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놈될
간만의 주말.
평소 조용하던 레핀 공작저는 오늘 따라 활기가 넘쳤다.
“자! 간만에 공자님이 오셨으니 솜씨 발휘 좀 해보자!”
조리장 벤을 비롯해 조리부 사용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공자님 방의 커튼까지 다 바꿔둔 것 확실하지?”
“그럼요, 그뿐 아니라 농농 님 쓰실 새 침대도 준비해놨는데···.”
세자르가 방문할 때마다 방을 새로이 치장하는 여자 사용인들 또한 들뜨기는 마찬가지였다.
둘째 공자의 방문을 제 일처럼 기뻐하는 사용인들을 보며 총관 카얀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세자르 도련님이 어느새 이렇게나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신 걸까.’
분명 이 저택에 올 때만 해도 모두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소년이다.
리아나 공작 부인이 실권을 쥐고 있을 당시에는 밤낮으로 학대당한다는 소문이 돌았음에도, 모두가 쉬쉬하며 모른 척했던 그 가련한 아이가.
‘이 레핀 가문의 적자로 인정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런 총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옆에 서 있던 그의 아랫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금광이 터지다니, 이렇게 놀라운 일이 있을까요.”
그렇다.
공작저가 둘째 공자의 귀가에 평소보다 한층 더 떠들썩한 것은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 때문이었으니.
‘도련님이 황무지를 사놓으셨단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땐 별난 취미가 있으시구나 했지만.’
임리 자작의 소유였던 필로스 지대는 골칫덩어리 땅으로 유명했다.
지대가 어마어마하게 넓지만 지력이 쇠약한 탓에 아무것도 경작할 수가 없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늑대나 하이에나 따위의 사나운 짐승이 나타나 인근에 피해를 입혔다.
‘제아무리 값싸게 사들였다 한들 그런 땅을 대체 어디에 쓰시려고.’
그저 어린 청년의 치기라고만 생각했던 그 선택이 사실은 앞날을 내다본 신의 한 수였다니.
총관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그 끝이 어디일지 알 수 없어 두려울 정도가 아닌가.’
그런 생각에 가만히 잠겨 있는데, 그의 아랫사람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과연 세자르 공자님이 아니십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 공자님이라면 왠지 뭐든 다 대단히 해내실 것 같은 막연한 믿음이 있다고나 할까요.”
그는 머쓱한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저희 같은 아랫사람들 사이에서 세자르 공자님은 성공 신화의 산증인으로 불리시거든요.”
“···산증인이라.”
과연 그렇게 여겨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개 사생아, 그것도 사창가에서 데려왔다는 소문이 파다한 소년이 모든 방해와 질시를 무릅쓰고-
‘모두의 위에 우뚝 서게 되었으니!’
자신이 내린 결론에 문득 오싹 하고 소름이 돋은 순간.
“세자르 도련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마침내.
기다렸던 주인공이 나타났다.
* * *
근 한 달 만에 돌아온 공작저는 그 사이 또 업그레이드된 느낌이었다.
귀하디귀한 향유를 곁들여 뜨끈하게 준비해놓은 목욕 물이나, 일국의 제후도 울고 갈 진귀한 요리들은 물론이고.
‘방은 또 언제 이렇게 바꿔놨대?’
지난번 왔을 때도 이미 호화찬란하던 내 방은 이번에는 더더욱 화려해졌다. 침대 시트에서 어찌나 빛이 나는지 발을 올려놓기 미안할 정도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이번 기회를 빌어 나와 함께온 가신들 또한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이렇게 황송한 대접이라니···.”
“목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제 머리를 걸고 세자르 님을 지키겠습니다!”
“저는 심장을 뽑아 바치겠나이다!”
“···그런 건 제발 바치지 마라.”
진귀한 요리들을 눈앞에 두고 감탄을 금치 못하던 롯과 자꾸만 무서운 걸 걸겠다고 맹세하는 그녀의 형제들은 물론이고.
[앙, 앙옹앙! 으그그···.]
“매번 훌륭했지만 이번엔 한층 더 호화로운 대접이구나!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 라고 하시는데요.”
꽃처럼 어여쁜 여자 사용인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농농이와 그 말을 해석하는 앨빈.
“아, 나 그냥 여기서 살고 싶다. 너무 좋네.”
