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95화 (95/176)

공작의 결심

* * *

처음부터 함정을 파놓을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잊고 싶었던 일화를 끄집어내어 들려주던 공작의 표정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저들이 연달아 공격하는데 우리라고 손놓고 있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호구가 되는 건 사양이란 말이지.’

받은 것은 무어든 배로 되돌려준다. 거기에 양념을 좀 쳐서 제 꾀에 제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그거야말로 내 특기인데 말이다.

본격적으로 실행 계획을 세우게 된 첫 계기는,

우만의 편지였다.

『네가 말한 대로 팰러스에게 대답했다.

상황을 지켜본 뒤, 내가 직접 공작저에 잠입해 공작의 목숨을 노리겠다고.

하지만 조심해라, 세자르.

···팰러스가 얼마 전 공국 출신의 살수를 보냈다고 한다.』

편지를 읽는 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곳 오프러스의 살수들은 어릴 적부터 살기를 죽이는 훈련을 받는 만큼, 제아무리 뛰어난 전사라도 그들의 인기척을 느끼기 쉽지 않다고 하는군.

특히 목표물의 주변인물로 위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누구라도 믿지 말고 의심해야 한다.』

나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이 편지를 조금만 일찍 받았더라면, 살수를 생포해 제대로 된 증거를 찾아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의 우리에겐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전혀 없다.’

진짜 마리의 시체에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며.

마리로 위장했던 암살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팰러스와 오프러스 공국이 그들의 배후라고 주장할 만한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통탄할 일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이미 떠나간 기회로군.’

속으로 혀를 차며 편지를 읽어내려 가는데, 그중 어느 한 구절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공작이 왕궁회의에 참석하러 갈 때를 노릴 거라고?’

우만은 이렇게 적었다.

만약 앞서 보낸 살수가 실패할 경우, 팰러스는 곧바로 다음 작전에 들어갈 예정인데.

『아무리 공작이 두문불출하더라도, 왕궁회의만큼은 빠지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는 것 같더군.』

리아나 부인이 탈옥시킨 림 바야르와 ‘암흑 용병단’이 주축이 되어 공작가의 마차를 기습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

만약 이 정보를 몰랐다면.

그땐 정말 꼼짝없이 당했을지도 모른다.

등 뒤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정보를 역으로 이용한다면?’

바로 거기서부터 함정 설계가 시작되었다.

나는 곧바로 테오 2세를 알현해 이러저러한 상황을 털어놓았고.

소년 국왕은 흔쾌히 이 연극에 동참해주기로 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폐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그럼, 잊지 말아야지. 그대에게 빚을 만들어두려고 하는 건데.’

우만이 편지로 알려준 정보도 상당했지만, 카렌을 통해 암흑 용병대의 특징, 그들의 기습 방식 따위를 빠삭하게 알아보도록 했다.

레핀 가문의 문장이 커다랗게 박힌 화려한 마차를 준비시키는 것은 물론이었고.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바바 녀석에게 이능을 쓰게 해 최종 확인을 마쳤다.

“제일 중요한 건 이 작전을 이끌 이들인데.”

나는 디터와 나만, 나훔, 나답 3형제를 따로 불러냈다.

“너희에게 맡기고 싶은 일이 있다.”

작전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가신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3형제는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자신들의 가슴을 팡팡 치며 말했다.

“맡겨주십시오, 주군!”

“놈들의 심장을 뽑아버리겠습니다!”

“놈들의 머리를 창에 매달고 오겠습니다!”

아니, 전부터 느끼지만 너희 좀 과해···.

나는 상대적으로 덤덤한 디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디터. 이번 작전에서 어쩌면 네 역할이야말로 제일 중요하고도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공작의 대역, 즉 미끼와 선봉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니 말이다.

“3형제가 기마대를 끌고 용병대를 포위하기 전까지 혼자 버텨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아닙니다, 주군. 오히려 오랫동안 이런 순간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이런 순간이라니?”

디터는 들뜬 기색이었다.

“주군을 위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무훈을 세울 순간을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 가신이 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디터는 본인의 재능을 마땅히 펼쳐보일 기회가 없었던 터다.

“위험한 건 상관없습니다. ···지금껏 제가 주군에게 받은 것을 보답할 기회만을 기다렸으니까요.”

몹시 진지한 눈빛.

나는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부탁하겠다.”

그리고 지금 현재.

나는 창문 너머 검붉어진 하늘을 흘긋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면 작전이 어느 정도 진행됐을 텐데.’

레핀 가문의 마차가 출발한 지 10분쯤 되었으니 슬슬 두 세력이 격돌할 시점이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손바닥이 땀이 차는데.

눈앞에 갑작스레 메시지가 떴다.

