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91화 (91/176)

미래를 점치는 자

에스닐과 오프러스의 국경지대, 팰러스와 우만이 머무는 저택.

응접실에는 이 두 사람 말고도 익숙한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제발, 제발··· 이 노구가 부탁드리겠습니다.”

피골이 상접하고 주름진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이 얼룩져 있다.

언뜻 보기에 부랑자 같으나, 처진 눈꺼풀 너머에 자리한 안광만큼은 형형하게 빛나는 이 노인은-

“헬리오스 백작.”

“아니, 이제 이 노구는 일개 귀족일 뿐. 트레버라고 편히 불러주십시오.”

수도의 전통 있는 명문가인 헬리오스 가문의 수장, 트레버 헬리오스였다.

늦은 나이에 장남 브렉을 얻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때만 해도 기쁨으로 빛나던 두 눈동자는 이제 비탄에 젖어 있었다.

‘그 당당하던 대귀족이 이런 몰골로 앉아 있다니.’

그가 팰러스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앉은 모습에 우만은 내심 충격을 받은 터였다.

“트레버 공, 일어나십시오.”

팰러스의 말에도 헬리오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팰러스의 발 끝을 붙잡은 채 통곡했다.

“제발··· 이 노구에게 힘을 빌려주십시오.”

“···.”

“힘 없는 저희들이 마지막 생명을 짜내어 아들의 복수를 할 수 있게.”

트레버 헬리오스는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꼈다. 그 어깨가 떨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팰러스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트레버 공.”

“···!”

어느새 제 앞에서 눈높이를 맞춘 팰러스의 모습에 노인이 눈을 크게 뜬 순간.

팰러스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의 주름진 두 손을 붙잡았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제가 너무도 배은망덕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팰러스 공자님···.”

“브렉은 내 친동생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였습니다.”

팰러스는 감정을 다스려가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브렉의 복수는 내게 맡겨주십시오, 트레버 공.”

“!”

노인의 눈동자에 희망이 차올랐다.

“그리 해주시겠습니까? 최근에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제가 탐탁지 못하실지 모르겠으나-”

“아니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노구는 그저 황송할 뿐···.”

노인은 곧바로 머리를 바닥에 닿을 듯 조아렸다.

“고개를 드십시오, 공.”

팰러스의 말에 노인은 감개무량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희 헬리오스 가는 무조건 팰러스 공자님만을 따르겠습니다. 공자님 같은 분이 우리의 왕이 되어주셔야-”

“쉿.”

팰러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듣는 귀가 많습니다, 트레버 공. 그리고 저는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몸입니다.”

황송해하는 노인의 손을 팰러스가 다시금 붙잡았다.

“공께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뿐.”

“뭐든 말씀하십시오, 공자님.”

“헬리오스 백작부인, 아니 레이디 로라의 친정인 백카드 가문의 지지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백카드 가문.

브렉 모친의 친정으로, 오프러스와 국경을 맞댄 동부지대에 거대한 영지를 보유한 지방 귀족 가문이다.

이곳 영지는 질 좋은 철광석이 생산되는 덕분에 부유할 뿐더러 병장기 생산량도 가장 많은 지역.

팰러스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노인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트레버 공과, 헬리오스 가문원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우리의 큰 뜻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트레버 헬리오스는 처음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로 응접실을 나갔다. 팰러스가 제 아들의 복수를 대신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우만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

팰러스가 입을 열지 않자 응접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덕분에 잠시 후, 저 멀리서 헬리오스 가문의 마차가 떠나가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우만.”

“네.”

창문을 등지고 서 있던 팰러스가 물었다.

“떠났나?”

그 말에 우만은 창문을 내다보았다.

마차는 저택 건물을 떠나 정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네, 마차가 출발했습니다.”

그 말에 팰러스의 표정이 싹 변했다.

