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
* * *
재판정에 자리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용병대장이 들어섰다.
‘진실의 물’을 마신 탓인지 눈이 살짝 풀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멀쩡했다.
‘카렌이 잘 먹여놓은 모양이군.’
나는 그에게 쏠린 좌중의 시선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호적 파기가 인정되는 경우는 약 세 가지입니다. 친자가 아님을 확실히 할 수 있거나, 아내의 부정을 증명할 수 있거나,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팰러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식이 재산 혹은 작위 상속을 목적으로 부모의 목숨을 노린 경우.”
이곳에 입장할 때만 해도 여유롭던 놈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저의 형, 팰러스는 세 가지 모두에 해당합니다만 앞의 두 가지는 증명하기 어렵다면.”
나는 증인석에 앉은 용병대장을 가리켰다.
“세 번째 사실은 저자의 증언이 뒷받침해줄 겁니다.”
재판정의 긴장감이 한층 고조되었다.
서기관의 지시에 따라 용병대장이 한 손을 들어올렸다.
“알레스신이 보시는 아래, 오로지 진실만을 말할 것을 약속합니다.”
용병대장은 서기관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해나갔다.
“세자르 공자님의 말은 진실입니다.”
팰러스의 심부름꾼이 자신들에게 접촉하여 정식 의뢰를 했다는 의뢰서까지 들고 나왔다.
“레핀 공작이 왕궁회의에 참석하러 나올 때를 노려, 레핀 가문의 마차를 기습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로건 드 레핀의 목숨을 완벽하게 끊어달라고 말입니다.”
그의 폭로에 돌연 방청석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매수한 거다!”
“옳소!”
“너희가 팰러스 님을 모함하려 매수한 게 아닌 줄 어떻게 아나!”
“증거를! 제대로 된 증거를 내놔라!”
보아하니 팰러스 측도 아무 준비 없이 재판에 임한 것 같지는 않다.
저쪽이 준비해논 바람잡이들의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숙! 정숙하시오!”
재판관이 나무 망치를 두드려 좌중을 진정시켰다.
“그것이 사주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 본 재판정의 일.”
재판관이 눈짓을 보내자 앞쪽의 문이 열렸고. 그 너머에서 신관의 옷차림을 한 사내가 나왔다.
그의 등장에 방청석이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건 혹시···.”
“말로만 듣던 ‘진실의 판별자’?”
그래. 내가 기다렸던 것이 바로 이 순간.
총관 카얀이 귀띔해준 바에 따르면, 호적 파기의 소처럼 진실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사건의 경우.
‘양측의 증언이 진실인지를 판단하는 전문 이능자를 투입한다고 합니다.’
법정에서 준비시킨 ‘진실의 판별자’가 용병대장 앞에 와 질문을 던졌다.
“용병대장 막스 크뢰거, 그대가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오?”
모두의 이목이 그쪽에 쏠린 가운데.
용병대장의 눈이 한 차례 멍해졌다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방금 ‘이능의 힘’이 사용되었음이 분명했다.
“진실입니다.”
방청석에서 숨 죽인 신음이 터져 나왔고.
“이자의 말이 진실임을, 알레스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진실의 판별자’는 그렇게 보고하고는 퇴장했다.
그 여파로 실내가 또다시 시끌시끌해지려는 순간.
“정숙하시오!”
망치를 내리친 재판관이 말을 이었다.
“5분간 휴식 후 피고측의 입장을 듣겠소!”
슥 옆을 돌아보자, 팰러스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내 계획이 무엇이냐면.
‘호적 파기 재판이라는 미끼에 걸려든 팰러스 모자가 현장에 출두하면.’
이 단순한 소를 ‘살인 교사’라는 큰 사건으로 발전시켜 이들을 공공연한 범죄자로 만드는 것!
···이 나라에서 고위 귀족의 살인 교사죄는 참수형, 못해도 영구추방에 이르는 중죄이니 말이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리아나 부인이 이 자리에 없다는 건데.’
팰러스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팰러스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야말로 낭패로군.’
