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들었지롱
[2단계 스킬 ‘그림자 방패’(패시브)가 자동으로 발동됩니다.]
그 메시지에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단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스킬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으나.
지이잉-
희미한 소음과 함께 눈앞에 무형의 벽이 생겨났고.
쾅!
“···.”
귓전을 때리는 충격음과 함께,
탄환은 보이지 않은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그 광경을 똑똑히 목격한 브렉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해졌다.
“저격수를 찾아라!”
“나무 위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결투 현장을 둘러싼 레핀 가 사병들이 분주하게 총병을 쫓는 사이.
나는 브렉이 절망에 빠져 있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채 얼이 빠진 놈을 향해 검을 다시 들었다.
‘결단을 내야 할 순간이니까.’
이 세계에 온 이후, 본능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거두기를 피해왔으나.
이제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점은 지나버렸다.
어쩌면 내가 지금껏 내린 수많은 결정들이 이미 여러 사람의 목숨을 끝장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건···.”
나는 최후의 망설임을 몰아내고 검을 뻗었다.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다.”
부웅!
그의 가슴팍을 향해 내 검이 뻗어갔다.
챙! 뒤늦게 정신을 차린 브렉이 제 검을 들어 막아냈지만.
“···흐앗!”
내 검은 곧바로 뱀처럼 방향을 틀어 그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갔고.
그 한순간의 방심으로 브렉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푸욱!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브렉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
아다만티움 검은 셔츠 안에 숨겨진 얇은 금속 갑주를 사정없이 꿰뚫고 들어갔다.
곧이어 느껴지는 기분 나쁜 감촉.
그럼에도 나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크, 크윽···.”
브렉의 얼굴에서 생명의 불꽃이 빠르게 꺼져가는 가운데.
웅성거리던 주변이 어느새 고요해졌다.
우리의 싸움을 옆에서 지켜보던 기사가 황급히 판정을 내렸다.
“···세, 세자르 레핀 공자님 승리!”
놈의 육체가 부들부들 떨리다, 어느새 떨림이 멎는 것이 검을 통해 전해졌다.
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검을 회수했다.
쿵!
브렉의 몸뚱어리가 바닥에 쓰러졌다.
“···세자르 님.”
“주군!”
“세자르···.”
내 이름을 부르는 여러 개의 목소리가 달려왔다. 나는 금방이라도 속엣것을 게워낼 것 같은 기분으로 간신히 물러섰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 것을 느끼며 천천히 옆을 돌아보자.
“···괜찮아?”
어쩐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한 카렌이 서 있었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나는 그저 쓰게 웃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안 다쳤으니 걱정하지 마.”
더는 움직이지 않는 놈의 뒷처리를 다른 이들에게 맡겨둔 채,
나는 미련 없이 결투 현장을 벗어났다.
* * *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난 지 몇 주가 지나자.
일상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되돌아왔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면.
사병대에 붙잡힌 의심 인물들은 혹독한 고문 끝에 모든 것을 불었다.
‘브렉 헬리오스를 비롯한 헬리오스 가문의 수뇌부, 세자르 레핀 공자 살해를 사주···.’
‘가문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결투 신청, 되려 추악한 속내 드러내는 계기가 되어’
절반은 헬리오스 가문의 사병, 나머지 절반은 길드 소속의 암살자였으며.
‘세자르 레핀 공자를 겨눈 저격수의 신원을 파악하다.’
결투가 한창 진행되던 와중, 내게 총을 저격한 인물.
이는 헬리오스 가문에 오래도록 충성을 바친 전문 사격병임이 밝혀졌으며.
그 또한 현장에서 체포되어 투옥당했다.
“약식이나마 재판에 회부되긴 하겠지만, 십중팔구 처형당할 겁니다.”
아카데미 수업이 끝난 뒤 모임실에 다같이 모인 가운데.
디터는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일개 병사가 귀족을, 그것도 공작가 자제를 죽이려고 한 건 목숨으로 물어야 하는 중죄이니까요.”
나는 알겠다는 듯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지난번 결투가 있은 후, 디터는 걱정이 되는지 유난히 내 곁을 맴돌았다.
“괜찮으십니까?”
“그 질문만 오늘로 다섯 번째인 거 알지?”
“아니, 그게···.”
