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96화 (96/176)

세자르의 진짜 목적

그 후는 속전속결이었다.

카렌은 용병대장의 입에서 핵심적 증언을 끄집어냈으며.

그 외에 ‘팰러스 모자가 레핀 공작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물증이 될 만한 문건 또한 확보했다.

‘모든 게 착착 맞아 떨어지는군.’

또한.

총관 카얀은 내가 요청했던 ‘호적 파기의 소’에 관한 조사를 마친 터였다.

“고맙다, 카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가 건넨 서류를 슬쩍 살펴보자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귀족가의 자제를 호적에서 파낸 사례가 있다는 거로군!’

총관은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듯, 짧은 시간 내에 상당한 정보를 조사해왔다.

더불어 그 사건들이 어떠한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상세하게 말이다.

공작의 결심만 확고하다면,

팰러스의 왕위 계승권을 아예 박탈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훌륭하군. 이러한 판례가 실제로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는데.”

내 말에 총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적 파기의 소라는 게 우리 왕국법상 존재하긴 하더군요. 다만 워낙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데다 실제 판례로 이어진 경우 또한 극히 드물 뿐.”

“호오.”

“그 과정이 복잡하기는 합니다. 일단 호적 파기의 소를 제기하려면 그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데···.”

정당성 입증.

말은 뭔가 있어 보이지만 결국은 요거다.

‘호적에서 파낼 정도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

총관은 호적 파기가 인정되는 몇 가지 경우를 나열했다.

-시기상, 혹은 신체상의 이유로 친자가 아님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경우.

-아내의 부정을 증명할 수 있는 경우.

-자식이 재산 혹은 작위 상속 등을 목적으로 부모의 목숨을 노린 경우.

“이 같은 기소 단계에서 재판관들의 만장일치를 받아내면, 다음 단계는 당사자들의 변을 듣는 겁니다. 양측이 출두한 자리에서 각자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이후 재판관들이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그렇군. 이 정도면 충분하다, 카얀.”

내 말에 총관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하지.”

예상했던 대로, 공작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레핀 공작은 온기 없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으니까.

“그래. 썩은 줄은 단칼에 잘라내야 하는 법이지.”

다시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우만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첩자 노릇을 해줬으면 좋겠군.』

그리고 마지막 순간,

‘원작에서 네가 그랬던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배신해달라고 덧붙였다.

이제는.

그들 모자를 본격적으로 나락에 빠뜨릴 차례였다.

* * *

바로 그 시각,

팰러스 일행이 머무는 어느 귀족가.

리아나 부인이 보낸 편지를 읽는 팰러스의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 뻔히 알겠군.’

세자르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우만은 팰러스가 어떤 지시를 내릴지 짐작이 갔다.

원래 자신은 오늘 팰러스의 명령에 따라 공작저로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예정이 바뀌겠군.’

그런 결론을 내린 순간, 팰러스가 탁 소리 나게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타릭이 물었다.

“뭐라 적혀 있습니까?”

“바야르가 실패했다.”

“그것 보십시오.”

타릭은 딱히 놀랍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이빨 빠진 늙은 개 따위가 나서 봤자 실패할 게 뻔한-”

“놈의 머리를 잘라서 보냈다는군.”

“···!”

우만은 그 말에 흠칫 놀랐지만.

타릭은 낄낄대기 바빴다.

“크크, 생각 외로 세자르 놈도 유머 감각이 있는-”

“타릭.”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에 타릭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팰러스는 미간을 잔뜩 구기며 또 다른 서신을 휙 내던졌다.

“그것보다 이쪽이 더 문제일지도.”

우만과 타릭은 동시에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편지 맨 윗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호적 파기의 소]

···레핀 가문의 적장자, 팰러스 레핀이 레핀 공작 로건의 친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호적 파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 아래에는 재판 일자와 시간이 명시돼 있었으니.

“아무래도 조만간 수도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팰러스는 분노를 간신히 삭이며 타릭을 슥 돌아보았다.

“물론 너와 우만도 같이.”

“팰러스 님, 이럴 때엔 공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돌아간다고?”

“으··· 설명할 순 없지만 뭔가 예감이 안 좋은데.”

타릭의 말에 팰러스는 미간을 좁혔다.

“예감만으론 충분치 않다. 봐라, 우만. 네가 보기에 우리 쪽에 승산이 얼마나 있지?”

