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을 잃은 어느 날
우리의 목적지인 트리니다드 수도원은 말을 타고 약 하루 정도 가야 하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말을 달리는 내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렌이 은근 내 눈치를 살폈다.
“아까부터 왜 이리 저기압이야, 세자르. 설마 기분 상한 건 아니지?”
“아니, 그럴 리 있나.”
···솔직히 말하면 아주 조오금 기분이 뭣 같은 건 있었지만.
나는 그런 자신을 애써 달랬다.
‘카렌이 순전한 호의를 베푸는 셈이니 감사해야 한다.’
이번 일은 나의 가신으로서가 아니라 검은손 길드의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니 말이다.
···라고 생각해봐도 개운치 못한 뒷맛은 어쩔 수 없었지만.
“화났어? 삐졌어?”
“아니라니까.”
“세자르 공자님, 아니 생드니 부인. 제발 노여움을 풀어주세요.”
참자. 참자.
참을인 자를 세 번 새겨야 어른이 된다고 하지 않았··· 아니 그런 말은 없었던가.
슥 옆을 돌아보자 카렌이 눈을 반달처럼 휘며 웃었다.
“아름다우세요, 부인.”
“···카아렌.”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냐 하면.
‘위장을 해야 해.’
결연한 눈빛으로 카렌이 가져온 것은 본격적인 분장 도구였으니.
‘···이게 대체 무슨.’
‘세자르, 네 얼굴이 생각보다 꽤 많이 알려진 건 알고 있겠지?’
‘그거야 그런데.’
지난번 적자 인정 연회가 끝난 후, 수도의 화가들은 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주문으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문이 바로 나, 세자르 레핀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거였으니.
‘넌 지금 결혼 적령기의 귀족 영애들에게 최상의 신랑감으로 꼽히는 중이거든.’
‘···.’
‘그뿐 아니라 일개 평민들까지 네 초상화를 집에 붙여다놓는 게 유행이라는 거 알아?’
‘그건 대체 왜?’
‘네가 신분 상승의 산증인이라서 그렇지.’
요컨대 지금 나는 행운의 네잎클로버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네가 돌연 트리니다드 수도원에 얼굴을 드러내면 어떻겠어? 그것도 검은손 길드 담당자와 함께.’
‘그래서 위장을 하자고 한 거잖아.’
카렌은 고개를 저었다.
‘웬만큼 강렬한 위장이 아니고서야 널 못 알아볼 리 없어. 게다가 그 수도원장, 능구렁이도 그런 능구렁이가 없거든.’
‘그럼 네 생각은···.’
‘그래서 내가 준비한 거야.’
카렌은 갑자기 두 눈을 반짝이며 가발을 꺼내들었다.
‘귀부인으로 변장하는 거지.’
‘···설마, 농담이겠지?’
‘설마, 농담이면 내가 이 귀찮은 것들을 다 구해갖고 왔겠어?’
진짜 인모로 만든 듯한 금발의 가발뿐이 아니었다. 귀부인들이 탐낼 법한 드레스와 각종 장신구에 본격적인 화장 도구까지 가져왔으니까.
‘세자르 넌 트리니다드 수도회의 비밀스러운 후원자인 생드니 자작부인이 될 거고.’
‘···나 욕 좀 해도 될까?’
‘아니. 그리고 앨빈은···.’
카렌은 잔뜩 겁먹은 앨빈을 보며 생긋 웃었다.
‘그런 생드니 부인의 충성스러운 집사가 되는 거야. 어때?’
‘아주 좋습니다!’
위기에서 벗어난 앨빈이 곧바로 찬성했다. 저 동료애라고는 1도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여튼 그러저러하여, 나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아름다운 귀부인으로 변신하는 일생일대의 굴욕을 체험 중이었으니.
한편, 앨빈은 나와 카렌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트리니다드 수도회의 역사를 줄줄이 읊었다.
“트리니다드 수도회는 초창기만 해도 알레스교단의 세속화를 비난하고 ‘경전으로의 회귀’를 부르짖었지만···.”
“이놈들도 결국 다 똑같은 인간이었다, 이 말이야?”
“맞아요, 카렌 님. 어떤 종교집단이든 간에 세속화의 덫을 피해가기란 어려운 법이니까요.”
카렌, 아니 지금은 ‘검은손 길드의 후계자 렌’으로 위장한 그녀가 우리 앞에 펼쳐진 풍경을 가리켜 보였다.
