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눈치 없지 않다니까?
‘제어의 팔찌’를 찬 덕분에 우만은 긴고아의 죄수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터였지만.
딱히 거기에 불만은 없어 보였다.
“나나 너나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당연한 것 아닌가.”
머리가 좋은 놈이라 그런지 이런 데 있어서는 말이 잘 통한다니까.
우만은 1주 뒤에 팰러스와 국경지대에서 접선하기로 했으며, 그때 정기적으로 전서구를 보내 상황을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목걸이 잊지 말고 차고 다녀.”
“걱정 마라.”
우만은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덧붙였다.
“진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어.”
내 말에 우만이 고개를 들었다.
원작의 우만은 팰러스가 모든 것을 다 손에 넣은 후에야 진실을 알아냈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는 심정으로 그를 암살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아니, 오히려 네 복수를 완성하기에는 적절한 시점이지.”
“···.”
“그러니 기운 빠지는 소리는 하지 말고. 2주 후에 다시 보자.”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우만과 헤어졌다.
빨간 머리 소년으로 분장한 카렌을 흘긋 돌아보며 말했다.
“진짜 못 알아보네?”
“내가 그랬잖아, 너 빼고 아무도 못 알아본다고.”
카렌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핀잔을 줬다.
‘그냥 이놈의 소설 설정인 건가.’
우만이 카렌의 얼굴을 모를 리 없는 데도 저런 허접한 남장을 못 알아본다는 건···.
“근데, 정말로 괜찮을까?”
“뭐가.”
내 말에 카렌은 우만이 사라져버린 방향을 주시하며 말했다.
“정말로··· 저 목걸이 하나만으로 우만이 놈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쉽지는 않겠지.”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무엇보다 세뇌라는 건 생각만큼 단순한 이능이 아닐 테니까.
···그저 세뇌가 풀렸다고 해서, 우만이 평소 팰러스에게 품고 있던 존경심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이 한번에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건 우만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네가 그렇다면야.”
카렌은 마지막까지도 걱정 어린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리암에게서 경과보고서가 날아왔다.
“자네들을 소집한 건 바로 그 때문이야.”
나는 우애단의 모임실에 불러모은 내 가신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최근 우애단 단원 수가 급격히 늘어난 만큼, 평소 이곳은 북적북적거리지만···.
‘지금처럼 모임이 없는 요일과 시간대에는 이렇게 가신들 집합장소로 쓰기 좋으니까.’
나는 리암이 보낸 보고서 한 구석을 가리켜 보였다.
“금광 조사는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지만, 문제가 몇 가지 있다고 한다.”
“문제라면···?”
“일단은 불시에 나타나는 야생동물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더군.”
앨빈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슬쩍 발닉을 쳐다보았다.
내 눈빛에 담긴 진의를 알아차린 발닉이 얼른 대꾸했다.
“어떤 야생동물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발닉이 지닌 힘이라면 지금의 리암 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든든하군, 발닉.”
치하의 말에 발닉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또 한 가지 난점이라면, 이 일대에 커다란 바위 따위가 많아서 그걸 치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는데···.”
내가 자신을 쳐다보기도 전에, 디터가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라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다, 디터.”
디터 역시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두 사람이 합류한다면 조사 작업 시간이 한층 단축될 거다.
그런 생각에 나 역시 흐뭇한데, 디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희 두 사람이 모두 주군 곁을 떠나 있어도 괜찮을까요.”
뭘 걱정하는 건지는 알겠다.
헬리오스 가문의 암살 시도는 다행이 불발로 그쳤지만.
‘그런 일이 언제고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최근 수도의 분위기가 흉흉한 데다, 지나치게 눈에 띄는 내 행적을 못마땅해하는 귀족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디터,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일부러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일단 여기엔 롯과 그 형제들이 있고.”
그 말에 롯과 나답, 나훔, 나만이 진중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나답은 제 가슴을 퉁 치며 말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근육질의 바바리안 전사 같은 외모만 봐도 든든하지 않은가.
