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메이트
이능자 부대.
내게 있는 다섯 명의 가신 외에도 또 다른 이능자를 찾아내보겠다는 야심찬 도전은,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을 것으로 드러났다.
‘정세가 정세인지라, 최근 알레스 교단은 무척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총관의 말마따나 교단이 여간해서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으려는 것도 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섣불리 한쪽과 손을 잡았다가 된통 당하는 꼴을 겪고 싶지 않을 테니 말이다.
총관뿐 아니라 아버지 레핀 공작 또한 같은 의견이었다.
‘그들이 섣불리 그런 중요한 정보를 내어주려 하지 않을 거다.’
왕권이 탄탄한 덕분에 상대적으로 호시절이었던 몇 년 전만 해도 난이도가 훨씬 쉬웠다. 공작 부인이 우만 남매의 신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고.
···어쨌거나 지금은 그게 안 된다니, 지금으로선 좀 더 지켜봐야 할 수밖에.
“일단은 우리 길드 선에서 알아볼 수 있는 걸 알아볼게.”
“부탁하지, 카렌.”
카렌이 최소한의 정보를 입수하고 나면 그 내용에 따라 접근법을 달리하기로 얘기를 마쳤다.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덕분에 어제보다 훨씬 안색이 밝아진 가신들을 보며 말했다.
“돈이 생겼으면 써봐야 하지 않겠어?”
나는 그들을 데리고 번화가로 향했다.
물론 얼굴이 너무 팔린 만큼 만일의 일에 대비하기 위해 후드를 뒤집어쓰고 갔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위장을-”
“말도 꺼내지 마, 카렌.”
인상을 구기며 말하자 배시시 웃으며 딴청을 부리는 카렌.
어쨌거나.
간만에 방문한 번화가는 여전히 활기찼다.
“호외요 호외! 알레스 교단 산하의 중부 신전에서 성물이 발견돼···.”
“2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수도중앙장인길드에서 회원을 모집합니다!”
“하나만 맛보세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여전히 시끌벅적한 광경을 기분 좋게 둘러보는데, 롯과 형제들이 유난히 들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들을 보며 씩 웃다가 가신들을 향해 말했다.
“각자 뭘 고를지는 생각해왔나?”
“뭘 고르다니요?”
앨빈의 질문에 발닉이 껄껄 웃으며 대신 답했다.
“도련님은 전부터 늘 통이 크셨지요. 오늘도 원하는 걸로 골라오라, 이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든 좋으니 앞으로 3시간 안에 원하는 물건을 사와라.”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대금은 내 앞으로 청구하라고 하자, 앨빈과 롯, 형제들의 얼굴이 얼떨떨해졌다.
“3시간뿐이다. 그 안으로 고르지 못하면 끝이야.”
그 말에 가신들이 앞다투어 발걸음을 빨리했다. 저마다 생각해놓은 물건이 있는지 제각기 여러 방향으로 흩어진다.
디터와 발닉도 금방 오겠다며 저쪽으로 멀어졌고.
이제 내 곁에 남은 것은 카렌과 리암뿐이었는데.
“너흰 안 골라?”
“난 이미 많이 받았어.”
“나도.”
뭘 받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럼 차나 마시러 갈까.”
···물론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마음은 없다.
이 둘이 이렇게 나올 것을 대비해 발닉에게 신신당부해놨으니까.
‘이 발닉이 아주 좋은 선물을 골라오겠습니다!’
여튼 그렇게 셋이서 어느 찻집에 들어가 즐거운 한때를 보냈고.
세 시간이 지나자 흩어졌던 가신들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들 뭘 사왔나 궁금한데.’
제일 먼저 온 것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커다란 자루를 낑낑 들고, 아니 끌고 온 앨빈.
왠지 저것만 봐도 자루의 내용물을 알 것 같은데···.
“번화가라 그런지, 서점에 고서들이 잔뜩 있더라고요!”
역시나.
앨빈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온갖 책을 사왔으며.
“근접전에 쓰기 좋을 법한 무구를 갖추고 왔습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풀플레이트 아머를 맞추고 왔다는 디터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잘했네. 발닉은?”
“저는 그게, 은행에 잠깐.”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은데?”
“음, 그것이···.”
발닉은 조금 망설이다가 순순히 털어놓았다.
여태 받은 봉급을 한푼도 빠짐없이 은행에 저축한 것은 물론이요, 땅값이 오를 만한 곳을 수소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토지 매매를 마치고 왔다고 말이지.