“이 수도원 역시 그런 세속화의 증거이고 말이야.”
흔히 수도원이라고 생각하면 떠올리는 검소하고 투박한 이미지와는 달리,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커다란 수도원은 척 보기에도 화려한 모습을 자랑했다.
햇살 아래서 눈부시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금과 보석 따위로 장식한 지붕이 인상적이랄까.
“누구십니까!”
수도원 입구를 지키던 문지기의 외침에 카렌이 대답했다.
“검은손 길드의 렌이다. 오늘 필로스 원장과 약속을 하고 왔는데.”
“렌 님이시군요! 곧바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문지기가 나서서 우리를 안내했다. 수도원 응접실로 가는 동안, 일반적인 알레스 신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실내 장식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좀 더 웅장하면서도 투박하다고 할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걸어가던 순간, 무심코 복도를 지나던 어린 수도사 두 명이 우리를 보고 흠칫 놀랐다.
“여, 여자다!”
그러고는 귀신이라도 본 듯 달아나는 그들의 뒷모습에 대고, 우리를 안내하던 수도사가 민망한 듯 외쳤다.
“이 녀석들! 귀한 손님들을 보고 이 무슨 망발이냐!”
“···.”
“아이고, 나리들, 죄송합니다요. 이곳에선 평소 여인분들을 뵐 일이 없다 보니.”
나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고, 카렌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수도사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뵐 일은 더더욱 드무니 말이지요.”
나는 부들부들 떨며 두 사람에게 간신히 미소지어주었다.
“그렇지, 생드니 부인이 좀 아름다워야지.”
카렌은 넉살좋게 대꾸하더니 날 향해 같잖은 수화를 선보였다. 그것을 본 수도사가 물었다.
“아, 혹시 부인께서···.”
“생드니 부인은 몇 년 전 사고로 귀가 들리지 않게 되셨습니다.”
“저런.”
“그래서 늘 이렇게 수화로 이야기를 나눠야하지요.”
···심지어 그냥 귀부인도 아니고, 귀 멀고 말 못하는 불쌍한 부인이다.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냐고 묻자, 카렌은 이렇게 답했다.
‘트리니다드 수도회 놈들은 외부인의 존재에 엄청 민감하거든. 내가 데리고 온다니 거절은 못하겠지만, 나중에 네 가짜 신상을 캐보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고.’
그러나 귀가 들리지 않고 말도 하지 못하는 가련한 여인이라면 덜 경계하지 않겠냐, 라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대충 수화로 대꾸해주었다.
카렌이 씩 웃으며 수도사에게 말했다.
“부인이 감사하다고 전해달라 하시는군요.”
* * *
수도원 응접실 안.
중세 성인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의 수도원장과 카렌은 한참이나 대화를 나눴다.
“여기 적힌 품목들은···.”
“최근 중부지방에 흉작이 들어 밀값이 올라···.”
“전반적으로는···.”
정보만이 아니라 식량을 비롯해 대부분의 물자를 길드를 통해 조달받는 만큼, 화제가 다양했다.
거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카렌은 본격적인 화두를 던졌다.
“최근 수도회 관해서 이야기가 많이 돌더군요.”
원장은 긴장된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이야기라 하시면···.”
“원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최근 수도회 수사들이 알레스 정교단과 유난히 마찰이 잦다는 것을.”
“크흠.”
정곡을 찔린 원장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전부터 우리 수도회에 과격한 수사들이 많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심해진 건 처음인지라···.”
뭐라 더 말을 이어나가려던 원장은 내 눈치를 슬쩍 보았다.
외부인 앞에서 민감한 얘기를 꺼내길 망설인다는 것을 알아차린 카렌이 곧바로 원장의 귓가에 속삭였다.
“생드니 부인은 안타깝게도 귀가 들리지 않으시니, 편히 말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 그렇다면···.”
수도회와 검은손 길드가 거래해온 지 10년이 다 되는 만큼, 원장은 그 후계자인 렌을 상당히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설명은 간략했다.
그를 필두로 한 온건파가 주류였던 덕분에 과격한 수도사들을 간신히 저지하고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 이들 과격파가 비밀리에 누군가의 지원을 받고 있는 듯하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응접실 안을 둘러보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누군가란 오프러스 대공일 거고, 과격파의 우두머리와 연락을 취하는 거겠군.’
