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82화 (82/176)

우만의 고충

‘방금··· 뭐라고?’

내가 두 눈을 크게 뜨자, 마치 마음 속의 말이 들리기라도 한 듯 국왕이 되풀이해 말했다.

“다 들어버렸다고 했네. 그대가 레핀 공작과 긴히 나누던 대화를, 딱히 엿들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머쓱하게 웃더니 말을 잇는다.

“짐에게는 조금 특별한 힘이 있거든.”

···저런 얘기를 이렇게 쉽게 해버려도 되나?

당황한 탓에 표정 관리가 안 됐는지, 국왕은 그런 내 속내를 읽은 모양이었다.

“아, 그럼 이건 어떨까. 그대의 비밀을 본의 아니게 엿들은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무슨···.”

“짐 역시 비밀 한 가지를 그대에게 털어놓는 것 말일세.”

한순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 너무 좋은 조건이니 말이다.

오히려 내 약점을 잡았다면 잡았지, 굳이 자신의 비밀을 알려줄 것까지는···.

-이라고 생각한 순간, 국왕의 의중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와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군.’

좋든 싫든, 너와 나는 한 배를 탄 셈이다.

같은 배의 선원 사이에 의심이 생기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나 역시 패 하나를 너에게 보여주겠다는 의미.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의 비밀이 무엇인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그대의 비밀을 엿듣게 된 연유와 관련이 있는 건데···.”

잠시 주저하던 소년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짐은 귀가 아주 좋네. 몇 개의 벽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도 분간하여 들을 수 있을뿐더러···.”

테오 2세의 시선이 내 상체로 향했다.

“이렇게 가까이 앉은 상황이라면, 마주 앉은 이의 심장 소리만 듣고서도 그의 심리를 파악하는 경지에 이르렀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국왕에게 ‘천리이’ 같은 이능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능력을 이용해 저런 걸 할 수 있다는 것은-

‘타고난 감각이 예민할 뿐더러 상대의 기분을 귀신처럼 파악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감탄이 되는 동시에 조금 두렵기도 했다. 이 나이에 벌써 이런 능력을 지닌 그가 성인이 된다면···.

‘계속 잘 보여야겠군.’

입안의 혀처럼 굴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질문했다.

“그렇담 지금 제 심리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대 또한 그걸 묻는군.”

이런 질문이 나올 걸 예상하고 있었는지 소년이 설핏 웃었다.

“심장이 무척 빨리 뛰는 걸 보니,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긴장이 되는가 본데.”

“맞는 말씀입니다.”

“아마 이런 생각도 하고 있을 거야. ···이 무서운 아이와 척을 지어서는 안 되겠다고.”

“···!”

“하지만 짐이 어째서 이런 이야기까지 전부 털어놓는지는 감이 오질 않는 모양이군.”

“···송구하오나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국왕은 손수 내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한 잔 들게, 세자르 공. 몸소 확인해보길 독은 들지 않았으니.”

“무슨 말씀을.”

농담처럼 대꾸했지만 국왕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래 봬도 어릴 적부터 온갖 독을 경험해봤거든.”

“어쩐지 남 일 같지가 않군요.”

“아, 그대 역시 힘든 유년기를 겪었다고 들었네.”

소년은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말을 이었다.

“어쩌면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사실을 공에게 털어놓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네. ···짐에게는 그대의 힘이 필요하거든.”

소년 국왕의 시선이 알현실 앞쪽에 걸린 한 점의 그림으로 향했다.

정중앙의 테오 2세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들이 단란하게 모여 앉은 모습이었다.

“왼편에 자리한 짐의 어머니와 삼촌이 보이는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외조부이신 전대 노바스 공작은 자식들을 참으로 훌륭하게 키우셨네만··· 당신의 정치적 술수까진 가르쳐주지 못하셨지.”

“모후 전하와 현 노바스 공작 각하는 순수하고 올곧은 분들이시니까요.”

피 튀기는 정치판에서 살아남기엔 영 좋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라는 얘기를 돌려 말했다.

“그래. 그만큼 짐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분들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소년 국왕의 시선이 다시 내 얼굴로 향했다.

“자네와 달리, 정치에 적합한 이들은 아니네.”

“···.”

“그리고 내겐 정치가가 필요하고.”

국왕은 손에 든 잔을 내려놓았다.

소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짐이 그대의 대화를 엿들은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네.”

“···다행이라 하심은.”

“오히려 공에게 거리낌 없이 간청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간청, 이라는 단어에 눈을 크게 떴다.

주군이 가신에게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단어였으니까.

