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87화 (87/176)

질문 하나만

나는 우만이 보낸 편지를 들고 내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럼 공자님, 나가보겠습니다.”

제이콥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편지지를 펼쳐보았다.

기다란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적혀 있었다.

‘이 정도 정보를 구해올 걸 기대하고서 보낸 건 아니었는데.’

결과물은 상상 이상이었다.

일단 팰러스의 현재 세력이 어떻게 되며, 그의 조력자가 누구 누구인지가 빠짐없이 열거돼 있었으니까.

“···역시 오프러스 대공과 협력하고 있는 건가.”

우만의 말에 따르면 대공이 자신의 개인 병력을 팰러스를 위해 얼마든 동원할 의지가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살수들만 모아놨다는 암살자 부대 ‘그림자덫’ 중 일부를 지원해준다는 것이다.

‘암살자 부대라니···.’

원작에선 그런 뛰어난 살수 부대가 있다는 언급만 나올 뿐, 별다른 활약은 펼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와 돌이켜보니 팰러스가 수많은 왕족들을 암살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그림자덫 부대의 활약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 외에도 우만은 팰러스가 밝힌 앞으로의 계획들을 쭉 열거해놨다. 일단은 에스닐 안에서 활동하기보다는 국외에서 힘을 키우는데 집중하겠다고 한다.

몇 장에 이르는 보고를 읽으며 나는 우만을 한 편으로 끌어들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다 그 팔찌 덕분이군.’

그 팔찌가 아니었다면 우만과 협조하고 나서도 놈을 계속 의심했겠지만···.

만일 우만이 나를 음해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보고서를 작성했다면 팔찌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맨 마지막 문단에 이르렀을 때.

“···!”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팰러스가 내게 로건 드 레핀 공작의 암살을 지시했다.』

레핀 공작의··· 암살이라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음 문장을 읽어나갔다.

팰러스 왈, 레핀 공작은 여간해서는 외출하지 않는 인물이니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든 공작저에서 머무르며.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벽을 넘나드는’ 이능을 이용해 레핀 공작의 침실에 들어가 잠든 공작의 목숨을 단번에 취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맙소사.’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참았다.

우만을 한편으로 끌어들인 것이 이 정도로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몰랐으니까.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돋는다.

나는 우만의 마지막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답장을 기다리겠다.』

그러고 보면 최근 너무 해이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공작가의 적자로 인정받은 후, 모든 것이 계획했던 대로 술술 풀렸고 팰러스의 지지 세력이 한 줌으로 줄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미간을 좁혔다.

“오히려 제일 핵심적인 세력은, 국내가 아니라 국외에 있었다 이건가.”

브렉과 헬리오스 가문이 쓰러진 덕분에 팰러스의 기세 또한 꺾였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 오판이자 착각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편지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깃펜과 종이를 꺼냈다.

* * *

우만에게서 경고를 전해들은 바로 그날 저녁, 사건이 터졌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내 앞에서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는 총관 카얀.

“그래도 일이 터지기 전에 잡아내서 다행이군. 누가 발견한 건가?”

“조리장 벤이 발견했습니다.”

“벤이?”

의외라듯 묻자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전 마님이 그런 사건을 일으시키고 나가신 후, 공작가에 오랫동안 충성했던 사용인 몇 명을 정해 감시 역할을 맡겼습니다.”

그중 누군가는 공작의 집무실을, 누구는 공작이 평소 애용하는 물건을, 누구는 평소 쓰는 식기를 살펴보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평소처럼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던 조리장 벤은, 누군가가 공작의 전용 식기에 독을 묻혀놓은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특유의 기묘한 향이 났다고 합니다. 조리장 벤은 요리만 잘하는 게 아니라 각종 독초에도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라서요.”

“···십년 감수한 셈이군.”

벤을 불러다 따로 포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총관에게 물었다.

“범인으로 짐작가는 인물은 있나?”

“최근에 새로 들어온 사용인을 중심으로 취조하고 있습니다만···.”

