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타가 막타
그날 저녁.
석양에 붉게 물든 하늘이 지평선 근처에서부터 점차 어두워졌다.
까악 까악-
그 검붉은 하늘을 새카만 까마귀 한 마리가 가르고 나타났으니.
“···까마귀라니,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은뎁쇼.”
용병 하나의 중얼거림에 다른 용병이 대꾸했다.
“예끼, 재수 없는 소리 하기는!”
“하지만···.”
“근데 이상하긴 한걸.”
세 번째 용병이 까마귀를 가리켜 보였다.
“저 새, 꼭 우리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 말대로였다.
유난히 덩치가 커다란 까마귀는 유독 그들의 머리 위를 선회하는 중이었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라도 하듯.
“쉿! 목표물이 접근한다!”
용병대장의 외침에 그들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들은 수도 근처의 숲에서 매복해 있는 중. 이들을 이끄는 용병대장은 오늘 작전의 핵심 역할을 맡은 사내를 힐끗 훔쳐보았다.
피골이 상접한 데다 눈 밑이 퀭한 것이 광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저자가 한때 필멸의 검이라 불렸던 림 바야르라니.’
림 바야르.
검객들 사이에는 꽤 유명한 이름이다.
평기사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전장을 돌다가, 결국에는 왕립 아카데미의 교관이 되기에 이르렀으니까.
‘우리 같은 용병들에겐 희망 같은 존재였지만.’
그런 그가 레핀 공작의 서자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저 바야르를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용병대장은 씁쓸한 심정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경의 역할이 뭔지는 알고 있소?”
바야르는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가 마차를 붙잡아 시간을 끄는 동안, 경은 마차의 호위기사들을 상대해주시오.”
용병대장의 덧붙임에 바야르는 걱정마시오, 라고 한마디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정기회의에 참석하러 왕궁으로 향하는 레핀 가문의 마차.
공작이 워낙 두문불출하는 터라, 오늘의 외출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터였다.
“···.”
매복 부대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찰나.
두두두두-.
숲 초입에서부터 힘찬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다들 제 위치 지켜!’
‘유인조는 앞으로!’
용병대장의 소리 죽인 지시에 맞춰 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로부터 잠시 후.
히이이잉!
말발굽 소리만큼이나 우렁찬 말 울음과 함께, 두 마리 준마가 이끄는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핀 가문의 문장인 ‘교차하는 검과 방패’를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나.
‘무장 상태가 엄청나군.’
용병대장은 내심 감탄했다.
목숨을 노리는 세력을 의식한 것인지, 차체의 온 사방에 강철판을 덧대어놓았으며.
마차를 끄는 두 마리 말 또한 마갑으로 중무장을 한 터였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
마차가 그대로 통과하려는 순간, 저 앞쪽에서 도와주십시오! 라는 애절한 외침이 들렸다.
“제발 나리들! 누가 되었든 도와주십시오!”
···횃불을 들고 길 한복판으로 달려든 사내였다.
사내의 품에는 축 처진 어린 아이가 안겨 있었다.
“제발, 이 불쌍한 아이를 모른 척하지 마시고.”
“비켜라!”
마부가 외쳤지만 사내는 비키지 않았다.
결국,
멀쩡한 사람을 치고 지나갈 수 없었던 마부가 마차를 멈췄다.
아이를 안은 사내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크억!”
그는 갑자기 검을 뽑아 마부의 목에 들이댔다.
“당장 고삐를 놔라.”
“으으···.”
마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삐를 놨다.
사내가 신호를 보내자 숲에 매복해 있던 용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차를 포위하라!”
마차는 순식간에 포위되었다.
용병 하나가 다가가 차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뒤로 나타난 것은-
“어··· 공작이··· 아닌데요?”
레핀 공작이 아니었다.
당황한 용병의 뒤편으로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머리통만 한 메이스를 한 손에 든 디터였다.
“너는-”
용병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거구의 사내가 강철 메이스를 힘차게 휘둘러-
푸악! 하고 그의 머리를 박살내버렸으니까.
“다음은 누구냐?”
···분명 저 안에는 레핀 공작이 있어야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용병들은 잠시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을 뿐 아니라.
“어어···.”
“으아악!”
“괴, 괴물이다!”
사람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력에 그들의 본능이 경고음을 울렸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용병들에게 대장이 외쳤다.