디터는 머리만 긁적이며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가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나 역시 알고 있다.
‘헬리오스파의 잔존 세력이 나를 노리지 않을까 걱정되는 거지.’
헬리오스 가문의 작위 회수 결정이 발표된 이후 극소수의 가문들은 이에 반감을 가지고 불만을 표출했는데.
이번 사건으로 헬리오스 가문 구성원들에 대한 처분이 무거워지자 그에 대한 반감 또한 커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어디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것처럼 보일 테니.’
물론 여기서 ‘굴러온 돌’은 사생아 출신인 세자르 레핀이며, ‘박힌 돌’은 헬리오스 가문을 말하는 거다.
즉, 이제 갓 적자로 인정받은 내가 사람들 눈에 너무 띈다는 얘기이지만.
“그래 봤자 저들이 어쩌겠나, 디터.”
“···.”
“제일 막강한 배후라 할 수 있는 헬리오스 가문이 저렇게 되어버렸는데.”
불만이 있더라도 불씨가 붙기 전까지는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을 터다.
그들이 그렇게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내 힘을 더 키울 생각이거든.’
이번에는 리암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보다 네게 맡기고 싶은 일이 있는데.”
“···!”
‘첫 임무’라는 말에 리암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빛난다.
이렇게 내가 리암에게 자연스럽게 임무를 주는 것은···.
‘그게 연회 직후의 일이었던가.’
레핀 가문의 적자로 인정받은 후.
나는 리암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며 그의 의사를 확인했고.
양가 인물이 한 명씩 입회하는 정식 절차를 밟아-
‘션 페킹튼 백작의 차남, 리암 페킹튼은 로건 드 레핀 공작의 차남, 세자르 레핀을 주군으로 모시는 가신의 예를 치르겠는가?’
리암을 정식 가신으로 맞이한 터였으니까.
나는 리암의 시선을 느끼며 품에 고이 넣어뒀던 두루마리 지도를 꺼내 내밀었다.
“이 지도에 나온 대로 금광 조사에 나서줬으면 좋겠는데.”
“그, 그, 금광?”
“내가 몇 달 전에 발닉을 통해 구입한 땅이거든, 여기가.”
나 역시 한동안 잊고 있었다.
하지만 임리 자작에게서 사들인 이 황무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금이 매장된 곳이다.
‘게다가···.’
도전과제 보상으로 나온 이 지도를 이용한다면 조사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단축될 터.
이런 유의 임무를 해본 적이 없는 리암에게도 그리 어려운 일은 되지 않을 거다.
“어때, 할 수 있겠나?”
“그럼. 아니, 그럼요 세자르 공자님!”
지나치게 굳은 목소리로 대꾸하는 리암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 사이에 섭하게 이럴 거야?”
리암은 머쓱한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게. ···어쩐지 어색해서 말이지.”
“뭐가 어색한데?”
“아무리 그래도 난 네 가신인데 그냥 세자르라고 부르기는 좀.”
나는 저쪽 자리에 앉아 있는 카렌을 어깨로 가리켜 보였다.
“카렌도 있는데 뭘.”
“···카렌은 예외 아닌가?”
“뭐가 예왼데? 너랑 카렌이 다를 게 뭐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리암은 어이없다는 듯 날 보다가 혀를 찼다.
“아냐, 됐다. 너에게 일반적인 감수성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일반적인 감수성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리암과 나는 전처럼 편하게 서로를 대하기로 합의를 마쳤고.
하루 빨리 금을 발견해달라는 말에 리암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최선을 다할게!”
첫 임무를 부여받아 잔뜩 들뜬 채 리암이 모임실을 나선 뒤.
나는 카렌에게 주의를 돌렸다.
“카렌, 조만간 우만과 한 번 비밀리에 만날까 하는데.”
“우만과?”
“그 자리에 너 역시 함께해줬으면 하는데.”
카렌은 내 말에 담긴 속내를 금세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내 능력을 썼으면 하는구나?”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르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록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우만이 더는 팰러스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는 우만에 대한 팰러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거다.
팰러스의 세뇌 능력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만큼, 우만이 아무리 진실을 알았어도 언제든 세뇌 상태에 다시 놓일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네가 질문을 던져 우만의 본심을 확인해줬으면 좋겠어.”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나는 잠시 말을 아꼈다.
