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슨 기억인데?
로건이 무사히 공작위를 계승한 지 7년이 지나 무던한 결혼 생활이 이어져오던 시점.
평소처럼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서려던 순간, 문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 누가 있나?’
그럴 리는 없다.
다른 곳은 몰라도 집무실엔 민감한 기밀 서류가 가득한 만큼, 로건은 사용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다.
이곳에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총관 카얀뿐인데···.
‘카얀이 내게 알리지 않고 집무실에 들어갔을 리 없는데.’
그런 생각에 소리나지 않게 살짝 문을 열어보자.
그 틈새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그의 부인 리아나였다.
“이게··· 분명 여기 있을 텐데.”
평소와 달리 초조한 기색으로 책상 서랍을 뒤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로건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쾅! 하며 문을 열어젖혔다.
“뭐하는 거요!”
“꺅!”
깜짝 놀란 리아나의 손에서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졌다.
···자신의 책상 서랍 안쪽에 숨겨놨던 민감한 서류들이었다.
“당신, 왜 여길 말도 안 하고 들어왔지? 대체 뭘 찾으려고···.”
뭐라고 변명하려는 리아나를 밀치고 로건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들을 주워들었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건···!”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창백한 안색으로 아무 말도 못 하는 리아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편의 열린 문에서 그들의 아이가 걸어들어왔다.
“아버지, 어머니, 무슨 문제라도···?”
“팰러스, 그게···.”
리아나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달려가 제 아이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뭐라 뭐라 속삭였다.
로건은 간신히 분노를 다스렸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가 보는 앞에서 아내를 다그칠 수는 없는 법.
“팰러스. 잠시 나가 있거라. 네 어머니와 할 말이 있으니.”
불과 일곱 살에 불과한 아이는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들더니.
로건의 얼굴을 빤히 보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아버지.”
“···나가 있으라니까.”
“잠시만요.”
아이는 아장아장 걸어오더니 로건의 바로 앞에 멈춰섰다. 두 팔을 번쩍 들더니 굳은 살이 잔뜩 배긴 로건의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고사리처럼 작은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
알 수 없는 섬뜩한 느낌에 로건이 아이를 내려다본 순간.
아이가 묘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버지, 여기서 본 것은 전부 다··· 잊으실 거죠?”
“···.”
아니라고,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로건은 저도 모르게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그래요, 다 잊으세요. 잊으면 편하실 거예요.”
팰러스가 그의 손을 놓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서류들은 어느새 리아나가 서랍 안에 되돌려놓은 탓에, 집무실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멍하니 서 있다 고개를 돌리자, 리아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여보, 너무 오래 틀어박혀 계신 것 아니에요?”
“···내가? 오래 있었다고?”
“몇 시간 전부터 계속 나오지 않으시길래.”
리아나는 어느새 그녀의 옆에 달라붙은 팰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팰러스가 아버지를 뵙고 싶다고 해서요. ···혹시나 방해된 건 아니죠, 여보?”
그 말과 함께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자, 로건은 마음 속에 남은 한 가닥 꺼림칙함이 사르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방해라니, 전혀.”
그렇게 그들은 또다시···
행복한 가족이 되지는 못했다.
이런 일이 몇 차례나 반복되었고, 그럴 때마다 리아나를 향한 로건의 애정은 조금씩 사그러들었기 때문에.
* * *
공작의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석연찮은 기분을 지워낼 수 없었다.
“팰러스가··· 다 잊으라 했단 말입니까?”
그때를 떠올리는 듯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 그 아이의 눈빛이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 같은 게 있었지.”
···설마, 그 시절부터 이미 세뇌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는 건가.
그 생각에 잠시 빠져 있는데, 공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뭘, 뭘 잊으라고 했던 거였지?”
내 존재를 잊은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
“···아버지?”
“도무지 기억을 해내려 해도, 도무지···.”
공작은 통증이 있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무언가를 떠올린 듯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때의 그 서류는!”
“뭐였는데요?”
“그건···.”
그러다 이내 큭, 하고 심장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더니.
그의 몸이 쿵, 하고 쓰러졌다.
“아버지!”
얼른 달려가 그를 부축했지만, 공작은 이미 기절해버린 상황.
“밖에 누구 없나! 각하께서 의식을 잃으셨다!”
내 외침에 문 밖에 대기하던 사용인들이 우르르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헉, 이건···.”