“물러서지 마라! 상대는 단 한 명뿐이다!”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아무리 괴력의 사내라 해도 저쪽은 단 한 명.
그에 반해 이쪽은 꽤 알아주는 용병단 중 하나인 ‘암흑 용병단’의 정예들 스무 명이 모여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달래보았지만, 이미 사그라든 전의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다음은 누구냐니까?”
“윽···.”
“누가 이 메이스에 맞아 머리가 날아가고 싶으냐?”
저런 대사를 날리며 거대한 강철 메이스를 가볍게 휘두르는 거구의 사내.
칠흑 같은 어둠을 배경으로 선 놈의 모습이 꼭 지옥의 사자 같다.
모두가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용병대장만이 정신을 차렸다.
“용병들! 대형을 맞춰라!”
그때야 비로소 용병들은 검과 방패를 들었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혼자서 스무 명을 상대할 순 없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한때 이름을 날린 검객인 림 바야르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세월이 지났다 해도 몸에 밴 실력은 어디로 가지 않는 법.
그런 생각에 꺼져가던 사기가 다시금 불타오른 순간!
두두두두!
숲길 양쪽에서 흙먼지가 불어왔다.
여러 마리의 말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에 용병들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누구냐!”
그들의 앞쪽으로 나타난 것은 십여 기의 기병들. 맨 앞에 선 건장한 사내가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나는 카디움 부족의 나훔이다!”
이내 용병들의 뒤편으로 또 한 무리의 기병들이 나타났다.
“나답과 나만이다!”
왕국 내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이민족의 출현에 용병들은 당황했지만.
“우리 형제가 세자르 공자님을 대신하여 너희 검은 용병단을 섬멸하겠다!”
그들이 ‘세자르 레핀’의 이름을 받들어 싸운다는 것에 한층 당황했으며.
이러한 심리적 불안감은 용병대의 조직력을 와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으윽! 사, 살려줘.”
“자기 자리를 지켜라! 어이, 도망치지 말··· 컥!”
“물러설 곳도 없다고!”
용병대의 앞뒤를 둘러싼 기마대가 도륙에 가까운 기세로 그들을 상대하는 한편.
부웅! 퍽! 부우웅! 팍!
용병들 한가운데에 선 디터가 거대한 메이스를 사방으로 휘둘렀다.
강철 메이스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둔탁한 충격음이, 곧이어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말도 안 돼.’
용병대장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의 앞뒤를 기병들이 포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숙련된 용병들 다수를 상대로 혼자 저렇게 싸운다고?
‘일당백이라는 것이 무언지를 보여주는 사내로군.’
용병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공격했지만, 그들의 검은 거구 사내가 입은 전신 판금 갑옷에 가로막혔다.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사내는 빛 같은 빠르기로 메이스를 휘둘렀으니.
싸움이라기보단 학살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후퇴! 후퇴하-”
“저자는 내가 맡겠소.”
용병대장이 만류하기도 전, 바야르가 거구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른 용병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챙! 챙캉!
갑작스레 날아든 날카로운 검격에 거구 사내가 잠시 멈칫했지만.
그것이 누구의 검인지를 확인한 사내가 미소를 머금었다.
“하, 이게 누구신가.”
바야르 또한 그의 얼굴을 알아봤다.
···자신을 이꼴로 만든 원흉, 세자르 레핀의 수족이 아닌가.
“네놈은 세자르 레핀의 종자 아니냐.”
“어딜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나! 이제는 엄연한 공작가의 적자로 인정받으신 바!”
주변의 마지막 한 명을 처리한 디터가 바야르에게 메이스를 겨눠 보였다.
“기억나나? 네놈이 우리 주군을 욕보이려 했던 걸.”
“하, 네놈의 주군이라는 놈이야말로 내 동생을 모욕하고 모함했으며 추방시켰던 것을 모르는가!”
바야르가 악에 받쳐 외쳤다.
이 모든 것은 따지고 보면 자신이 오판을 한 탓이었으니.
‘뱀처럼 교활한 자에게 기사 대 기사로서 결투를 신청한 것이 잘못이었다.’
세자르 레핀.
