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90화 (90/176)

양동작전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와 앨빈뿐.

원래는 농농이도 불러오고 싶었지만, 나훔과 함께 공작을 경호하는 중이다.

긴장한 기색으로 소환권을 내려다보던 앨빈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도움이 될까요?”

“네 역할이 뭔지는 아까 들었잖나.”

우리가 불러내려는 것은 이대륙 출신의 행상인.

아이템 설명에 따르면 행상인에게서 상품을 구매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앨빈이 빙의할 수 있는 역관 ‘하라라’는 본디 이대륙 출신의 이방인이니···.

‘동향인을 만나면 반가워서라도 한 마디 더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정보를 효과적으로 얻어내기 위한 방편의 하나다, 이 말이지.

각오를 다지듯 고개를 끄덕이는 앨빈을 보며 내가 말했다.

“소환권을 사용하겠다.”

그러자.

소환권 주변에서 부웅, 하며 진동이 생겨났고.

“아···!”

앨빈이 경악의 신음을 내뱉던 순간.

파아앗!

소환권이 흰 빛이 되어 흩어짐과 동시에 눈앞에 누군가의 형체가 나타났다.

‘드디어···.’

행상인이 나타나는 건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기대감을 가득 안은 채, 눈부심 때문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그쪽이 날 불렀나?”

···지극히 평범한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중키에 중간 체구, 흐릿한 인상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그 옷은···.”

흔하디흔한 맨투맨티셔츠에 청바지, 커다란 백팩까지.

202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입을 법한 차림새가 아닌가.

“이봐, 소환시간은 정해져 있다고. 안 그럼 포탈이 닫힌단 말이야.”

···포탈?

“그러니 상품 구매할 것 있으면 빨리 사고-”

“이름이 뭐지?”

나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으로 물었다. ‘행상인’은 황당해하며 풋 웃음을 터뜨렸다.

“행상인 퀘스트를 하며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보는군. 보통은 나한테 관심이 없던데.”

“행상인··· 퀘스트라고?”

“그래, 퀘스트. 뭐 이렇게 말해봐야 너네 대륙인들은 모르겠지만. 난 강진우. 진우가 이름이고, 강이 성이다.”

···강진우라.

‘행상인’ 강진우가 백팩 안에서 다양한 물건을 꺼내는 가운데, 나는 앨빈에게 눈짓해 보였다.

어느새 빙의를 마친 역관 ‘하라라’가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아이고, 이대륙에서 오신 행상인이시라고요?”

“음, 그렇습니다만···.”

앨빈이 존대하자 행상인 또한 당황하며 존대하기 시작했다.

“저도 이대륙 출신이라 그 동네는 좀 아는데.”

“정말이십니까?”

“그럼요. 그 왜, 제3번 ‘어둠의 구역’에서 최후까지 생존한 100인 중 한 명입니다.”

“맙소사! 어떻게 그곳에서···.”

“몇 가지 팁 좀 드릴까요? 혹시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아, 그렇다면···.”

둘은 머리를 맞댄 채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어둠의 구역은 뭐고, 퀘스트 얘기는 뭘까.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작가의 전작 아니야?’

작가 역4가가 <왕도의 대가> 이전에 연재했던 소설.

제목이 <나 혼자 무한 최강 상점창>이었나 그랬던 것 같다.

현대의 한국인들이 알 수 없는 게임식 이세계로 대거 강제 이동당하고, 거기서 상태창을 활용해 강해져서 살아남는 이야기.

‘무료연재 때 엄청 잘 나가다가 유료로 넘어가서 폭망했었지.’

나도 중간에 하차한 기억이 난다.

어쨌든 강진우는 그 소설에 나오는 인물인 것 같고.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가들은 봤어도, 이런 식의 콜라보를 하는 작가는 처음인걸.

이 세계의 비밀 하나를 엿본 것 같아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일단은 물건을 좀 살펴볼까.’

행상인 강진우가 가져온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무기류는 물론이고, 게임에서는 흔히 ‘포션’이라고 부를 법한 소모성 아이템까지 다양하게 있다.

마법도, 오러도 존재하지 않는 이 에스닐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이 대부분일 뿐더러.

‘위에 설명이 뜨네.’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물건 위에 [광속의 활] 같은 아이템명이 표시되어 있다.

