끄럽고.”

나는 탁자를 턱짓했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그럼요.”

탁자에 앉은 바바가 커다란 백지를 쫙 펼쳤다.

“뭐든 질문하시지요, 주인님.”

“···.”

우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고.

“바바는 미래를 점치는 이능의 소유자다.”

“···!”

“바바, 네게 질문하겠다.”

나는 바바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팰러스 레핀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나?”

에스닐 최고 화제의 인물인 ‘팰러스 레핀’의 이름이 나오자.

바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대답을 구해보지요.”

그다음엔 전에 본 광경 그대로였다.

고개를 숙인 바바가 기도하듯 양손을 맞잡자 그의 몸 주변에서 강력한 힘이 몰아쳤고.

“하···.”

그와 동시에 백지 위에 그림이 나타나자 우만이 놀람의 탄성을 내뱉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림을 눈에 담았다.

‘이건 무슨 의미이지.’

화폭이 x축과 y축으로 이뤄진 그래프처럼 네 칸으로 나뉘어졌고.

각 칸에 단순한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단어가 적혀 있었다.

‘Est(동)’

‘성채 그림’

‘시냇물 그림’

‘Ble(밀)’

이게 무슨 의미일까.

잠시 고민하는데 우만이 대뜸 입을 열었다.

“가야르 요새?”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지.

‘원작에서는 트리니다드 수도사들이 틀어박혀 항쟁하는 곳인데.’

우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걸 보니까 갑자기 가야르 요새가 떠올라서. 먼저 이건 동쪽이란 의미잖아?”

그의 손이 그림의 칸을 하나씩 짚는다.

처음에는 ‘동쪽’이라는 단어를, 그다음에는 ‘밀’이라는 단어를.

“동부의 곡창지대라 하면···.”

그다음은 시냇물 그림을 짚는다.

“로안 강 지대가 유명한데, 여기는 벡카드 가문 사유지야. 옛날에는 이 강을 ‘becka(시냇물)’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벡카드 가문의 이름이 생겨났지.”

벡카드 가문!

우만은 마지막으로 성채를 짚어 보였다.

“그리고 벡카드 가문이 소유한 이 ‘성채’, 아니 요새가 바로···.”

그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가야르 요새거든.”

우만의 추리는 어느 한 군데 틀림이 없었다.

즉, 팰러스 레핀은 지금 이 요새에 숨어 있다는 얘기다.

나는 살짝 멍해졌다.

‘원작의 줄거리가 이런 식으로 바뀌다니.’

···내가 아는 원작과 너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불안감을 느낀 순간.

우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팰러스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얘기인가?”

“이 바바의 이능은 틀리는 법이 없지요.”

자신만만한 어조로 대꾸하는 바바.

그의 이능을 지금까지 쓰지 않은 것엔 이유가 있었다.

‘미래를 점치는 이능’에는 두 가지 제약이 있는데.

‘첫째, 일주일에 한 번만 쓸 수 있습니다.’

‘뭐? 근데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 줄을 섰지?’

‘흐흐, 일단 입소문이 나서 그렇기도 하고 제가 워낙 입을 잘 털지 않습니까요.’

‘···나한테는 진짜 그림 보여준 것 맞지?’

‘그럼요! 제가 돈을 밝히는 것처럼 보여도 돈보다는 목숨이 더 중한 걸 아는 놈이지요!’

‘두 번째 제약은 뭔데.’

‘같은 질문을 또 던지실 수는 없습니다.’

즉, 팰러스 레핀의 행방을 묻는 질문은 단 한 번만 던질 수 있으며.

해답을 구한 그 당시에 팰러스를 잡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

···이제야 바바에게 질문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제는 팰러스가 은신처에 자리잡았을 시점이니까.’

이동 중의 범인을 쫓는 것보다는 어딘가에 틀어박힌 범인을 그곳에서 끌어내는 편이 더 쉬운 법이다.

“하필이면 가야르 요새라니, 이건 너무 어려운걸.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곳이잖아.”

우만의 말처럼, 그 은신처를 난공불락이라고 여긴다면 더더욱.

‘하지만 어떻게 팰러스가 이곳에 숨어들게 된 걸까.’

원작에서는 수도사들이 자리잡았던 곳이 어떻게 팰러스의 은신처로 둔갑하게 된-

그런 의문이 떠오르던 순간, 우만이 의외의 말을 했다.

“하긴 그리 놀라울 것도 없긴 하군. 가야르 요새는 벡카드 가문 소유잖아.”

“놀라울 게 없다니, 뭐가?”

“몰랐나? 타릭이 벡카드 가문의 막내아들이잖아. 벡카드 가문은 헬리오스 가문과 결혼으로 맺어진 사이고.”

“타릭이··· 벡카드 가문이라고?”

여태 몰랐던 사실이다.

타릭의 성은 원작에서도 여기서도 공개된 적이 없었으니까.

그 말에 우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타릭 본인이 벡카드 가문 소속이라는 걸 숨기려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 벡카드 가문과 헬리오스 가문은 정략혼을 맺은 사이이기도 해.”

브렉의 어머니가 타릭의 이모라고 덧붙였다. 즉 브렉과 타릭은 이종사촌 사이라는 것.

우만의 설명을 듣자 일종의 깨달음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렇구나!’

이미 원작과 달라도 너무 달라진 흐름.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대략의 줄기가 보였다.

그 덕분일까.

불안감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기대감이 대신한다.

우만이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냐. 가야르 요새는 과거 유스톤 3세마저도 공략을 포기할 정도로 견고한 곳이라고. 거길 먼저 공격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을 텐데.”

그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공략법은 존재해.”

어떻게 이렇게 확신하냐면.

우만의 서임식을 마친 직후, 도전과제를 달성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고.

[도전과제 ‘박힌 돌 빼내기’ 달성! - 팰러스를 레핀 가문의 호적에서 파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도전과제 ‘범인은 너다’ 달성! - 팰러스의 살인교사 혐의를 입증했습니다.]

[도전과제 ‘적의 적은 나의 우군’ 달성! - 우만을 가신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수과제 일타삼피를 달성한 덕분에.

···‘요새 비밀지도’라는 보상을 받았거든.

“그것도 최소한의 병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우만의 눈에 기대감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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