나는 농농이를 안고 서 있는 앨빈도 가리켜 보였다.
“여기 농농이와 앨빈도 있잖나.”
“그럼요. 여차하면 제가 ‘흑의 기사’에 빙의해서···.”
[앙! 옹앙앙!]
농농이가 뭐래? 라고 눈빛으로 질문하자, 앨빈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롯은 자기가 잘 봐줄 테니 걱정 말라 하시는데요.”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는지, 롯은 제게 팔을 뻗어오는 농농이를 안아들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그것이 진심임을 알았으니.
‘농농이 이 자식, 벌써부터 미인을 밝히기는···.’
어쨌거나 디터와 발닉은 꽤 안심한 모양새였다.
“카디움 남매분들의 실력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발닉의 말에 롯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디터 경, 발닉 경.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더니 나를 돌아보며 덧붙인다.
“세자르 님, 괜찮으시다면 두 분이 자리를 비우실 동안만이라도 제가 세자르 님의 옆방에서 머물어도 괜찮을까요?”
“···!”
“···!”
어쩐지 놀란 기색의 디터와 발닉.
앨빈도 우물쭈물하며 롯과 카렌을 번갈아 본다.
“왜 그래, 앨빈?”
“아, 아뇨···.”
“롯, 네가 불편하지 않다면 나는 상관없다.”
거기까지 말하는데, 발닉이 내 허리를 찌르더니 저쪽을 눈짓한다.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흐으, 도련님은 다 좋으신데 눈치가···.”
···내 눈치가 어디가 어때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카렌 님이···’라며 말을 흐리는 발닉.
“카렌이 뭐?”
카렌은 아무렇잖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리암의 보고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할까.
뒤늦게 고개를 든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롯이 그녀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헉, 하며 제 입을 가렸다.
“아, 아니. 제가 괜히···.”
“뭐가?”
“그, 그게··· 디터 님과 발닉 경이 자리를 비우실 때 제가 세자르 님 옆방에서 호위를 하려고 했는데···.”
“그거 좋은 생각인데?”
카렌이 쾌활하게 대꾸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거봐, 라는 듯 발닉들을 돌아보았다.
발닉과 디터, 앨빈은 황당해하는 모습이었지만.
카렌은 그런 분위기를 눈치 못 챈 채 말을 이었다.
“사실 롯의 이능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호위에 적합화된 능력이잖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럼. 불시에 급습하는 적을 몇 초간 붙들어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데.”
“···열심히 하겠습니다.”
카렌의 말에 롯은 두 뺨을 붉히며 다짐했다.
이것 봐, 둘이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데.
“커흠, 그··· 디터 네 수업에는 큰 지장이 없으려나?”
발닉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고.
“아, 네. 이번 주는 다행히 중요한 수업은 없어서··· 미리 행정실에 양해를 구해두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신단과의 작전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요즘 해로드청년회 회의도 그렇고, 점점 할 일이 많아지는 탓에 수업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부쩍 늘고 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오히려 수업이 널널해지는 구조라 다행이군.’
이는 아카데미 측의 배려라고 볼 수 있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나이가 차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실전에 투입되어 경험을 쌓는 경우가 늘어나기 마련이니까.
“그럼 나도 가볼게, 세자르.”
“아, 그럼 저희도···.”
다른 녀석들이 모두 나간 뒤, 마지막으로 나가려는 카렌과 앨빈을 붙잡았다.
“너희와는 또 따로 할 일이 있는데.”
“···또 뭔데.”
은근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는 카렌과 달리, 앨빈은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공자님께 도움이 된다면 뭐든-”
“앨빈, 제발 그놈의 공자님 소리 좀 안 하면 안 될까?”
적자 인정을 받은 후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고 있으니, 최측근이자 친구인 놈들에게까지 그런 소릴 듣고 싶지 않거든.