‘···발닉이야말로 알부자가 될 것 같군.’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롯과 형제들이 해맑게 웃으며 제가 골라온 것을 꺼내 보였다.
‘전부 다 무기류인가.’
나만은 마갑을, 나훔은 제 키만 한 창을, 나답은 석궁을 사왔다.
롯은 내가 본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는데, 그녀의 손에는 상당히 길어 보이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이런 형태의 검을 여기서 팔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이런 형태의 검이라니?”
그녀가 웃으며 검집에서 검을 꺼내 보였다. 찌르기용의 뾰족한 스몰소드나 양면에 날이 서 있는 롱소드와 달리, 이 검은 한쪽 면에만 날이 섰다.
‘···검이 아니라 도에 가까운 형태잖아.’
내 눈이 커진 것을 보고 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전 어린 시절부터 이런 도를 잡아온 덕분에 이쪽이 훨씬 편하거든요.”
“잘됐군.”
가신들은 스스로 고른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
카렌과 리암 역시 발닉이 대신 사온 선물에 몹시 기뻐했는데.
“이런 귀한 물건을 받다니···.”
페킹튼 가문의 문장을 금장으로 박아넣은 방패를 받은 리암은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누가 언제 드레스를 달랬나.”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과는 달리, 카렌은 상자 속에 든 군청색 드레스를 황홀한 듯 자꾸 들여다보았다.
‘수도 최고의 재봉사에게 맡겨서 만든 최신 유행의 드레스라고 했던가.’
흘깃 그쪽을 보자, 발닉이 씩 웃으며 눈짓해 보였다. ···은근 센스가 좋단 말이지.
그렇게 기분 좋은 외출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가자, 나를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누군가 공자님께 전서구를 보냈습니다.”
···우만이 보낸 전서구였다.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 * *
그로부터 다시 며칠 전.
에스닐 왕국과 오프러스 공국 사이의 국경지대에 자리한 어느 하급귀족의 저택.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만 우만에게는 감회가 남다른 장소였다.
‘팰러스 님을 이곳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빈터 가문은 2왕자 에르곤의 죽음을 사주한 것으로 몰려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다.
빈터 남작부부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고, 당시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들에 불과했던 빈터 남매만이라도 피신시키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이 아이들은 신의 선물을 타고난 아이들이 아니오.’
‘그래요. 알레스신께서 이 아이들을 가호해주실 거예요.’
신실한 신앙심의 소유자였던 부부는 오랜 친우에게 남매를 맡겼다. 레온과 필리아는 어릴 때부터 종종 보며 ‘아저씨’라고 불렀던 젊은 귀족을 따라 그의 집으로 왔으나.
···따지고 보면 그것이 실책이었다.
‘레온, 필리아. 이리와보렴.’
‘···이분들은 누구신가요?’
아저씨는 남매를 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희들을 세상의 풍파로부터 지켜주실 분들이시다.’
남매 앞에 선 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귀부인과 자신들 또래로 보이는 미소년.
‘레핀 공작부인과 그 자제이신 팰러스 공자님이시란다.’
우물쭈물하던 두 아이에게 팰러스가 먼저 다가왔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불안했지?’
‘···공자님.’
‘공자님은 무슨. 그냥 팰러스 님이라고 부르거라.’
아름다운 얼굴로 눈부신 미소를 짓는 소년의 모습에, 남매는 한순간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를 떠올렸다.
‘앞으론 나와 어머니가 너희를 지켜줄 테니 걱정 말아.’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으로 따스하게 빛나는 눈동자, 부드럽고도 달콤한 목소리.
어린 남매는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리고 말았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던 우만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팰러스 님이, 그 팰러스 님이 제게 그러실 리가 없는데.
그의 이성은 세자르의 논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맞다고 경종을 울렸으나. 그의 감성은 이성이 내린 결론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렇다면 내가 팰러스 님을 따라온 그 세월들은 대체 무엇이 되는가.’
물론 곁에서 오랫동안 섬겨온 바로 팰러스는 처음 봤던 모습대로의 선인은 절대 아니었다.
선인은커녕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희생시킬 수 있는 비정한 지도자에 가까웠지만.
‘허나 우만. 너는 다른 그 누구와도 다르다.’
우만 자신만큼은 다르다고, 팰러스는 누누이 되풀이했다.
‘너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름을 내려준 가신이 아닌가. 다른 이들과 달리, 너는 그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다.’