“짐이 들은 것이 맞다면 세자르 공은 비록 정식 후계는 아니라고는 하나, 짐의 사촌형 뻘이 되는 것 아닌가.”

“그, 그것은.”

“세자르 공.”

소년의 맑은 눈동자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지금 짐은 그대에게 제발 도와달라 간청하는 셈이네. 단순한 주군과 가신의 관계가 아니라···.”

의자 팔걸이 위에 놓인 소년의 주먹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비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짐의 혈족으로서··· 이 가련한 사촌을 도와주게.”

소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테오 2세가 처음으로 제 나이대의 어린 아이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왕관의 무게에 짓눌릴 것 같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네. 짐은 단 한 번도 이런 크나큰 의무를 원한 적이 없으니까.”

소년이 쓰게 웃었다.

“하지만 이것을 벗으려 도망치는 순간, 피바람이 이 나라를 덮치겠지. 그렇잖은가?”

“···맞는 말씀이십니다.”

소년의 시선이 테이블 끝으로 향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은 무척이나 복잡해 보였다.

“선조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세운 이 나라를, 고작 이 한 목숨 부지하겠다고 피투성이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입에서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작해야 우리 나이로 초등학생에 불과한 아이가 저 멀리까지 내다보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자신의 어깨에 놓인 그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저 모습 때문일까.

“···신, 세자르 레핀.”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테오 2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폐하께 진심 어린 충성을 맹세합니다.”

물론 그 순간에도 목숨을 건다거나, 영원한 충성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건 내 성격과는 거리가 먼 얘기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도 테오 2세에겐 충분한 듯했다.

“짐 또한 그대의 신뢰를 결코 저버리지 않을 군주가 되겠다고 맹세하지.”

이렇게.

소년 국왕과의 대화는 예상 외로 좋게 좋게 마무리되었다.

거기에 한 가지 보너스까지 얻었는데.

“공이 관심 있을 것 같아 귀띔해주자면.”

대화를 마치고 알현실을 나서려는데, 국왕이 내 등 뒤로 중요한 정보를 던져줬다.

“얼마 전 정기회의에서 안건으로 올라왔던 ‘트리니다드 수도회와 알레스정교단의 마찰’ 말일세.”

“네.”

“수도회 배후에 오프러스 공국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네.”

“오프러스 공국이···!”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해준 것이 바로.”

테오 2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대의 형인 팰러스 레핀이라고 말이지.”

···아무래도,

팰러스는 본격적으로 발톱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 * *

수도 번화가의 커피하우스.

비밀스러운 대화를 위해 따로 준비된 방에서, 우만은 초조한 마음으로 오늘의 약속 상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은 한 명을 더 대동한다고 했나.’

지난번 세자르를 이곳에서 만났던 것이 고작해야 몇 주 전이었지만.

그간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때도 이미 세자르는 적자로 인정받은 후였지만.’

이제 세자르 레핀은 수도의 권세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브렉 헬리오스와의 결투였고.

“빌어먹을 브렉 자식···.”

우만은 입안이 썼다.

엄연히 말해 동료라고 부르기에는 뭣했지만, 어쨌거나 그와 브렉은 오랜 시간 같은 주군을 모셨던 사이였다.

‘하지만.’

지난번 세자르와의 만남으로 참혹한 진실을 알아버리지 않았는가.

···팰러스라는 주군을 모시기로 한 결심마저 자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이 팰러스 님의 세뇌 때문이라니.’

이후 우만은 한동안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강제로 알게 된 진실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상임이 드러날 뿐이었다.

‘그래도, 하지만···.’

팰러스가 건 세뇌가 아직도 제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동생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모든 것을 부인하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세자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대체 언제까지 네 여동생을 죽인 주범에게 꼬리를 흔들 참이냐?’

덕분에 우만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자신을 향한 팰러스의 신뢰를 역이용하여 복수하기로.

‘마침 좀 있으면 팰러스와 만나기로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문제는, 팰러스의 앞에만 서면 그의 세뇌에 무력할 정도로 쉽게 걸려든다는 것.

고민하던 우만은 결국 세자르에게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고, 오늘 이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달칵 하며 문이 열렸다.

세자르와 그 동행이었다.

“오래 기다렸나?”

우만이 고개를 젓자, 두 사람이 맞은편에 앉았다.

“이쪽은 정보 길드 소속의 내 동료.”

“렌이라고 불러라.”

세자르는 붉은 머리의 예쁘장한 소년을 데리고 왔다.