방금 전만 해도 인자한 미소를 짓던 얼굴이 이내 완벽한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아까 헬리오스와 대면할 때 끼고 있던 장갑을 벗더니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졌다.

“연기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군.”

우만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헬리오스 가문은 어찌 도와주실 생각이신지-”

“도와줘?”

팰러스는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반응했다.

“이 내가, 헬리오스 가문을 도와야 한단 말인가?”

“···.”

“우만, 오랜만이라 감을 잃었나 본데.”

팰러스는 탁자 위에 놓인 장식품을 신경질적으로 톡톡 두드렸다.

“헬리오스는 이제 이빨 빠진 사자에 불과해. 그마저도 곧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늙은 사자 말이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잡아먹힌 체스말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법이지.”

잡아먹힌 체스말.

팰러스에게 브렉이 의미하는 바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였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우만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말이 없지, 우만. 네 생각은 다른가 보지?”

“아니, 아닙니다.”

우만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첩자 행위를 발각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우만, 나를 똑바로 봐라.”

그 말에 우만은 팰러스와 눈을 마주쳤다.

조각처럼 아름답지만 인간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너는 나를 믿는가?”

또 한 번, 알 수 없는 힘이 우만의 목을 죄여왔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숨이 막힐 듯했지만.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라 그런가.’

그런 대로 견딜만하다고 느끼며 우만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줬다.

“물론입니다, 팰러스 님.”

“···그래. 나 역시 널 믿는다.”

잠시 싸늘해졌던 팰러스의 눈빛은, 우만이 그렇게 확답한 후에야 안심하는 기색으로 바뀌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팰러스는 대답 대신 손짓으로 대꾸했다.

응접실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우만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제 방으로 가는 동안 세자르가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럼에도 선택은 어디까지나 네 몫이다.’

그 말대로 세자르는 저에게 고민할 시간과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그 얘기를 팰러스에게 홀랑 털어놓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요소까지 감수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언제였더라.

커피하우스를 나서서 돌아가려는데, 세자르를 멀찍이서 호위하고 있던 두 명의 가신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더랬다.

‘우만 님, 저희는 세자르 님의 가신인 디터와 발닉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용건은 단순했다.

‘그분은 여느 귀족 자제분들과 다르십니다.’

‘주군은··· 저희를 가리켜 내 사람이라고 해주시는 분인걸요.’

그러니 그를 믿어도 괜찮다.

두 사람은 그 말만 남기고 가버렸다.

‘아무리 배다른 형제라고는 하지만 이리도 다를 수 있을까.’

방으로 들어온 우만은 책상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과거 자신이 그에게 느꼈던 존경심과 애정마저 날조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깃펜을 들었다.

* * *

카렌이 준 명단의 인물을 만나보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꽤 소요됐다.

현장에 가보니 이미 터를 옮겨서 헛탕을 친 경우가 두 번 있었고.

‘이 주사위를 던져보게나.’

간신히 만나는 데 성공해 이능자 주사위를 던져보게 하니,

이능이 없다는 것으로 나온 인물이 두 명.

그리고 지금은 명단의 마지막 인물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이번엔 맞아야 할 텐데···.”

“너무 부담갖지 마, 카렌. 어차피 나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으니까.”

내 말에도 카렌은 아쉬운 얼굴이었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총관 카얀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카얀, 이미 가문의 호적에 올라온 자식을 파기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심코 되묻던 카얀은 내 눈빛을 보고는 금세 말뜻을 파악했다.

‘부모 자식 관계는 알레스 신께서 맺어주신 거라 해서 법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만···.’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좁히던 그가 말을 이었다.

‘성인이 다 된 자식을 호적에서 파낸 판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좋아. 그렇담 그런 판례들을 찾아보고, 어떤 식으로 호적 파기를 이끌어냈는지 조사해주게.’

‘알겠습니다.’

총관은 이런 점이 좋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내 진의를 파악해주니까.

왜냐면 며칠 전,

공작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작은 이미 많이 약해져 있다.’