“각하께서 쓰러지셨다!”
“주치의! 버논 선생을 얼른 불러와라!”
보고를 받은 총관 카얀이 번개처럼 달려와 상황을 수습했다.
주치의의 진찰이 끝나고, 침대에 누운 공작의 곁에 하녀가 다가왔다.
“저건 누구지? 새로 고용한 이인가?”
처음 보는 얼굴이기에 경계하며 묻자, 카얀이 대답했다.
“마리라고, 이 저택에서 십 년 가까이 일한 아이입니다. 예전엔 좀 굼뜬 감이 있었는데, 최근에 실력이 많이 늘었는지 제법 빠릿빠릿해졌기에 각하의 수발로 붙여놓았지요.”
리아나 부인 사건 이후로 공작저는 늘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아무나 대뜸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런 어린 하녀까지 공작의 곁에 붙여둔 듯하다.
‘마리’라 불린 하녀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공작을 돌봤다. 답답해 보이는 셔츠 단추를 풀어서 숨통을 틔운 후,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한편 그의 입가에 약을 흘려넣었다.
“후···.”
그 덕분인지 공작의 숨소리가 한결 편해졌다. 공작이 안정을 되찾고 쌔근쌔근 잠든 가운데, 나는 둘만 있는 자리에서 주치의 버논에게 질문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아버지가 저렇게 쓰러지실 분이 아닌데.”
버논은 눈에 띄게 주저했다.
“각하께서 공자님께 아무 말씀도 하지 말라 이르셨는데···.”
“말하게.”
“각하는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신 상태입니다. 젊은 시절 독에 당하신 이후로 약해지신 데다.”
헛기침을 하던 그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소량의 비소를 장기 복용해오시지 않았습니까.”
“···리아나 부인이 있었을 때 말인가.”
“네. 다행히 증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 전에 약물을 끊고 치료를 시작했지만.”
버논은 벗겨지기 시작한 이마의 진땀을 닦아냈다.
“체력이 많이 약해지신 터라, 뭔가에 큰 충격을 받으면 가끔 이렇게 의식을 잃으시기도 합니다.”
“···알겠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치의와 대화를 마쳤다.
공작의 과거사와 본의 아닌 사실까지 알아버리고 나자, 어쩐지 입안이 씁쓸해졌다.
‘거짓 사랑에 눈이 멀어 이용당한 것도 모자라.’
···제 핏줄도 아닌 자식에게 지속적으로 세뇌당했다는 건가.
나는 리아나가 레핀 공작을 만난 순간부터 이능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제아무리 목석 같은 사내라 해도 그녀의 이능 앞에선 속수무책이었을 테니.’
사실 <왕도의 대가>를 읽으며 내내 의문이 들기는 했다.
다른 곳에는 매사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레핀 공작이, 어째서 제 핏줄도 아닌 팰러스를 거두어 키워주는 호구 같은 짓을 했을까?
‘헌데 리아나의 매혹 이능과 팰러스의 세뇌 이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면 문제가 달라지지.’
아까 공작이 말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팰러스는 -단기적이긴 하지만- 공작의 기억까지 지울 정도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팰러스의 세뇌 능력이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 사실을 마음속으로 되새기자,
“···젠장.”
내가 상대하려는 ‘팰러스’가 진짜 괴물이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욕이 절로 튀어 나왔다.
* * *
공작은 다음 날 오전에 의식을 되찾았다.
깨어난 공작은 어제 일을 잘 기억 못 하는 눈치였다.
“내가 뭔가를 떠올려냈다고?”
“네. 어렸던 팰러스가 아버지께 뭔가를 잊으라고 했다고···.”
슬쩍 추궁해보았지만 공작은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구나.”
“그렇습니까.”
아쉬웠지만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공작의 건강이었으니까.
“여튼 그 일은 그렇다 치고, 제가 몇 가지 방안을 강구해왔는데요.”
“방안이라니?”
“아버지의 신변을 경호할 방안 말입니다.”
“경호원은 이미 뽑았다만.”
공작이 말한 경호원들은 이미 침실 문 밖에 서서 지키는 중이었다.
“그건 압니다. 저들도 대단한 실력자이긴 하지만, 누군가의 살기를 감지해내는 능력은 없지 않습니까.”
“···타인의 살기를 감지한다고? 그런 인재가 있단 말이냐?”
