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88화 (88/176)

아내가 필요하다

역시나.

이런 반응이 나오리라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질문이다.

“네 질문에 답해주려면···.”

그것을 공작 또한 느꼈는지 힘겨워하면서도 대답을 이어나갔다.

“아주 오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구나.”

그렇게 로건 드 레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로건 드 레핀은 본디 차남으로 작위를 이어받을 몸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무재로 이름을 날렸던 청년은 애초 작위나 재산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그런 로건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다름 아닌 전쟁터를 도는 것, 그리고···.

‘고대 던전을 탐험하고 오겠습니다.’

고대 영웅들의 전설에 등장하는 던전 탐험이었으니.

몇 년간 대륙을 떠돈 끝에 우연히 던전을 발견한 그는, 그 내부에서 마주친 기이한 마물의 독에 당해 의식을 잃은 채로 저택에 돌아왔다.

로건의 아버지는 온갖 명의들을 불러다가 아들의 간호를 지시했고, 그 덕분인지 로건은 몇 주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도련님!”

“도련님이 깨어나셨습니다!”

과거의 체력과 건강 또한 완전히 회복했지만.

충격적인 소식이 그를 기다렸다.

“둘째 도련님께서는 대를 이을 수 없는 몸이 되셨습니다.”

“이럴 수가···.”

그때 로건의 나이는 불과 20대 중반.

그의 아버지는 가슴 깊이 안타까워했지만, 로건은 생각보다 일찍 충격에서 벗어났다.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자신은 대를 이어야 할 의무도 명분도 없는 차남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으로 로건은 또다시 전쟁터를 전전했다.

그렇게 몇 년이 더 지났을 무렵, 또 다른 불행이 그에게 찾아왔다.

“아버지와··· 형이 죽었다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유스톤 3세의 명을 받들어 외교 사절로 다녀오기로 한 두 사람이, 갑작스레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생사를 달리했다는 것.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

두 사람의 장례를 힘겹게 치른 로건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벗어나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난관에 맞닥뜨려야 했다.

“공작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셔야 합니다.”

혼기를 한참 지났는데도 도무지 결혼하려고 들지 않는 그의 형을 보며, 로건의 아버지는 이렇게 으름장을 놓았었다.

‘네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지 않으면 작위를 물려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레핀 공작위를 물려받을 조건 하나, 결혼한 상태일 것. 둘, 자식이 하나 이상 있을 것.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건 조건이 차남의 발목을 붙잡을 줄은, 생전의 아버지도 상상 못했을 터였다.

‘젠장.’

굳이 따지자면 그런 연유에서였다.

···여자나 연애에는 관심도 없는 그가 ‘리아나’를 만나게 된 것은.

“서른이 넘은 귀족 사내가 짝을 찾을 방법은 단 하나뿐이지요.”

아버지의 후배였던 에드먼드 세비어 경은 내키지 않아하는 로건을 데리고 사교무도회장으로 끌고 갔다.

“···꼭 이래야만 하나.”

공작새처럼 한껏 꾸민 채 무도회장을 가득 채운 귀족 영식과 영애들을 바라보던 로건이 혀를 차자.

에드먼드 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안 그러면 작위가 날아갈 지경인데요.”

로건 또한 그것은 잘 알았다.

자신이 짝을 맞이해 결혼하고 자식을 낳기 전까진 작위를 정식으로 계승할 수 없으며.

답보 상태가 5년을 넘어가면 작위는 자동으로 레핀 가문의 방계인 재수 없는 사촌 놈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그 희대의 멍청이가 레핀 공작이라며 으스대는 꼴을 두고 보실 작정입니까?”

“···경은 은근 말을 직설적으로 한다니까.”

“지금 제 말투가 문제입니까.”

에드먼드 경은 로건을 끌고 무도회장 안을 열심히 돌았다.

남자답게 건장한 외모에 차기 공작이 될 로건에게 많은 아가씨들이 적극적으로 접근했으며.

“로건 공! 처음 뵙겠습니다.”

“로건 공, 괜찮으시면 저와 함께···.”

그 가운데 괜찮아 보이는 이가 있을 때마다 에드먼드 경이 사랑의 큐피드 노릇도 해보았지만.

“어머, 레핀 가문의 차남이시라고요?”

“그렇소.”

“저는 캐슬 가문의 장녀, 이리스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가문이군.”