그런 데다 팰러스 진영이 언제 어떤 식의 기습을 해올지 모른다.

설령 한 번의 암살 시도를 피해낸다 해도, 저쪽에서 제2, 제3의 암살자를 보낸다면?

가뜩이나 심약해진 공작이 제 풀에 지쳐 쓰러질지도 모르는 법이다.

‘절대 겉으로는 드러내진 않지만, 아내와 의붓아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이 힘겹지 않을 리 없지.’

입안이 씁쓸한 것을 느끼며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위험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는, 팰러스를 아예 레핀 가문의 호적에서 들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즉, 놈의 왕위 계승권을 무효화하는 수밖에는 없다.’

나는 일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즉시 공작과 담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세자르, 다 왔어.”

생각의 정리를 마치기가 무섭게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카렌과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들어선 뒷골목은 여전했다.

거리 곳곳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백주대낮에 패싸움과 도적질이 끊이지 않는 곳.

그럼에도 생기와 활기로 약동하는 거리 한가운데로 카렌은 나를 안내했다.

“여기야.”

그녀가 가리킨 곳에 작은 천막 하나가 자리했다.

“줄이 어마어마한데?”

그리고 그 앞에는, 맛집에서 입장 순서를 기다리듯 뒷골목 주민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카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아하니 용하다는 소문이 멀리까지 퍼졌나 봐.”

그 말에 기대감이 한층 커졌다.

‘이번엔 제발 맞았으면 좋겠는데.’

카렌이 아니라 도적길드 후계자 ‘렌’의 차림을 하고 온 그녀가 다가가자, 렌을 알아본 사람들이 주춤거렸다.

“저기, 검은손 길드 도련님 아니야?”

“이야, 렌 님까지 오실 정도면···.”

“입소문이 아주 제대로 났나 보네?”

맨 앞에 가자 줄을 서 있던 길드 부하 하나가 렌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렌 님! 안 그래도 이제 차례가 다 와가서···.”

“그래, 줄 서느라 수고했다.”

덕분에 우리는 대기 없이 곧바로 천막으로 들어갔고.

신비롭게 꾸며놓은 내부에는 곰처럼 우람한 체구에 두건을 눌러쓴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태양의 인도로 이 누추한 곳까지 발걸음하신 귀한 객들이시여.”

청산유수로 말하던 사내는 내 옆에 선 카렌을 본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저와 함께 신비의 타로가 알려주는 미래를 엿보고 가십시오.”

“···.”

이것도 나름의 컨셉인 건가.

나는 두건 안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대의 소문이 이 뒷골목에 파다하던데.”

“오, 그것은 발 없는 바람이 실어다준 운명의 흔적이니-”

“잠깐, 이 목소리는?”

카렌이 사내에게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그의 두건을 벗겼다.

“아, 아이고 대체 왜 이러십니까!”

그러자.

사내의 매끈거리는 대머리가 드러났고, 이내 험상궂은 이목구비, 별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모습을 보였다.

사내의 모습을 확인한 카렌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 쓰레기 같은 자식!”

그와 동시에-

점술가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야, 이 씹어먹어도 모자랄 새끼야!”

“제, 제발! 렌 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뭐야, 둘이 구면이었어? 영문을 몰라 당황하던 찰나.

내 눈앞에 점술가 놈의 호감도 창이 떴고.

그 내용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떠돌이 점술가 ‘바바’ (호감도 0점)

- 이능자 ‘미래를 점치는 자’(2단계 개방)

- 특성 : 속물적, 자본주의의 첨병, 허언증, 황금만능주의

- 비고 : 과거 검은손 길드에서 활약했던 소매치기 겸 사기꾼. ‘렌’의 뒤통수를 치고 달아난 전적이 있다. 소속감이나 충성심이 없는, 언제든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는 인물.』

미래의 힌트를 제공해 팰러스를 승리로 이끌었던 이능자.

···이놈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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