“헉, 바, 방금 들으셨습니까 도련님? 카렌 님이 여기 살고 싶으시다고···.”
“주, 주군···! 이, 이건 아무래도 그런 의미 맞죠, 발닉 아저씨?”
“내가 생각하기에도···.”
깃털침대에 드러누워 카렌이 뒹굴거리며 내뱉은 말에, 이상할 정도로 과민반응하는 발닉과 디터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리암 페킹튼, 세자르 공자님의 명을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기분 탓인가.
임무를 맡기기 전에 비해 열 배는 더 당당해 보이는 리암이 내 앞에 와 섰다.
“고생많았다, 리암.”
리암의 얼굴에 만족감이 번졌다.
‘그럴 만도 하지.’
이번 금광 조사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물론 금광이 발견될 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 매장량이 내가 예상한 것을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보상으로 받은 지도 덕분인가.’
원작에서는 금광이 발견되었다고만 나오지, 그 매장량에 대해서는 뚜렷한 언급이 없었다.
‘임리 자작이 팰러스의 꼬임에 넘어가 금광을 거의 거저 내놓았더랬지.’
하지만 아무리 임리 자작이 수완이 부족하고 근시안적인 인물이라고는 해도, 이처럼 어마어마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금광을 발견했다면 그리 쉽게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목숨을 거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지키려고 했겠지.
‘덕분에 이 나라의 부자 순위가 바뀌게 되었군.’
레핀 가문, 노바스 가문 등 오랜 전통의 고위 귀족들을 제외하면 라페스 자작을 비롯한 대형 상단주들이 제일 많은 재산을 보유했다면.
···이제는 이 세자르 레핀이 왕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 못하며 리암에게 말했다.
“네가 충실하게 조사해준 덕분에 생각 이상의 수확을 얻었다.”
그 말에 리암은 고개를 저었다.
“나야 뭐 이 지도대로 조사한 것뿐인데. 골치 아픈 일들은 저기 있는 디터 경과 발닉 경이 다 처리해줬고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리암 님. 저는 그저 늑대 몇 마리 몰아낸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는데요.”
“맞습니다. 이번 일을 지휘하신 건 어디까지나 리암 님이신데요.”
서로에게 공을 돌리는 가신들이라니, 주군된 자로서 참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총관 카얀 역시 동감인 듯했다.
“훌륭한 가신들을 두셨군요, 세자르 도련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카얀.”
가신들의 공을 치하하는 동시에 좋은 소식을 축하하는 자리에 총관을 오게 한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였다.
“앞으로 금광의 정비와 관리는 발닉과 앨빈에게 맡기겠다.”
두 사람의 얼굴이 뿌듯함으로 빛났다.
‘발닉은 상단과의 거래에 빠삭하고, 앨빈은 숫자 계산에 능하니까.’
게다가 이런 큰돈이 오가는 일엔 두 사람을 배치해 서로 감시하도록 하는 것이 낫다.
상상 가능한 이상으로 큰돈을 만지면 사람의 정신이 마비되는 때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이에 관해 카얀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뭐든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나는 이제야 본론을 꺼냈다.
“금광에서 나온 수익을 운용해 내 개인 소유의 사병대를 신설하고 싶다.”
“···!”
그 말에 응접실 안이 조용해졌다.
지금도 레핀 가문 사병대는 이미 국내 귀족 가문 사이에선 최대 병력을 자랑하는데, 사병을 키우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가문의 이름’ 아래 있는 병력이 아니다. 언제든 내 명령에 따르고, 나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세자르 레핀’의 부대가 필요하니까.
‘애초 금광을 노리고 땅을 산 것부터가 사병을 키우기 위함이었지.’
그런 가운데 내 개인 소유의 사병대를 신설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정치적 야욕이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
···허나 지나친 야욕과 덩치 불리기는 필연적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지금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그 말에 총관 카얀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아, 물론 아버지께는 미리 말씀드려 허락을 구했다.”
“···그렇군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총관.
이 공작저를 몇십 년간 빈틈없이 운영해온 카얀의 솜씨라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을 처리해주리라.
“그렇다면 도련님께서는 어떤 형태의 부대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나는 가신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
“일단은 기사단을 하나 만들고 싶군. 아, 이것만큼은 내 이름이 아니라 레핀 가문의 이름을 달고서 말이야.”