“···그, 그러시군요. 그러면··· 로건 공은 어떤 취미가 있으신가요? 전 요즘 레이스 수예를 한창 배우는 중인데. 로건 공이 제일 좋아하시는 건-”

“전장에서 적의 머리를 날려버릴 때가 가장 기분 좋소.”

“···.”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던 아가씨들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려버렸고.

옆에서 지켜보던 에드먼드 경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로건 공자님!”

“···왜 그렇게 부르나.”

“제가 미칠 지경입니다···.”

로건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름 최선을 다해 내놓은 대답이었건만, 그를 마주하는 아가씨들은 대부분 학을 떼고 달아나버린다.

‘하긴, 율리아나마저도 날 거절했지 않은가.’

오랜 시간 함께 전장을 돌았던 친우이자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율리아나.

그녀는 로건의 구애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로건,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네가 나한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야.’

‘율리아나, 난 여자와 너만큼 가까워져본 적이 없다. 너만큼 편한 여자는 없어.’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그러네.’

그것은 단지 남녀간의 우정에 불과하며, 네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순간이 찾아올 거라고.

‘날 보면 심장이 두근거려? 막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그런 건 금시초문인데.’

‘그것 봐.’

언젠가는 네가 진짜 사랑하게 될 여인이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

웃으며 말하던 율리아나는 그의 구애를 거절한 바로 다음 날, 전장에서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죽어버렸고.

최후의 순간에 로건을 보며 이런 말을 남겼다.

‘로건, 그래도 그렇게 얘기해줘서 기뻤어.’

‘···더 말하지 마라, 피가···.’

‘딱 하나만 부탁해도 돼? 나중에 네가 혹시라도 딸을 낳으면···.’

율리아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이름을 붙여줄래?’

‘그러겠다.’

그러겠다고, 로건은 몇 번을 다짐한 후에야 그녀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몇 년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세자르’의 친모인 율리아나는 바로 이 율리아나의 이름을 붙여준 아이였다.

전쟁통에 고아가 된 소녀는 새로 받은 ‘율리아나’라는 이름을 몹시 좋아했더랬다.

‘각하의 친구셨다는 율리아나 님은 엄청 좋은 분이었을 것 같아요!’라며.

어쨌거나.

그 후로 몇 년간 그에게 여자란 존재는 논외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의 그 기이한 고집이 아니었다면, 아마 영영 혼자 살았을지도 몰랐을 터-

“···저, 잠시만요.”

“···?”

에드먼드 경이 술을 가지러 가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을 무렵.

로건은 제 한참 아래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제 드레스 자락을 밟으셔서.”

“아, 죄송합니다.”

그가 발을 떼자 눈앞의 여인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여인이라기엔 조금 어려 보이고, 소녀라기엔 조금 성숙해 보이는 존재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

꿀로 빚어낸 듯한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틀어올렸고, 티 한 점 없는 피부는 새하얀 도자기를 연상시켰다.

“이런 곳엔 처음 와보는데··· 다들 화려하고 아름답네요.”

10대 후반, 많이 잡아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어딘가 우수에 찬 푸른 눈동자로 무도회장을 둘러보았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다른 귀족 아가씨들과 달리 유난히 초라해 보이는 드레스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당신만큼 아름다운 분은 없습니다.”

“···?”

···한때 ‘냉혈 기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로건이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여인, 아니 리아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저,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저도 제 주제를 잘 아는 터라···.”

말을 흐리는 여인을 보며 로건은 율리아나가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날 보면 심장이 두근거려? 막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여인을 시야에 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그의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세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여태껏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렬한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저는 로건 드 레핀이라고 합니다.”

제게 한 발 다가오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에 여인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리아나예요. 리아나 모건.”

* * *

무도회장의 발코니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한참 얘기를 나눴다.

“무도회에 오는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자신이 지방 귀족의 딸이며, 어릴 때 부모를 잃은 뒤 친척 아주머니의 후견을 받아 컸다고 했다.

로건은 신기했다.

‘이렇게까지 말이 잘 통하는 여인이 있다니.’

율리아나와도 그랬지만, 그녀와는 오랜 시간 함께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처음 보는 소녀와 이렇게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그는 불쑥 이런 말을 내뱉어버렸다.

“···지금 제게 필요한 사람은 아이를 낳아줄 아내입니다.”

그 단도직입적인 말에 리아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렇군요. 아이를···.”

“하지만.”

로건은 저도 모르게 마음 속의 걱정거리를 입 밖에 내었다.

“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

“···.”