대체 불가능한 가신.
팰러스가 자신을 그렇게 여기는 이유가 대체로는 ‘벽을 넘나드는’ 이능과 검술 실력, 그리고 일 처리 능력 때문이라고 보았지만.
우만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생각이 남아 있었다.
‘나와 팰러스 님이 함께해온 시간에서 생겨난 신뢰.’
그들 사이에 일말의 유대감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을 지금 이 순간에도 지워내지 못하는 가운데.
우만 혼자 대기하고 있던 응접실에 하인 하나가 들어왔다.
“우만 님. 팰러스 공자님이 부르십니다.”
하인은 우만을 팰러스가 있다는 방으로 안내했다.
잔뜩 긴장한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우만을 반겼다.
“오랜만이구나, 우만.”
“···오랜만에 뵙습니다, 팰러스 님.”
미의 화신을 연상케 하는 외모의 소유자.
리아나 부인을 닮은 아름다운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마르셨구나.’
팰러스는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냉정하지만 자신에게는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낸다. 그 모습에 우만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려는 순간.
무언가 기이한 감각이 느껴졌다.
‘···!’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다가, 무형의 벽 앞에서 사그라든 느낌이랄까.
그와 동시에 제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정말로··· 팰러스 님이 이능을 사용하신 건가.’
그 탓에 우만이 무심코 멈춰선 순간.
“왜 그러고 서 있나, 우만. 간만에 봐서 어색하기라도 하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우만은 내색하지 않으며 팰러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프러스 공국에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뭐, 이제는 익숙한 곳이니. 대공 각하께서는···.”
팰러스는 공국에서 어떠한 접대를 받았는지. 대공과는 어떠한 대화를 나눴는지 담담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나 하나가 귀중하기 짝이 없는 정보를, 우만은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겨놓았다. 그의 손 끝이 점차 미세하게 떨려왔다.
“우만, 모든 계획에는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변수···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내 사랑하는 아우는 정석적인 수에는 능통한 것 같으나.”
어딘가 먼 곳을 향하는 팰러스의 시선을 보며 우만은 몸을 움찔했다.
“상대에게도 예상 외의 수가 숨겨진 것까진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말이지.”
우만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태연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린다고 가려지지는 않는 법이다. 놈은 브렉이라는 체스말을 하나 잡았다고 득의만만해하겠지만···.”
체스말.
자신들과 몇 년을 동고동락했던 학우를 너무도 자연스레 ‘말’에 비유하는 팰러스를 보며 우만은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생각해보면 늘 그러지 않았던가.’
“너나 타릭과는 달리, 브렉은 졸이나 다를 바 없는 폰이었으니 상관없다. 폰 하나를 내어주고···.”
팰러스의 한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비숍을 그들 사이에 밀어넣는다면 그 편이 훨씬 이득이 아니겠나?”
비숍. 장기로 치면 상象과 비슷한 포지션이며, 대각선으로 거리 제한 없이 움직이며 상대말을 잡는 막강한 말.
우만은 바싹 마른 입안으로 말을 받았다.
“비숍···이라 하심은.”
“졸업 전만 해도 거사를 천천히 진행하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우만.”
그의 말을 들으며 우만은 깨달았다.
“경기에서 중요한 건 내 말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먼저 체크메이트를 하느냐. ···즉, 상대의 왕을 누가 더 먼저 잡느냐가 우선이지.”
···세자르가 제 형을 너무도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을.
팰러스가 고개를 들더니 미소 띤 얼굴로 우만과 눈을 마주쳤다.
“우만, 네게 부탁이 하나 있단다.”
심장이 벌렁벌렁거렸지만 우만은 태연을 가장하며 답했다.
“뭐든 말씀하시지요, 팰러스 님.”
“네가···.”
팰러스의 목소리가 유난히 가라앉은 그 순간.
아까의 그 기이한 힘이 다시금 우만을 향해 손을 뻗쳐왔다.
‘이능을 쓰다니!’
···훨씬 더 강대하게 휘몰아치며, 그를 사방에서 짓누르듯 덤벼들었고.
제 목에 걸린 목걸이가 그 힘을 밀어내는 것이 느껴졌지만-
‘욱···.’
우만은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간신히 삼켜야 했다.
이능을 거부한 일종의 후유증 같은 걸까.
배 속이 뒤집어지는 동시에 머리에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간신히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팰러스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내 아비, 레핀 드 로건 공작을··· 죽여줄 수 있겠느냐?”
우만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