활을 향해 무심코 손을 뻗자, 더 자세한 설명이 나타난다.

『‘광속의 활’(가격 : 550만 크로네)

- 설명 : 화살을 장전하지 않고 쏠 수 있는 활. 목표물을 향해 시위를 당기면 빛 형태의 화살이 날아간다.

- 비고 : 쿨타임이 존재하지만, 숙련도가 올라감에 따라 감소한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자, 강진우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때, 그거 괜찮지? 활을 잘 못 쓰는 인간들도 얼마든 쓸 수 있는 거라고.”

나는 강진우의 말을 무시하며 다른 아이템을 하나씩 살펴봤다.

다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거라 그런지 가격이 어마무시하게 비싸다.

“이거, 돈만 있으면 다 살 수 있는 거야? 개수 제한 없이?”

내 질문에 강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무기 중 한 개만. 소모성 아이템은 세 개까지만 살 수 있다.”

거참 쩨쩨하네.

“내가 정한 게 아냐.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퀘스트 조건이라고.”

“방어구는 없나?”

“아쉽게도 이번 퀘스트엔 방어구 물량이 안 풀렸거든.”

퀘스트에 여러 가지 제한이 있나 보다.

나는 역관 하라라와 머리를 맞대고 잠시 고민했다.

“이 중에 뭐가 제일 괜찮아 보여?”

“글쎄요. 주군이 이곳에서 구하기 가장 어려울 법한 물건으로 고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검이나 활이야 여기도 좋은 물건이 많이 있지만···.”

하라라의 시선이 총으로 향했다.

나는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총은 기껏해야 머스킷 정도다, 그 말이지? 기왕이면 최신식 총을 구비하는 게 낫겠지.”

무엇보다 여기 붙어 있는 아이템 설명이 가히 사기급이다.

···850만 크로네라는 가격이 저렴하게 느껴질 정도로.

『‘절대 빗나가지 않는 호신용 권총’(가격 : 850만 크로네)

- 설명 : 장전할 필요가 없는 권총. 사용자의 실력과는 상관없이, 목표대상을 설정하면 그 즉시 ‘절대 빗나가지 않는’ 탄환이 발사된다.

- 비고 : 몇 가지 사용 조건이 존재한다.

1. 소유자 혹은 그 아군의 목숨이 위협받을 때에만 발동함.

2. 1km 이내의 목표대상에만 발동함(유효거리 이내라면 벽 등의 장애물도 관통한다).

3. 총알이 목표대상의 목숨을 빼앗을 경우, 소유자는 사흘간 의식을 잃음.』

절대 빗나가지 않는 총이라.

무엇보다 ‘호신용’으로 쓰기엔 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 그리고 레핀 공작에겐 목숨을 지키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권총을 집어들었다.

“이걸로 하겠다.”

“탁월한 선택이군.”

강진우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 * *

꼬박 3시간을 채운 뒤 행상인은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행상인에게서 산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절대 빗나가지 않는 권총은 그렇다 치고.

“소모성 제품들도 엄청난 기능을 지녔군요.”

앨빈이 감탄하듯 말했다.

내가 산 소모성 아이템은 총 3개.

‘만능 해독약’과 ‘소형 다이너마이트’, ‘일회용 구명조끼 10개입’.

···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에서 유용하게 쓰일 놈들이다.

“이 시대의 기술로는 절대 불가능한 물건들이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앨빈은 잠시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그 행상인··· 이대륙이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느낌이더군요.”

“나도 그렇게 느꼈다.”

“그런데 세자르 님, 전 가끔···.”

앨빈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내 얼굴을 살폈다.

“세자르 님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

날카롭기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내가 다른 귀족 놈들이랑 분위기가 다르다, 이 말인가?”

“아니, 그렇다기보단-”

“앨빈.”

나는 앨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지금 네가 할 일은 이거다. ···오늘 행상인에게서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이대륙’이라는 것의 실체를 밝히는 것.”

“···알겠습니다.”

앨빈은 각종 고문서를 섭렵하여 관련 정보를 찾아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행상인과의 조우가 마무리된 지 며칠 뒤, 카렌에게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명단을 대충 추렸어.”

“명단?”

“네가 말한 점술 이능자로 추정되는 인물 말이야.”