물론 실질적 지휘자는 내가 되겠지만.
“기사단··· 말씀이십니까?”
카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기사단이야말로 돈 잡아먹는 하마나 다를 바 없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홍보효과가 어마어마하지.’
왕국 내에 제대로 된 기사단이 몇 개 없다 보니 입단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 하급귀족이나 부유한 평민들은 자제들을 어떻게든 기사단에 입단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 게 보통이니까.
그런데 이 혼란한 정국에서 레핀 가문이 새로운 기사단을 만든다?
이는 레핀 가문의 부흥을 보여주기에 최적일 뿐 아니라.
‘정세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레핀 가문이 되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갖겠지.’
나는 깜짝 발표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리암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리암.”
“어, 어?”
“기사단의 관리를 네게 맡기고 싶은데.”
“···?”
리암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 말을 영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마음 같아서는 널 기사단장 자리에 앉히고 싶지만,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아직은 무리이니까 말이야.”
“···어, 그게 그럼···.”
“지금은 기사단의 총괄자로 경험을 쌓다가, 향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전장에 나가 어느 정도 공을 세우고 나면.”
여전히 얼이 빠져 있는 리암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를 기사단장으로 추대할 생각이라는 얘기다.”
“···!”
리암은 놀란 얼굴로 아무 말도 못했다. 이내 얼굴이 붉어지더니 눈가가 살짝 충혈된 채로 입을 열었지만.
“아, 으, 어···.”
“···감동한 건 잘 알겠으니 굳이 말 안 해도 돼, 리암.”
리암은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워낙 얼굴에 반응이 투명하게 나타나는 놈이니.’
나는 다시 카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사단이 외부에 보여주기용이라면, 나머지 부대들은 그 존재를 숨길 생각이야.”
“나머지 부대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내 계획은 이렇다.
일단은 나만, 나훔, 나답이 육성과 통솔을 맡는 기마부대.
정규군과 달리 적의 배후나 측면에서 기습이나 교란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가 될 거다.
“이 나만에게 믿고 맡겨주시지요! 제 목숨을 다해 수행하겠나이다!”
“제 영혼을 걸고 명을 받들겠습니다!”
“저는 피와 살과 육체를 걸겠나이다!”
아니, 그런 거 걸지 말라니까···.
나만, 나훔, 나답 형제는 가슴팍을 두드리며 충성을 다짐했다.
카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들이 직접 통솔하실 부대라면 큰 어려움은 없겠군요. 다른 부대는 어떤 걸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그다음은 밀정대가 필요해. 다만 밀정대는···.”
나는 카렌과 눈을 마주쳤다.
“카렌, 네게 전권을 일임할 생각이다.”
“밀정대라니, 진심이야?”
밀정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왕도의 대가> 후반부는 정보의 유무로 한순간에 목숨이 오가는 치열한 정치 싸움의 연속이다.
그런 상황에서 카렌이 전문 밀정을 육성하여 ‘밀정대’를 따로 만든다면, 그것만큼 큰 메리트가 없을 거다.
“그래. 하지만 밀정대는 일반인 가운데서 뽑지 않을 거야.”
유난히 생각이 많아 보이는 카렌과 눈을 마주쳤다.
그것만으로도 카렌은 내 말뜻을 충분히 알아차린 듯했다.
‘너희 길드원들 중 최고의 정보원들을 추려내 구성하고 싶다.’
아무리 검은손 길드가 국내 최대의 길드라고는 해도, 도적 길드라는 뿌리에서 출발한 이상 어디까지나 ‘불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니까.
다만 어디까지나 선택은 그녀의 자유다.
···지금 상태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레핀 가문의 엄연한 보호를 받는 밀정대로 재편성을 할 것인지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카얀을 내보냈고.
나머지 세 사람, 디터와 롯, 농농이를 돌아보았다.
며칠 전 트리니다드 수도원에 갔다가 엿들은 내용 덕분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 참이었으니까.
셋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세 사람의 주도 아래 특수 부대를 만들어볼까 하는데.”
“특수부대라 하심은?”
롯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원작의 팰러스가 그러했듯, 알레스 정교단에서 관리하는 이능자 목록을 손에 넣는다면-
“이능자로 이뤄진 부대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
세 사람, 아니 두 사람과 노움의 눈이 튀어나올 듯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