우만은 팰러스가 건넨 서신을 정독했다.

셋 중 왕국법에 가장 정통한 그가 입술을 뗐다.

“저쪽이 이길 가능성은 낮습니다. 이런 식으로 친자 관계를 문제 삼으려면 진작 삼았어야 하거든요.”

그 말은 진짜였다.

우만은 어째서 세자르가 이런 빈약한 근거를 들었는지 궁금할 정도였으니까.

“팰러스 님은 이미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나셨으니까요. 재판관들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우만은 팰러스를 공국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줄 든든한 뒷배와, 강력한 이능자들이 있으니까.

‘이들의 합류 이전에 팰러스를 무대 한가운데로 끌어내야 한다.’

그 점을 의식하며 말을 이었다.

“팰러스 님께서 이 자리를 일부러 피한다면,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재판관들이 저쪽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팰러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던 그는 ‘그러니 재판에는 가급적 출두하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타릭이 반발했다.

“그렇더라도 너무 위험합니다! 혹시라도 놈들이 중간에 손을 쓰기라도 하면-”

“재판에 출두하러 오는 상대를 암살하려 한단 말인가?”

우만의 반박에 타릭이 입을 다물었다. 그 둘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팰러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다, 우만. 그리고 현장에서 혹시라도 만일의 경우가 발생할 경우···.”

‘만일의 경우’라는 표현에는 많은 것이 내재돼 있었다.

예컨대 팰러스가 예기치 않은 습격 따위에 노출된다든가.

팰러스의 차가운 눈동자가 우만의 낯을 훑었다.

“나를 위해 무어든 할 수 있겠지, 우만?”

우만은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무효화 목걸이는 유효했다.

다만 그로 인한 페널티를 피하는 방법을 나름 강구해봤는데, ‘네’라고 즉답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되···.

‘팰러스를 안심시키는 대답을 내놓으면 된다.’

예상대로, 팰러스는 그의 대답에 흡족하게 웃었다.

“타릭, 너 역시 마찬가지이겠지?”

타릭은 잠시 눈빛이 멍해지더니.

이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팰러스 님!”

팰러스가 타릭에게도 세뇌의 힘을 쓰는 것을 우만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런 광경을 제 눈으로 목격할 때마다, 한동안 들리지 않았던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오빠, 그 팰러스라는 공자님··· 뭔가 이상해.’

‘그 사람, 섬뜩하단 말이야. 자꾸만 우리한테 이상한 기운을···.’

필리아의 목소리가 지금도 선연했다.

여동생이 했었던 충고를 조금만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니, 그래 봤자 소용없었을 거야.’

당시의 자신들은 그저 힘없는 어린 남매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그에 반해 팰러스 모자는 강력한 권력을 지녔던 이들.

그러니 제 여동생의 죽음이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다면···.

‘지금은 다르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나머지 두 사람을 훑었다. 팰러스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타릭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등 뒤에 칼을 숨긴 채 네놈에게 미소를 지어주마.’

우만은 다시금 배신을 다짐했다.

* * *

우만에게 편지를 보내놓고 며칠째 답장을 기다리던 중.

도전과제가 변경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도전과제 목록을 재확인하세요.]

그 말대로 도전과제 목록을 불러내자, 몇 가지가 바뀌어 있었다.

-우만을 가신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나요?

-국왕이 내준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나요?

-강물에 빠져 죽을 뻔했나요?

일단 이 세 가지는 그대로였고.

(‘요새 아래의 비밀 통로를 발견했나요’가 없어진 것 같은데, 상황을 보니 이건 나중에 다시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팰러스를 레핀 가문의 호적에서 파내는 데 성공했나요?

이것과 더불어 한 가지가 더 생겼다.

···마치 내 속내를 읽은 듯한 도전과제였다.

‘밑그림만 그려놨던 머릿속 계획의 윤곽이 그려지는 기분인걸.’

총관에게는 레핀 공작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팰러스를 호적에서 파기하려는 듯 얘기했지만.

그 진짜 목적은-.

“따로 있으니까 말이지.”

나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변수가 있다면 단 한 가지뿐.

···팰러스가 현장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

이 부분은 우만이 알아서 잘해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별다른 사건이 없는 채로 몇 주가 흘렀고.