호기심이 일었는지 공작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내가 한 발 물러서자, 내 뒤에 있던 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강건한 모습에 공작의 눈이 커졌다.
“···너는 얼마 전에 내 아들이 등용했다는 카디움 부족 사내가 아닌가?”
롯의 형제 중 둘째인 나훔이었다.
품에 농농이를 안고 있는 그가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나훔이라 불러주십시오, 각하.”
체구가 장대하면서도 군살 하나 없어 보이는 탄탄한 체격을 감탄하듯 바라보던 공작이 말했다.
“과연, 상대의 살기마저 간파해낼 실력자다운 모습의-”
“살기는 나훔도 어느 정도 감지해낼 수 있지만···.”
나는 웃음을 꾹 참으며 덧붙였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쪽이 아닙니다만.”
“···뭐라고?”
공작이 의아한 눈길로 나훔의 품에 안긴 농농이를 바라보는데.
[앙, 옹옹!]
농농이가 오동통한 손을 인사하듯 흔들어 보였다.
“이 친구가 나훔과 함께 아버지의 곁을 지켜드릴 겁니다.”
“···이 친구라는 게, 지금 여기 있는 아기를 말하는 건가?”
대놓고 어이없어 하는 공작을 보며 농농이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으그으그, 앙!]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앨빈을 데려오지 않은 걸 살짝 후회했다.
“무슨 생각하시는지 압니다, 아버지. 하지만 이 친구는 그 누구보다도 살기 감지에 특화된 존재이니까요.”
나는 농농이가 내게 붙은 암살자를 몇 차례 간파해냈으며, 이번에 브렉이 날 노렸을 때도 대활약을 펼쳤다고 간략히 설명했다.
“하긴, 이자가 인간의 아기가 아니라 노움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만···.”
진지한 표정으로 공작이 자신을 들여다보자, 농농이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까륵! 까륵!
지극히 천진난만한 웃음에, 공작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리도 사랑스러운 모습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방심하게 되는구나.”
흠흠. 저 딱딱한 아저씨가 저렇게 웃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걸.
농농이는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한껏 애교를 부렸고, 공작의 미소 또한 한층 짙어졌다.
‘아기와 동물에게는 공통점이 있지.’
최강의 권력자에게 본능적으로 환심을 사려 한다는 것.
나는 애교장인 같은 농농이를 보며 헛기침을 한 뒤, 말을 받았다.
“그것이 저 친구의 무기일 수도 있지요.”
“네 맞이 맞다. 아무리 뛰어난 살수라도 저런 아기 앞에선 당황하기 마련이겠지.”
목소리는 진지했지만, 시선은 농농이한테서 떼지 못한 채 공작이 대꾸했다.
‘저 모습만 보면 할아버지와 손주 사이라고 착각할 정도인데.’
어쨌거나.
공작은 나훔과 농농이가 24시간 붙어 있는 것을 허락했고.
그 외에도 다양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기존에 공작저에서 하기로 했던 행사나 모임은 전부 다 취소하기로 했으며.
-공작이 참석하기로 예정했던 행사 역시 불참의사를 전달하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조금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는 대처였지만.
언제 어디서 목숨이 노려질지 모르는 상황이니 모자란 것보단 지나친 편이 나았다.
‘미리 힌트 같은 것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목숨에 직결된 경우 도전과제를 통해 최소한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지만, 공작의 목숨이 노려지는 경우는 문제가 다르니 말이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원작에서 이런 유의 힌트를 제공했던 이능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왕도의 대가> 속 팰러스에게는 도전과제와 보상 시스템 대신 다른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미래를 점치는 자’라는 이능자 말이다.
‘팰러스가 그자를 발견하는 게 지금 시점에서 몇 달 후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원작 속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 팰러스가 점술 이능자를 찾는 데에 집중하진 못하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내가 선수를 치는 것도 가능할 터.
‘찾아보자.’
나는 그 길로 카렌을 만나 이능자 수색을 의뢰했고.
그로부터 며칠 뒤, 보름달이 뜨는 밤이 찾아왔다.
* * *
사방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새하얗고 동그란 달이 온 세상을 은은하게 비춘다.
나는 창 밖을 잠시 바라보다 앨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앨빈, 마음의 준비는 됐나?”
앨빈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비장함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4차원 주머니에 보관해뒀던 편지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서 꺼낸 종이 윗면에 적힌 글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이대륙의 행상인 소환권]
이제, 감춰져 있던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