더는 원장에게서 끌어낼 정보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벌떡 일어나며 카렌에게 어설픈 수화를 해보였다.
“아, 원장님. 혹시···.”
카렌이 원장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볼일을 보고 싶다는 신호에 원장은 민망해하며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줬다.
“응접실을 나가셔서 왼쪽 복도로 쭉 걸어가시면 됩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한 뒤 응접실을 나섰다.
볼일이 급한 건 아니었고, 저 안에서 카렌이 원장의 주의를 끄는 동안.
‘내 나름대로 염탐을 해보고 싶어서 말이지.’
카렌이 사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과격파들은 주로 식료품 저장고에서 저희들끼리 접선을 가진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가져다준 수도원 도면을 보고 위치 파악을 마친 터였고.
‘최대한 빨리 살펴보고 오자.’
다행히 응접실에서 저장고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일부러 길을 잃은 척 두리번거리며 그 근처로 다가가자, 반쯤 열린 저장고 문 너머로 수도사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했단 말이지.”
“그 빌어먹을 정교단 놈들, 언제까지 우리가 그 꼴을 참고 있어야 해?”
“수도원장은 언제까지 교단의 놀음에 놀아날 건지···.”
토막 토막 들려오는 말소리만으로도 그들이 과격파 일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화를 엿듣고 있노라니 긴장감 때문인지 심장이 펄떡거린다.
“솔직히 말해 정교단, 그놈들이 얼마나 타락한 놈들인데.”
“세간에서 그걸 얼마나 알겠어, 그래 봤자 교단끼리의 싸움이니 자기네랑은 상관없다고 할걸.”
“하, 정교단이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또 달라질걸?”
뭘 하고 있다고?
나도 모르게 뒷얘기를 듣고자 한 발 문을 향해 다가섰다.
“이능자들 말이야. 그걸 교단에서 관리하는 거야말로 독재가 아니고 뭐냔 말이지.”
“크크, 아직도 그런 얘길 믿는 인간들이 있나? 이능은 알레스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말이야.”
“이능은 그냥 타고나는 거고, 부모한테 물려받은 능력이라는 게 드러나면 교단의 영향력이 지금 같지 않겠지···.”
그 말에 내 귀가 번뜩 뜨였다.
‘이능이··· 유전적 능력이 맞다고?’
나도 모르게 한 발 내디딘 순간.
바로 앞의 마룻바닥이 쿵 소리를 내며 살짝 꺼졌다.
“누구냐!”
흡, 하고 신음하기도 전에 안에 있던 수도사들이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내 모습을 발견한 놈들의 눈이 커졌다.
“웨, 웬 여자가 있는데요!”
“오늘 원장이 방문자를 받는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무슨 여자가 체격이 이렇게···.”
나는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두 손을 들어 열심히 수화를 했고.
“어, 이 여자··· 귀머거리인가 본대요.”
“아냐, 혹시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끝까지 의심을 풀지 않는 수사 하나가 다가와 내 앞에 섰다. 험상궂은 얼굴로 인상을 구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버릴까. 나는 가슴팍에 숨겨둔 단검을 떠올렸지만···.
‘그랬다간 괜히 일이 커질 수도 있다.’
잠시 고민하던 내가 택한 방법은···.
“···!”
저희들을 향해 환하게 웃는 귀부인의 모습에, 수사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 흠, 흠.”
“어, 어쩌다 이런 여인이 여기까지···.”
그 미소에 그네들이 헬렐레하는 사이, 복도 뒤편에서 초로의 사내 하나가 나를 쫓아왔다.
“마님! 마님!”
···나이 든 집사로 분장한 앨빈이었다.
“우리 마님께 무슨 짓입니까!”
“어, 우린 그냥 아무것도···.”
앨빈은 얼른 나를 데리고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응접실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젠장.’
앨빈이 목소리를 낮춰 슬쩍 물었다.
“아까 어떻게 위기에서 벗어나신 겁니까?”
“···묻지 마.”
무언가 순수함을 잃어버린 기분을, 나는 한동안 곱씹어야만 했다.
그렇게 수도원 염탐을 마무리하고 기숙사로 돌아오자.
생각 외의 기쁜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구구! 꾸구!”
리암이 전서구를 보낸 참이었다.
전서구의 발목에 묶인 쪽지에는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금광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그간 꿈꿔왔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