자신이 안일해도 지나치게 안일했다.
잠시 이곳에서 도망칠까도 생각해봤지만, 사방에 수도 경비대가 깔려 있는 데다.
‘이 상태에서 도망친다면 난 범죄자요, 라고 써붙이는 거나 마찬가지지.’
최악의 상황임은 분명하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잘 찾아보면 분명 벗어날 길은 있을 터.
‘세뇌 능력을 쓴다면···?’
재판관들에게만 써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의 이능은 ‘친밀도’를 전제로 하는 만큼 초면인 사이에는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팰러스는 우만을 데리고 복도로 나갔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작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우만.”
“네, 팰러스 님.”
우만은 언제나처럼 올곧은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을 본 순간 팰러스는 확신했다.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우만의 어깨를 붙잡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날 위해 희생하거라.”
“···!”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겠지.”
우만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기말이다.
다른 이능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파괴적인 이능을 가졌을 뿐더러, 머리도 좋고 검술도 뛰어나며.
‘무엇보다 날 위해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는 충성심의 소유자가 아닌가.’
팰러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용병대장에게 의뢰를 한 건 어디까지나 네가 독단으로 저지른 짓이다.”
“···.”
“나를 위한 과잉 충성 때문에 순간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한 거라고, 그렇게 말하거라.”
“팰러스 님···.”
우만은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팰러스는 확신이 있었다.
“대답해라, 우만.”
···자신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우만은 무엇이든 제 명령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 대신 감옥에 들어갈 수 있나?”
질문과 동시에 ‘세뇌의 힘’을 개방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행사한 힘이, 가련한 우만을 향해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저는···.”
우만의 눈이 멍해지는 것이 보였다.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팰러스 님.”
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수하란 말인가.
팰러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실내로 돌아가자 재판관이 재판을 재개했다.
“피고 팰러스 레핀은 앞으로 나오시오!”
대안을 마련했다는 생각이 팰러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팰러스는 흔들림 없는 선량한 얼굴로 심문에 임했다.
“피고는···.”
서기관이 날카로운 질문을 연달아 던졌지만, 팰러스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몰랐던 사실입니다.”
“저는 아무 지시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서자를 적자로 인정한 것이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자식된 자로서 어찌 아비의 뜻에 불응하겠습니까.”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담담하고 진실했는지, 방청석의 사람들뿐 아니라 재판관들마저 혼란스러울 정도였으며.
“비록 반뿐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동생이 아닙니까. 세자르를 품는 것은 형인 제가 응당 해야 할 도리.”
···원고석에 앉은 세자르를 ‘반쪽짜리’라고 표현하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 흉악한 자가 아버지의 목숨을 노렸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제게 잘못이 있다면,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팰러스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하여 자식된 자로서 아버지의 위험을 모르고 지나쳤다는 것뿐입니다.”
감동적인 대사와 함께 ‘세뇌의 이능’을 조심스레 개방했다.
밀도는 낮추되 적용 범위를 최대한으로 설정한 힘이 재판정 안에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그 덕분일까.
“역시, 팰러스 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지.”
“뭔가 오해가 있을···.”
방청석에서 그런 말들이 흘러나왔고.
몇몇 여인네들은 팰러스의 말에 감동받아 코를 훌쩍일 정도였다.
팰러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게 피고 심문이 끝나자 재판관이 질문했다.
“피고는 증인 소환을 요청하겠는가?”
미리 입을 맞춰놓은 대로, 팰러스는 우만을 내세웠고.
증인석에 앉은 우만은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했다.
무엇을 증언하러 나왔냐는 서기관의 말에, 그는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팰러스 레핀 님을 오랫동안 모셔온 가신이자 오랜 친우입니다. ···여러분 앞에 제 양심을 걸고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팰러스는 밑밥을 풀어나가는 우만을 보며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고백할 것이라니, 그것이 무엇이오?”
서기관의 질문에 우만이 돌연 팰러스에게 결연한 눈빛을 보냈다.
···뭔가 싸한 느낌에 팰러스가 퍼뜩 고개를 든 순간.