그 말에 잠시 눈이 동그래졌던 리아나는 이내 충격을 추스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건··· 비밀로 할게요.”

로건은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물론 막 얘기하고 다니시는 것보단 그 편이 더 고맙긴 하지만 말이죠.”

“그런데 왜··· 아내를 찾으시는 건가요?”

로건은 전대 공작이 내건 작위 계승 조건을 털어놓았다.

···완전한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사교계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아···.”

하지만 여기 선 소녀는 처음 듣는 기색이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 때문일까.

그녀와 함께 발코니에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로건은 딱딱하게 굳은 심장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다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지요.”

여인에게 관심도, 결혼할 마음도 없지만 오로지 작위를 이어받기 위해 짝을 찾는 개탄스러운 상황.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자 마음이 훨씬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저도···.”

그때, 리아나가 뭔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비밀 한 가지 털어놓아도 될까요?”

“편한 대로 하십시오.”

“저는.”

그녀는 잠시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다 힘겹게 말했다.

“배 속에 아이가 있어요.”

“···!”

이런 비밀에는 강심장이라 불리는 로건조차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아무 대꾸도 못하는데, 리아나의 말이 이어졌다.

“알레스 신께 맹세컨대, 부정으로 가진 아이는 아니예요. ···진심으로 사랑해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그이가 전쟁터에 가서 죽어버렸다.

그래서 자신은 남편도 없이 아이를 가진 몸이 되었고, 몇 달 후 태어날 이 아이는-.

“···유복자가 되는 것도 서러운데, 부정한 어미의 자식이라 손가락질당하겠죠.”

담담하게 말하는 리아나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저를 여태 돌봐주신 아주머니께도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분은 절 진심으로 아껴주시지만···.”

참고 참았던 눈물이 마침내 또르륵, 하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숙한 몸가짐을 강조하셨던 만큼,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면 절 집에서 쫓아내실 테니까요.”

“그렇···군요.”

로건은 여인의 눈빛이 유독 슬펐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를 향한 동정심에 가슴이 뭉클해진 순간.

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건 어떨까요?”

그리고 다음 순간.

쿵, 하고 로건의 심장이 떨어졌다.

‘이 느낌은···.’

그녀를 처음 봤을 때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허나 아까 그 느낌이 금세 가라앉았다면 지금은 좀 달랐다.

심장이 하도 세차게 뛰는 나머지 그 소리가 제 귀에 들릴 정도였으니까.

‘이런 것이··· 율리아나가 말했던 사랑일까.’

로건은 리아나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한 보석 같은 눈동자. 저에게 뭐라고 오물거리는 저 발간 입술.

···그녀의 모든 것을 그대로 삼켜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순간.

“···하면 어떨까요. 아, 이건 그냥 제안일 뿐이니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네? 정말요?”

리아나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래졌다.

토끼 같은 저런 표정마저 몹시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로건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고요.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

* * *

그렇게 로건은 리아나 모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조건은 단순했다.

‘로건 공은 저와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난 직후 공작위를 물려받으시는 거예요.’

‘그렇게 몇 년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가문이 탄탄하게 안정되고 나면, 저와 이혼해주시면 돼요. 아이도 호적에서 빼주시고요.’

‘많은 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그냥··· 아이와 단둘이 평범하게 살 수 있을 정도면 돼요.’

요컨대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계약결혼이었지만.

로건은 그녀의 제안이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일단 이 나라에서 결혼은 ‘알레스 신 앞에서 하는 영원의 맹세’인 만큼, 왕국법상으로 이혼은 불가능하며.

그렇게 맺어져 가문의 적에 한 번 올라왔던 자식을 호적에서 파기하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이런 그녀와 함께라면 로건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더욱이 대를 이을 수 없는 자신에게 아이와 작위를 안겨줄 수 있는 여인이 아닌가.

‘그야말로 완벽하군.’

모두의 축복 속에서 결혼이 치러졌고.

반 년 뒤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금발과 푸른 눈을 지닌, 리아나를 똑 닮은 아름다운 아기였다.

로건은 증조부의 이름을 따 아이에게 ‘팰러스’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리아나는 몹시 기뻐했다.

‘고생했소, 리아나.’

‘사랑해요, 여보.’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로건은 제 핏줄이 아닌 팰러스에게 아무런 애정을 느낄 수 없었고.

그저 최소한의 의무감으로 아이를 대했다.

행복하게 시작된 결혼 생활은 조금씩 삐걱대기 시작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의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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