그녀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처음엔 ‘미래시’의 소유자인 네가 어째서 굳이 그런 이능자를 찾는 걸까 의문이 들었는데.”

꼴깍.

생각 외의 날카로운 지적에 침이 절로 넘어갔다.

“생각해보니 미래시와 점술은 활용할 수 있는 형태가 다르겠더라고. 어쨌거나···.”

나는 속으로 안도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카렌은 뒷골목에 ‘용한 점술가’가 출몰한다는 소문은 드문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런 소문이 도는 이들 가운데서도 네가 말한 조건으로 추려보니 대략 다섯 명 정도 남더라. ···어떻게 할래?”

그녀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했다.

“뭘 물어봐. 바로 가보자.”

* * *

바로 그 시각,

리아나 부인은 라페스 자작저에서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속, 그녀의 머릿속에 방금 전 라페스 자작과 나눈 대화가 재생되었다.

자작의 잔뜩 상기된 얼굴 또한.

‘제게 백작 작위를··· 내려주신다는 겁니까?’

‘내가 언제나 말했죠. 우리 팰러스는 절대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저란 놈이 해드린 게 무엇이 있다고.’

‘오갈 데 없는 저를 따뜻하게 환대해주셨잖아요.’

자작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죠.’

리아나는 라페스 자작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을 이었다. 사내의 투박한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야말로 진짜 친구라고.’

‘···제 진심을 알아주시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붙잡힌 자작의 손이 꼬물거렸지만, 빠져나가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자작님.’

그의 두 손을 좀 더 힘주어 잡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 가까운 친구가 되는 건 어떨까요?’

‘···!’

라페스 자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야말로 진정한 친구라는 말은 진실이다.

그리고 리아나는, 라페스 자작이야말로 자신과 팰러스를 도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경제적 지원을 담당할 인물.’

병력 지원은 오프러스 공국에서 어떻게든 받을 수 있지만, 레핀 공작가의 지원이 끊어진 이상 물주를 구하는 것은 필수이니까.

물론 다른 귀족들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라페스 자작보다 훨씬 물정에 밝았다.

‘즉각적인 경제적 지원에 대한 대가래 봤자 고작 백작위.’

그것도 팰러스가 왕위에 오른다는 보장이 있고 나서의 이야기다. 그러니 그 누가 그들 모자를 지지하려 나서겠는가?

···여기 있는 이 라페스 자작, 사랑에 눈이 먼 가련한 사내를 제외하고 말이다.

‘여기에 유혹의 힘까지 사용한다면.’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라페스 자작은 리아나가 말한 모든 제안을 받아들였고, 더불어 충성까지 맹세했다.

‘역시. 이 힘을 이겨낼 수 있는 남자는 존재하지 않아.’

리아나는 그것이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은 유일한 남자는 여태껏 세자르뿐이었으니까. 청년이 다 되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알맹이는 아직 어려서 내 힘이 통하지 않는 것뿐일 거야.’

그녀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마음을 추스렀다.

그 순간, 이히힝! 하는 말 울음과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부인.”

마부의 말에 리아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충성스러운 하인이 앞장서서 그녀를 허름한 창고 안으로 안내했다.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려놓은 사내 하나가 포박돼 있었다.

“읍, 읍, 읍···.”

“쉬잇.”

그녀의 속삭임에 사내의 움직임이 멎었다. 사내가 고분고분해진 것을 확인한 리아나가 조심스레 그의 눈가리개를 풀어냈다.

‘하지만, 지금 라페스 자작보다 중요한 건···.’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을 치워버리는 것.

그리고 여기 있는 이 사내야말로, 장애물 제거 작전의 핵심이 되어줄 터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리아나의 물음에 사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럼요, 마님··· 마님··· 보고 싶었습니다.”

체스를 둘 때 그녀가 곧잘 쓰는 작전이 있다. 이른바 양동작전이라는 건데.

‘비숍으로 왕을 노리는 것 같지만···.’

진짜 목표는-

언제 와 있는지도 모를 나이트를 껑충 점프시켜 왕을 잡는 것.

“그래,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

허를 찔린 세자르가 지을 표정을 상상하며 리아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에 황홀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나의 충성스러운 수하, 바야르여.”

···귀족 살해 미수죄로 투옥돼 있던 림 바야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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