[도전과제 ‘암살자를 잡아라’ 달성! - 레핀 공작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습니다.]

···드디어!

도전과제 달성 메시지가 떴다는 건, 디터들의 작전이 성공했다는 뜻이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다.

[보상 ‘진실의 물’을 수령했습니다.]

‘진실의 물?’

나는 눈앞의 탁자 위에 나타난 물건을 살펴보았다.

기껏해야 손가락 세 마디 길이의 자그마한 병 안에 무색무취의 액체가 들어 있다.

소지품 목록을 확인하자 이런 정보가 떴다.

『‘진실의 물’(잔여사용횟수 3회)

- 설명 : 무엇이든 진실을 말하게 하는 물. 잔인한 고문 없이 원하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얻어낼 수 있다.

- 비고 : 물을 먹인 이후 3시간 이내에만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니까 이건···.

“자백제잖아?”

이런 타이밍에 이런 아이템을 주다니.

이거야말로 내가 필요로 하는 ‘증거’를 수집하는 데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다.

참 시기적절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두 손바닥을 딱 하고 마주쳤다.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을 때의 쾌감.

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럼, 슬슬 불러볼까.’

나는 책상 서랍에서 작은 피리를 꺼냈다.

언젠가 나훔이 선물한 것으로, 새들에게만 들리는 소리가 나는 물건이다.

삑-.

힘들이지 않고 불자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고.

잠시 후, 저 멀리서 날아오는 까마귀를 보며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까악 까악.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녀석을 보며 물었다.

“전투는 잘 진행되고 있나?”

그러자 공중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며 나는 까마귀.

“좋아. 가서 디터에게 전해라. 바야르는 죽이고, 매복대를 이끄는 용병대장은 생포하라고.”

까악 까악.

내 말에 대답하듯 까마귀가 한 차례 울부짖었다.

다시 창문 밖으로 날아가는 새의 뒷모습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잘 부탁한다, 발닉.”

* * *

디터와 3형제의 승전보는 생각보다 금세 들려왔다.

“세자르 공자님의 가신들이 승리했다네!”

“웬 놈들이 공작 각하를 노렸다지 아마?”

“흉악한 용병들을 단번에 격파했다고···.”

마침내 디터 일행이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돌아왔을 때.

공작저 안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요 얼마 전 하녀가 살해당했으며, 그녀로 위장한 암살자가 공작의 목숨을 노렸던 일로 흉흉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일소된 듯했다.

“공자님, 공자님! 가신 분들이 돌아오셨습니다!”

내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들어온 제이콥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험상궂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좋아. 같이 내려가지.”

1층 홀에는 디터 일행이 데리고 온 포로들이 가득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디터와 3형제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서 있었는데.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며 그들의 안부를 묻는 (주로 여자) 사용인들에게 3형제는 안심시키듯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이건 모두 저 빌어먹을 놈들의 피니까요!”

“디터 경이 얼마나 시원하게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내는지···.”

승리의 기쁨에 젖은 그들을 놔두고 나는 디터에게 제일 먼저 향했다.

“디터, 수고많았다.”

“아닙니다.”

디터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순수한 기쁨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포로들의 신병을 확보해라.”

사병대가 나서서 포로들을 끌고 가자 용병대장만이 남게 되었다.

그는 비장한 각오가 담긴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날 고문해봤자 소용없다. 암흑용병단은 의뢰자의 정보를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아.”

나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어차피 고문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으니까.

“데려가서 심문하도록.”

용병대장이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3형제 중 나답이 나서서 놈의 배에 주먹을 찔러넣었다.

나는 카렌에게 눈짓했다.

심문에 최적화된 이능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미리 진실의 약물을 넘겨놨기 때문이다.

“나답 님, 같이 가시죠.”

“어, 어, 카렌 님이··· 심문하시곘다고요?”

나훔 또한 당황한 눈치였다.

“하, 하지만 카렌 영애가 보시기엔 흉측한 광경일 텐데-”

“영애라뇨.”

카렌은 그 말이 퍽 우스운지 픽 웃었다. 그녀를 필두로 3형제가 용병대장을 끌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그때,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피곤한 기색이지만 안색이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네 가신들이 또 공을 세운 모양이구나.”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 너머에서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계획이 잘 맞아떨어졌을 뿐입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홀 한가운데에 따로 끌고 온 시신 앞에 가 섰다.

장신에 근육질의 체구, 떡 벌어진 어깨. 눈조차 감지 못한 그 얼굴은···.

“바야르로군.”

···공작도 림 바야르와 아는 사이인가?