총관의 얼굴이 흐려졌다.

누가 범인인지 밝히기 쉽지 않다, 이 말이겠지.

“범인을 잡는 것보다도 그 배후를 밝히는 것, 아니···.”

나는 총관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 사용인과 배후 세력이 어떤 식으로 연락을 주고받는지 알아내는 데 집중하게. 그리고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방법도.”

총관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조하도록.”

총관은 두 눈을 의미심장하게 빛내며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공작의 독살 미수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나는 총관과 공작저 내 경비 강화 방책을 논의했다.

“특히 각하의 집무실과 침실 주변 경호를 강화해야 하네.”

“···사병대 인원 중 실력이 뛰어나면서도 충성심을 의심할 수 없는 이들을 추려보겠습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방안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고, 총관은 다시금 죄송하다는 말을 끝으로 내 집무실을 나갔다.

원래는 주말만 보내고 아카데미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며칠간 더 묵어야겠군.’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생각을 천천히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나타났다.

[도전과제 ‘금광 거부’ 달성! - 금광을 발견했습니다.]

[보상 ‘이대륙의 행상인 소환권’을 수령했습니다.]

금광을 발견한 게 언제인데 이제야 보상을 주는 거야.

그런데··· 보상이 뭐라고?

나는 잠시 내 눈을 의심했지만,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메시지는 변함이 없었다.

‘이대륙의 행상인 소환권이라고?’

그 순간 눈앞에 환한 빛이 일었고.

그것이 사라지고 나자 내 앞의 책상에 초대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대륙의 행상인 소환권’(가격 : ????, 잔여 사용횟수 1회)

- 설명 : ‘이대륙의 행상인’을 소환권 사용자의 눈앞에 불러다준다. 행상인에게서 상품을 구매하거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비고 :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사용 가능하며, 최대 소환 시간은 3시간.』

이대륙의 행상인.

모 게임에 랜덤으로 등장하는 NPC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이렇게 보상으로 준 걸 보면 행상인에게서 뭔가 대단한 아이템을 살 수 있을 듯한데···.

나는 설명의 어느 구절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상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그게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귀중한 정보일 것임은 확실하다.

게다가.

‘우리에겐 이대륙 출신의 역관이 있지 않은가.’

앨빈이 이제는 제법 자유자재로 빙의하는 통역관 하라라.

하라라 역시 이대륙 출신이라고 했으니, 행상인에게서 생각 외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어느새 어둑해진 풍경 가운데서 반달이 홀로 빛나는 것이 보인다.

“보름달이 뜨려면 일주일은 기다려야겠군.”

그러고 보니 도전과제가 갱신되었겠는데.

내친 김에 목록을 확인해봤다.

-우만을 가신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나요?

-국왕이 내준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나요?

위의 이 두 가지는 아직 미달성이고.

그 아래 세 개가 새로 생겨났다.

-레핀 공작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나요?

-강물에 빠져 죽을 뻔했나요?

-요새 아래의 비밀 통로를 발견했나요?

맨 밑의 두 가지는 속단하긴 이르지만,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을 가리키는 과제가 아닌가 싶다.

‘트리니다드 수도사들이 동부지대의 요새를 점거하여 항쟁한 사건 말이지.’

문제의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곳인데, 바로 앞에 커다란 강을 두고 있어 적군이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다.

‘강물에 빠져 죽을 뻔’한다는 것은 요새 앞의 강을 가리키는 얘기가 아닐까.

“···결국은 이 사건에서 발을 뺄 수 없다는 건가.”

무엇보다 그 배후에 팰러스가 있으니만큼 호락호락하게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그러나 지금 시급한 건 그쪽이 아니다.

‘레핀 공작 암살 시도!’

공작의 식기에 독을 묻혀놓은 것을 잡아냈는데도 또다시 이런 과제가 뜨는 것을 보면.

팰러스는 어떻게든 암살을 감행할 거라는 얘기가 된다.