우만은 자꾸만 그에게 눈길이 가는 것을 느꼈는데, 상대 또한 시선을 감지했는지 미간을 좁혔다.

“왜 자꾸 쳐다봐?”

“아니, 아는 사람과 닮은 것 같아서···.”

그 말에 ‘렌’은 움찔했지만, 세자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넘겼다.

“그럴 리가. 어쨌거나 그런 얘기를 하자고 날 부른 건 아닐 텐데?”

“···그래.”

“용건으로 바로 들어가지, 우만.”

우만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 너와 나눈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좋아, 그래서?”

“네 말이 다 맞았다.”

세자르와 만난 이후 우만은 개인적으로 조사를 의뢰했고, 결과는 기대했던 대로였다.

“···팰러스가 우리 남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여동생을 죽이고, 날 가신으로 삼은 게 맞다는 얘기다.”

세자르는 대꾸 없이 그의 얘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한참을 경청하던 그는 우만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나.”

우만은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다음 주 초에 팰러스와 만날 예정이다.”

그 말에 세자르와 그 동행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 만남을 그에게 복수할 첫 기회로 삼고 싶지만···.”

“놈의 세뇌에 걸려들까 봐 걱정된다는 거로군.”

제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세자르의 말에 우만은 잠시 멍해졌다.

“아니야?”

“아니, 그 말이 맞다.”

“우만 네 결심이 확고하다면.”

세자르는 가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네 걱정을 덜어줄 물건을 잠시 빌려줄 수는 있지.”

“걱정을 덜어줄 물건이라니···?”

우만의 시선이 세자르가 탁자에 올려둔 물건으로 향했다.

아무 장식도 없는 흔하고 평범한 은 팔찌가··· 걱정을 덜어줄 물건이라고?

‘설마 저걸 착용하면 세뇌를 막아낼 수 있다든가.’

그의 추측은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왜냐면.

“아, 이게 세뇌를 막아준다는 물건은 아니고.”

“···?”

세자르는 본인의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끌러 보였다.

“그건 이쪽이고.”

“···그럼 저 팔찌는?”

“음, 그건.”

말을 고르던 세자르를 대신해 그의 동행이 입을 열었다.

“우만 네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보장해주는 물건이지. ···설마 그 정도의 제약도 없이 이런 귀한 물건을 내줄 줄 알았어?”

날카로운 대꾸에 우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조차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그저 믿어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 맞다.

세자르의 동행, ‘렌’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할게. 우만, 넌 팰러스에게 정말 복수할 거야?”

“그래.”

우만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저 대답일 뿐인데도 렌은 몹시 만족한 기색이었다.

세자르가 말했다.

“네 결심이 그렇다면 나 역시 널 믿어보지. 아까 말했듯, 이 목걸이는 팰러스의 세뇌로부터 널 보호해줄 거다.”

우만이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자, 세자르가 목걸이를 다시 붙잡았다.

“다만,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면?”

세자르는 여전히 목걸이를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건 내게도 아주 귀한 물건인 만큼, 네가 날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필요하거든.”

“보장이라 함은··· 아까 그 팔찌를 말하는 건가?”

우만이 한쪽 팔을 내밀자, 세자르가 그 손목에 은 팔찌를 채웠다.

“좋아. 그럼 어디 물건을 시험해볼까.”

“시험이라니?”

“나에 대해 불경한 말을 해봐.”

불경한 말이라니, 대체 무슨···.

우만은 어이가 었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세자르 레핀은 형편없는 인간이다.”

팔찌에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장난해? 꼭 학교 다닐 때 욕 한 번 안 해본 것처럼.”

“대체 무슨···.”

“이번엔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봐.”

세자르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빌어먹을 세자르 새끼 확 목을 비틀어 죽여버리고 싶다.”

“···.”

“해보라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본인이 시킨 거라고는 하지만.

우만은 눈앞에 본인을 두고 막말하는 데 익숙지 않았다.

“빨리. 시간 없다니까?”

“구, 굳이 그래야 한다면 세자르, 새끼···.”

“이 정도로는 안 되나 보군, 계속해봐.”

“네 목을 확 비틀어··· 죽여버리고-”

그 순간.

팔찌에서 찌르르, 하는 전류가 올라왔다.

따끔한 통증에 우만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으악!”

“오, 진짜 확실하네.”

동행의 말에 세자르가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믿을 만하겠어.”

아직도 그 전류의 감각이 남아 있는 우만이 크으, 신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미친 새···.’

-라고 저도 모르게 생각하다, 또다시 감전당할까 봐 얼른 불경한 생각을 억누르는 우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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