그런 마음의 의문이 들리기라도 한 듯, 공작은 내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본디 이자, 림 바야르는 나를 따르던 수하였다. 그의 쌍둥이 동생인 훔 또한 림의 얼굴을 봐서 내 식솔로 거두어들였으나···.”

공작은 말을 흐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뭐, 그 뒤는 안 들어도 뻔하다.

‘리아나 부인의 매혹에 걸려들었고.’

이후는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서라도 무엇이든 다 하는 좀비가 되었다, 이 말이겠지.

나는 공작의 얼굴을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가뜩이나 리아나 부인과의 과거사도 안타깝기 그지없는 아저씨인데 부하한테도 배신당했다니.

‘아, 작가 양반 거 너무한 거 아니오.’

물론 역4가야 원래부터 너무한 양반인 건 잘 알긴 했지만, 이런 비참한 속성을 한 캐릭터한테 몰빵하는 건 좀 너무하다 싶어서 말이지.

덕분에 ‘세자르 레핀’이 된 지 굉장히 오랜만에, 독자로서의 감회를 새삼 느끼게 된 터였다.

나는 공작의 옆얼굴을 흘깃 살피며 물었다.

“바야르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공작은 내 질문에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세자르. 우리 가문의 문장이 왜 검과 방패인지 아느냐?”

나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솔직히 말했다.

“모릅니다.”

“···내 사람들에게는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가 되어주되, 나의 적들에게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되겠다는 신념의 상징이지.”

공작의 목소리가 차갑다 못해 비정하게 들렸다.

옆을 돌아보자 그의 표정이 오싹할 정도로 돌변해 있었다.

그 순간, 공작이 무언가를 단단히 각오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

공작이 내게 다가오더니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지만.

“···알겠습니다.”

그를 마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최근 라페스 자작은 고민이 많았다.

그는 지금 본가를 떠나 리아나 부인과 함께 중부지대의 별장에 머무는 중이었다.

에스닐의 곡창지대로 알려진 이곳은 먼 나라의 귀족이나 왕족이 찾아와 머물 정도로 아름답기로 유명했는데.

“참 아름답네요.”

리아나 부인의 감상은 이 정도가 다였다.

그녀에게 헌신과 충성을 약속했는데도 부인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어제 드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마음에 드시지 않는 건가.’

선물 공세도 이제는 할 만큼 했지만, 그때만 잠시뿐이었다.

리아나는 금세 시름에 젖어 불안해했으니까.

“부인, 대체 왜 그러십니까? 어째서 마음이 안 좋으신 건지···.”

언젠가는 대놓고 물어도 봤지만.

리아나는 슬픈 미소만 지을 뿐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제 마음이 그리 걱정되신다면, 제 자식을 위한 지원에 힘을 좀 더 쏟아주시지요.”

전폭적인 걸 넘어선, 파격적인 재정 지원.

어딘가 머릿속 한구석에서 경고의 종이 울렸지만, 그녀를 철석 같이 믿는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부인께서 나를 속이실 리 없다.’

그녀의 말마따나 힘들 때 돕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가 아니던가.

또한.

그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리아나 부인은 아낌없는 신뢰를 보여주었고.

그때마다 자작의 애정은 또다시 충만하게 차올랐다.

“저, 자작님.”

발코니에 앉아 풍경을 감상 중이던 그들에게 하인이 다가와 기별했다.

품에는 큼지막한 상자를 든 채였다.

“어떤 상인이 찾아와 리아나 부인께 바치는 선물을 남기고 갔습니다만.”

평소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은 그녀였다.

이런 식의 선물을 바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설마 이 별장에까지 그런 이가 왔다 갈 줄은 몰랐다.

‘그러한 여인이 결국엔 나를 선택했다니.’

자작은 내심 뿌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놓고 가거라. 부인, 부인께 온 선물인데 확인해보시지요.”

그때껏 바깥 풍경에서 눈을 못 떼던 리아나 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제게 온 것이라고요?”

“그렇다 하는군요. 직접 열어보시지요, 부인.”

자작은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녀가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줄 셈이었다.

상자를 열어본 리아나는 말이 없었다.

“···.”

“부인?”

예상 외의 반응에 자작이 잠시 당황한 순간, 그녀가 중얼거렸다.

“···바야르 경이네요.”

바야르 경이라면 지난번 큰 돈을 써가며 감옥에서 간신히 빼돌린 사내가 아니던가.

그가 부인께 선물이라도 보낸 걸까.

‘혹시라도 그자에게 마음이 남으신 거라면···.’

불안해하며 상자 안을 들여다본 순간.

“···!”

자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리아나 부인은 자작을 표정 없이 슥 돌아보고는 다시 상자 안을 보았다.

···그 안에는 소금에 절여 형체를 보존한,

림 바야르의 잘린 머리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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