‘우만이 그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 해도.’

그에겐 ‘그림자덫’이라는 전문 살수 집단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군.”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 * *

공작은 내가 온 이유를 이미 짐작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카얀에게서 대략의 보고는 들었다.”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나는 어떤 식으로 저택 내 경비를 강화하기로 했는지, 간략하게 요약해 보고했다.

“그래. 안 그래도 리아나를 내보내며 어느 정도 대비했던 터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나 보군.”

“아랫사람들을 단속하기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지요.”

리아나 부인이 이곳을 나갈 때.

그녀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사용인들 역시 그녀를 따라가거나 직장을 옮겼다.

그 탓에 공작저는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한 번에 신규 인원을 대거 채용해야 했던 것이다.

“제아무리 철저하게 신원을 확인해가며 사람을 받는다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헌데 카얀이 말하기로는···.”

공작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세자르 네가 내 처소 주변에 경호원을 상시 대기시켜놓으라고 했다고 들었는데.”

“안 그래도 그 부분에 관해 아버지께 말씀드릴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팰러스 주변에 첩자를 심어놨으며, 그가 전한 내용에 따르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프러스 대공과의 관계가 몹시 긴밀한 것 같더군요.”

“긴밀하다고?”

“오프러스 대공가의 비밀병기라 불리는 ‘그림자덫’을 아십니까?”

내 말에 레핀 공작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냐는 듯한 반응이다.

‘소수의 권력자들만이 알고 있는 극비사항이라고 했던가.’

···물론 나는 원작을 읽어서, 그리고 우만의 보고를 받아서 알게 된 내용이긴 하지만 말이다.

“대공이 그림자덫 요원 몇 명을 팰러스에게 붙여주었다 하더군요.”

“그렇단 말은···.”

“아버지께서 짐작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나는 표정이 어두워진 레핀 공작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팰러스가··· 아버지의 목숨을 노리는 듯합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이긴 하다.

지금 팰러스의 입장에서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은 나도, 테오 2세도 아닌···.

‘레핀 공작이니까.’

오히려 테오 2세가 먼저 죽게 된다면 왕위가 공작에게 돌아가니 상황이 곤란해진다.

하지만 공작이 먼저 죽는다면?

···이 나라의 단 두 개뿐인 공작위 중 하나인 ‘레핀 공작’이란 타이틀을 팰러스가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그래 봤자 사생아 출신의 차남은 나중에 생각해도 무방하다 여기는 거겠지.’

그 후 국내로 유유히 돌아와 잃어버린 실권을 되찾고.

수도 귀족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게 되면-

그때 가서 테오 2세를 처리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렇군.”

레핀 공작은 침통한 얼굴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미 부인에 의해 한 차례 목숨이 노려진 바, 자식이 제 목숨을 노린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겠지만.

‘지난 시간이 씁쓸한 것만큼은 어쩔 수 없겠지.’

나는 턱을 문지르며 말을 아끼는 레핀 공작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공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만, 이렇게 확인 사살을 당하니 마음이 좋지는 않구나.”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무려는 공작을 나는 조심스레 불렀다.

“아버지.”

“···.”

“무례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외람된 질문을 하나 해도 괜찮겠습니까?”

레핀 공작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돌아보았다.

···절대로 시기적절한 질문이 아님은 잘 알고 있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고?”

“부디 허가해주십시오. 설령 질문에 마음이 상하셔서 벌을 내리신다 해도, 대답을 들은 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벌을 받을 것을 예상할 만한 질문을 어찌 던지겠다고 하는 것이냐.”

“혹여 그러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저는, 아니 ‘저희’는···.”

나와 공작 두 사람을 아우르는 ‘우리’라는 표현을 쓰자, 공작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서로의 진실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레핀 공작은 마침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인 나는 그간 차마 묻지 못했던, 그러나 익히 짐작했던 질문을 던졌다.

“저의 형, 아니 팰러스 레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친자식이 맞습니까?

그 순간.

레핀 공작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