그 영악한 놈은 자신의 결투 제안을 웃음거리로 만든 것도 모자라,
저에게 ‘귀족살해미수죄’라는 말도 안 되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네놈이야말로 오늘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바야르는 허리춤에서 검을 창, 하고 빼들었다.
감옥 안에서도 단 한순간도 수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다.
‘언젠가 찾아올 복수의 순간만을 기다렸으니까.’
하늘은 스스로 구하는 자를 구한다 했던가.
그런 자신의 강철 같은 의지 덕분인지, 경애하는 리아나 부인이 제게 찾아와 기회를 주지 않았던가.
‘바야르,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나를 위해 공작을 죽여다오.’
바야르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명을 따르기로 했다.
아니, 공작만이 아니다.
제 동생의 불명예를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세자르 레핀을, 그의 부하들을 모조리 죽이기로 알레스 신 앞에 맹세했다.
‘이제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오늘 여기서 이 건방진 자를 죽이고.
이자의 머리를 들고 레핀 저택으로 향한다.
“네 움직임은 허점투성이라는 것 알고 있나?”
바야르의 눈에는 전부 다 보였다.
여기 있는 이 거구 사내는 힘만 무식하게 셌지 검술을 배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그 말에 디터가 흠칫했지만, 이내 무기를 휘둘렀다.
“다 보인다. 어디로 들어올지.”
다음은 오른쪽, 그다음은 왼쪽.
거구 사내의 공격 패턴은 단순하다 못해 단조로웠다.
바야르는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반면 그의 검은···.
부웅!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상대의 허점을 노렸다.
디터는 퍼뜩 놀라며 공격을 피했다.
“호, 생각보다 제법 날렵하군. 그러나.”
바야르는 제 검술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물처럼 흐르는 부드러운 검이 거대한 사내의 몸 여기저기를 노렸다.
대부분은 판금 갑옷에 막혀 들어가지 않았으나.
“아무리 단단한 것으로 감쌌다 해도 빈틈은 있는 법.”
팔꿈치. 겨드랑이. 사타구니.
관절 움직임을 위해 이음새를 달아놓은 부분을 칼 끝으로 파고들었다.
“크윽!”
그 여유롭던 디터의 얼굴에 처음으로 조급함이 떠올랐다.
“체력과 힘의 우위는···.”
바야르는 전문가다운 손놀림으로 검을 움직였다.
약한 부분. 막기 힘든 부분들만 공략한다.
상대의 얼굴이 차츰 창백해지는 것이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기술과 기교의 우위로 얼마든 따라잡을 수 있는 법.”
그의 검신이 달빛 아래서 은빛의 궤적을 그렸고-
챙!
디터는 그것을 간신히 쳐냈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내 주군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는군. 아무리 기술과 기교가 뛰어나더라도, 압도적인 힘 앞에선 뼈도 못 추린다고 말이다.”
바야르는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세자르, 그 애송이 따위가 하는 말을 신념으로 삼는 종자라니.
“우스운 말이구나.”
메이스에 가로막힌 검을 다시 거둬들인 뒤.
다시금 그의 빈틈을 노려 뻗어낸 순간!
“···!”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디터의 금속 장갑이 그의 검을 붙잡았다.
어마어마한 악력이 검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딱 한 방만. 한 방만 맞추라고.”
바야르는 온 힘을 다해 검을 빼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디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싸움은 끝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쨍그랑!
검이 두 동강 났다.
‘손으로··· 검을 부러뜨렸다고?’
바야르는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충격과 놀람 때문일까.
“명색이 교관이라는 놈이 학생을 죽이려고 덤벼들던 그때.”
전장에서 무기가 훼손되었을 땐 얼른 다른 무기를 꺼내들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수칙마저 잊고 말았고.
부아앙!
“네놈을 죽이지 못해 얼마나 안달났는지 모르겠지!”
퍽!
···그 ‘단 한 방’이 맞아들어갔다.
“끄···.”
너무 아프면 신음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이었나.
날카로운 고통에 절로 튀어나오는 비명은, 그의 입안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이건 발닉 아저씨의 몫!”
“쿠억!”
“이건 내 몫!”
“컥!”
“마지막으로···.”
디터의 굵은 팔이 메이스를 무지막지하게 휘둘렀다.
“우리 주군의 몫이다!”
콱!
끔찍한 소리와 함께 바야르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자르의 말대로,
그 ‘단 한 방’이 시작이자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