“제 주군인 팰러스 레핀의 본모습을 폭로하려 합니다.”
“···!”
그 말에 좌중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팰러스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 우만의 말이 이어졌다.
“방금 전, 팰러스 님은 저를 인적이 드문 복도로 데려가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이번 일은 네가 독단으로 저지른 것으로 하라고.”
그 순간.
재판정은 폭탄을 던져놓은 듯 시끌시끌해졌고.
“우만!”
팰러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으나, 우만의 폭로는 멈추지 않았다.
“네가 날 위해 희생하거라. 나를 위한 과잉 충성 때문에 오판한 거라고, 그리 말하거라!”
“거짓말! 거짓말이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팰러스 님은 평소 저희 가신들을 장기말이나 다를 바 없이···.”
팰러스는 두 귀를 막았다.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우만이, 우만이 저럴 리가 없다.’
어째서···?
가신 중에서 가장 충성스러웠던 우만이 어째서···.
그의 두뇌는 해답을 내놓는 대신 과부하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팰러스는 현실을 부정했다.
온 사방에서 그를 향한 비난이 쇄도하고, 흥분한 방청객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데도.
‘이건 현실이 아니야.’
팰러스는 두 귀를 막았다.
그러다 문득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분개하는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는 우만과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 네가 나에게···.’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모든 걸 기억해낸 건가?
“우만, 너 설마!”
팰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 우만의 마지막 폭로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얗게 질린 팰러스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자는 제 여동생을 죽였습니다!”
“!”
누군가의 비명, 신음, 고함, 그들을 진정시키는 나무 망치소리까지.
온갖 잡음이 가득한 가운데 팰러스가 외쳤다.
“이건 거짓말이야! 새빨간 거짓말이자 비난이라고! 우만, 네가, 네가 어떻게 나를···!”
피고석을 박차고 나와 우만에게 달려드는 팰러스의 앞을, 경비병들이 막아섰다.
“네가 어떻게 날 배신하냐고 물었나? 그러는 너는···.”
그 너머에서 우만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나!”
팰러스의 눈이 커졌다.
확인 사살이나 다를 바 없는 말에, 그의 이성을 지탱하던 마지막 실이 끊어졌고.
“너희가··· 너희가 감히 날 심판하려 들어?”
“팰러스 님!”
방청석에 앉아 있던 타릭의 목소리가 좌중을 뚫고 나왔지만, 팰러스에겐 들리지 않았다.
“너희 버러지 같은 놈들이 나를 단죄하겠다고? 웃기지 마, 선고를 내리는 것은 네놈들이 아닌 내 역할이다!”
팰러스의 본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
방청석에서 경악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타릭.”
“패, 팰러스 님?”
팰러스가 악귀 같은 얼굴로 타릭을 돌아보았다. 그 눈에 담긴 광기에 타릭이 흠칫한 순간.
“‘그 힘’을 쓰거라.”
“···!”
타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황을 파악한 재판관이 경비병들에게 명령했다.
“팰러스 레핀의 신병을 확보하라!”
“옙!”
우렁차게 대답하며 경비병들이 다가가려던 순간.
그때껏 눈치만 보고 있던 타릭이 이능을 개방했다.
그의 두 손에서 화염구가 터져 나왔다.
콰과과광!
펑!
“으악!”
“포, 폭발이다!”
방청석에 있던 팰러스의 호위 또한 연막탄을 터뜨렸고.
자욱한 연기로 시야가 온통 가려진 가운데 재판관들이 소리쳤다.
“뭐 하나! 피고를 잡아라!”
“도망치게 놔둬서는 안 된다!”
당황한 방청객들의 비명.
코끝을 자극하는 매캐한 연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범인을 쫓는 경비병들 가운데서-
탕!
총성이 울렸다.
“크윽!”
“팰러스 님!”
그 짧은 비명을 끝으로 팰러스의 가신들은 주군을 업고 도망쳤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나 다름없는 풍경이었지만.
“···놈이 드디어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군.”
세자르 레핀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