만일 우만의 마음이 돌아선 게 분명하다면, 팰러스의 세뇌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할 테고.
“나 역시 우만에게 모종의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겠지.”
팰러스의 세뇌를 막아낼 유일한 방법은 내 목에 걸린 무효화 목걸이다.
허나 이 귀한 것을 아무 보장도 없이 빌려줄 수는 없는 법.
“···세자르 넌 늘 계획이 있으니까.”
카렌은 뭐가 됐든 난 네 계획에 따르겠어, 라고 덧붙이고는 모임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나라고 늘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오늘날의 성취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준 도전과제와 보상 시스템은,
놀랄 만큼 시기적절한 아이템들을 안배해주곤 한다.
‘그날, 브렉을 처치한 직후.’
나는 두 개의 도전과제를 동시에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도전과제 ‘구사일생’ 달성! - 암살자에게 공격당할 뻔했습니다.]
[도전과제 ‘영원히 안녕’ 달성! - 숙적 중 한 명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특수과제 ‘일석이조’를 달성했고, 보상이 상향 조정된 덕분에···.
[보상 ‘제어의 팔찌’를 수령했습니다.]
나는 4차원 주머니에 넣어뒀던 문제의 아이템을 꺼내보았다.
겉보기엔 평범한 은 팔찌로, 남자가 차고 다녀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의 투박한 생김새를 자랑하지만.
그 실체는 이러한 물건이다.
『‘제어의 팔찌’(가격 : ????)
- 설명 : 팔찌의 소유자에 관해 불경한 생각이나 말을 할 경우, 팔찌의 착용자에게 신체적 제약을 가한다.
- 비고 : 가장 위대한 드워프 장인이 만든 ‘권능의 팔찌’ 시리즈 중 하나.』
아이템 설명을 다시금 확인하는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말하자면 긴고아의 일종이랄까.
‘얼른 우만에게 주고 싶군.’
이 팔찌를 우만에게 착용시킨 뒤, 그를 나의 이중 첩자로 삼을 생각이니 말이다.
* * *
“후우···.”
여느 때처럼 해로드청년회의 정기회의에 참석한 후.
나는 잠시 보자는 국왕의 전갈을 받고 황급히 알현실로 향했다.
‘연회 후로 처음 뵙는 건가.’
당시 정원에서 공작과 밀담을 나누던 모습을 들킨 이후, 나는 의식적으로 국왕과 대면하는 것을 피해왔다.
어쩐지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무엇보다 국왕에겐 이능이 있으니.’
멀리 듣는 자.
그의 스킬 형태가 액티브인지 패시브인지는 확실치 않다.
전자라면 못 들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패시브라면 상황이 달라지니 말이다.
‘그것마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단둘이 대면해야 한다니.’
나는 살짝 긴장한 채 알현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언제나처럼 소박한 알현실.
국왕은 아예 다과까지 마련한 채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앞에 가서 예를 갖추자, 소년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이에 매번 무릎을 꿇을 것까지야. 편히 앉게, 세자르 공.”
국왕은 오래 본 친구라도 만난 듯 나를 편안히 대했다.
“딱히 특별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짐이 그대를 본 지 오래된 듯하여···.”
그렇게 말문을 연 소년 국왕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도해나갔다.
국왕이 화제를 꺼내면 나는 그에 맞장구를 치거나 간단히 의견을 덧붙이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던 찰나.
불쑥 나의 근황이 도마에 올랐다.
“레핀 공작이 얼마 전 발견해 화제가 됐던 고대유적도 알고 보면 그대가 세운 공이라고 들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저의 부친께서 아무래도 조금 과장을 보태어-”
“세자르 공.”
돌연 내 말을 끊은 국왕은 나를 웃는 낯으로 마주 보았다.
“이제 이쯤 되면 어느 정도는 솔직히 짐을 대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송구하옵니다, 폐하. 저는 그저···.”
내가 잠시 당황한 틈을, 소년은 놓치지 않았다.
“아, 그대가 궁금해하는 것 한 가지 얘기해줄까?”
“···.”
내가 궁금해하는 것이라면 단 하나뿐이다.
나는 숨 죽여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얼마 전 그대가 정원에서 레핀 공작과 나눈 대화 말일세.”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거린다.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자, 소년이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다 들어버리고 말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