“지금부터 팰러스 레핀을 대상으로 한 ‘호적 파기의 소’를 다루는 재판을 시작하겠소!”

팰러스의 왕위 계승권을 영원히 박탈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 * *

팰러스는 이 모든 것이 우스운 장난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제 와 친자 확인이라니.’

로건 드 레핀.

이 가련한 사내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힘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터였다.

그가 지닌 ‘세뇌의 이능’에 특징이 있다면, 상대와의 친밀도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진다는 것.

덕분에 과거에는 저와 어머니를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본 재판정은 에스닐 공작, 레핀 가문의 11대손, 로건 드 레핀의 기소로···.”

팰러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름시름 앓아서 진작에 세상을 떠야 했을 공작이, 어쩌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남게 된 걸까.

‘세자르.’

그는 맞은편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청년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의 어머니가 경고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자신의 지나친 여유로움이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이번 일도 뻔했다. 분명 세자르가 레핀 공작의 뒤에서 모든 일을 조종했겠지.

『팰러스, 재판에도 나가지 말거라.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어머니는 한사코 만류했지만 팰러스는 출두를 고집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우만과 타릭 말고도 호위 몇 명을 더 데려왔으니 걱정할 것은 없다.

사실은 이번 재판이야말로···.

‘세자르에게는 역풍이 될지도 모르는 악수이니까.’

한때 수도 사교계의 총아라 불렸던 자신을 이제 와 ‘다른 남자의 핏줄’이라며 호적에서 파낸다고?

세상에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이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서자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레핀 공작이 노망이 나 진짜 자식을 내친다고 하겠지.’

실제로도 그랬다.

지금 사교계의 여론은 레핀 공작을 옹호하기보다는, 순식간에 끈 떨어지는 신세가 될 팰러스를 동정하는 분위기였으니까.

···이들 재판관들이 귀족계의 여론을 상당히 신경 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

“알레스 신이 보시는 아래, 오로지 진실만을 말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유로웠다.

언제나처럼 선량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연기하며, 잘 가다듬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는 재판관들의 눈동자에는 지울 수 없는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오히려 이번 건은 내게 새로운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에 심장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기소 내용을 읊는 서기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건 드 레핀은 장자 팰러스가 자신의 핏줄이 아님을 주장했으며, 그에 대한 증거로···.”

레핀 공작은 흑발인 반면, 장자 팰러스는 금발인 것을 내세웠다.

금발과 흑발 부모 사이에서는 팰러스처럼 밝은 금발이 나올 수 없다는 얘기에, 팰러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봤자 제대로 된 근거도 없는 이야기일 뿐.’

그의 생각처럼 재판관들의 반응 역시 시큰둥했다.

레핀 가문 측이 준비한 다음 자료는 리아나 부인이 여러 남자들과 불순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부인은 레핀 공작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저놈의 가능성, 가능성.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솔깃해하는 반응이었지만, 재판관들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가까운 주장이오.”

그러자 지금껏 가만히 경청하던 세자르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다른 남자의 아이일 가능성이 다분한’ 그 자식이, 작위 계승을 목적으로 아버지의 목숨을 해하려 했다면요?”

그 한마디에 재판정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팰러스는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증거는 전혀 없다.’

공작에게 보낸 암살자는 자신의 의뢰자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바야르 또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으며, 작전을 주도한 용병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 또한 배후를 모르는 채로 명령을 수행할 뿐.’

유일하게 자신들과 직접 연락한 자는 암흑용병단의 용병대장.

고문을 당해도 절대 의뢰자의 정체를 밝히지 않을 정도로 입이 무거운 자라고 들었다.

‘증거가 있어 봤자 물증이 아닌 심증뿐일 텐데.’

심장이 불안감으로 두방망이질 치는 순간.

재판정에 새로운 인물이 들어섰다.

“···로건 드 레핀을 암살하기 위해 팰러스 모자가 고용한 ‘암흑용병단’의 용병대장을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거짓말이야!”

팰러스가 벌떡 일어나 외쳤지만, 재판관에게 제지당했다.

“피고는 자리에 앉으시오.”

어쩔 수 없이 착석한 팰러스의 두 손이 벌벌 떨렸다.

‘이건 함정이다.’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호적 파기라는 것은 그저 미끼였을 뿐, 세자르의 진짜 목적은-

‘나를 살인 교사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하는 것!’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