“아, 네, 세자르 님.”
“호칭이야 그렇다 치고, 이번엔 뭘 꾸미고 있는 건데?”
카렌이 두 팔로 팔짱을 꼈다.
나는 그녀와 앨빈을 번갈아 돌아보며 말했다.
“트리니다드 수도회라고 들어봤나?”
“···.”
탁발 수도사들의 모임으로 유명한 트리니다드 수도회.
교리를 따르지 않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살인도 서슴지 않는, 끔찍한 광신도 집단을 언급하자 두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카렌, 너희 검은손 길드랑도 거래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 거래야 하지. 우리 입장에선 놓칠 수 없는 큰 고객이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카렌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걔넨 대부분 미친 놈들이라 웬만해서는 얽히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나도 딱히 오지랖부릴 마음은 없었지만···.”
국왕에게서 들은 내용의 자초지종을 전하자, 카렌과 앨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미친 놈들이 알레스교단에서 독립하길 바란다고?”
“끔찍하군요.”
“그래. 그네들의 입맛에 맞게 경전과 제식을 바꾸고 싶어할 뿐 아니라···.”
트리니다드 수도회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신앙의 자유를 빙자한) 자치권.
원작에서는 오프러스 공국과의 국경지대에 자리한 요새 하나를 점거하여 항쟁을 시작한다.
‘···제발 그 지경까지는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한 광신도들을 간신히 설득해낸 것이 바로 팰러스였지만.
지금 와보니 그 모든 것이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카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마 지금은 교단의 지배하에 있으니 저 정도이지만···.”
“네 말이 맞아. 통제를 벗어난다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내 목표는 하나였다.
카렌의 인맥을 이용해 트리니다드 수도회 내부의 정보를 파악하고,
수도회 구성원 중 팰러스와 연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
‘더불어 그 둘 사이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카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좋은 생각이 하나 나기는 했는데.”
“뭔데?”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고기를 얻으려면 때로는 늑대 소굴에 머리를 들이미는 짓도 감행해야 하는 법.”
“너랑 난 생각이 비슷하다니까.”
“···굳이 꼭 그래야 할까요···.”
앨빈은 나와 카렌과 생각이 다른 듯했지만, 나는 괘념치 않았다.
카렌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제 작전을 설명했다.
“아니, 안 그래도 좀 있으면 그쪽 리더와 한 번 얼굴을 봐야 하거든.”
트리니다드 수도회는 속세와 인연을 일절 끊고 지내는 만큼, 대부분의 세속적 용건을 검은손 길드를 통해 처리한다고 했다.
때문에 수도원장과 길드 관계자는 주기적으로 만남을 갖는다고.
“보통은 원장이 우리 쪽 구역으로 오지만, 우리가 그쪽으로 가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아.”
수도회 안에서도 파벌이 갈려 있는데, 현재 수도원장은 그나마 온건파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우리가 처리해주지 않으면 얘넨 쫄딱 굶어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니, 거절하진 못할 거야.”
“그러니 네 말은··· 우리가 검은손 길드 관계자로 위장하고 수도원 안에 들어가보자는 얘기인가?”
내 명쾌한 정리에, 카렌은 두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내며 대꾸했다.
“그렇지!”
“좋은 생각인걸.”
내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앨빈이 흠칫 놀라며 끼어들었다.
“그, 저는 굳이 가지 않아도···.”
“넌 종교 지식이 해박하잖아.”
“···.”
“네가 있어야 심도 있는 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얘기다, 앨빈.”
앨빈은 그 말에 거부도 하지 못한 채, 울 것 같은 얼굴로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작전 인원은 대충 이 세 사람으로 생각하고···.”
카렌이 씩 웃으며 말했다.
“본격적인 위장에 들어가볼까?”
“위장?”
“세자르 네 입으로 말했잖아, 길드 관계자로 위장한다고.”
그거야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카렌이 말한 ‘위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나는-
얼마 뒤 내 실책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