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80화 (80/176)

찰나가 영원처럼

대망의 결투 당일.

나는 전날 저녁 아예 공작저에 와 있던 차였고.

나와 함께 온 카렌, 앨빈, 롯 등의 가신들은 이른 오전부터 내 집무실에 집합해 있었다.

“다들 잠은 잘 잤나?”

잔뜩 긴장한 듯 보이는 가신들을 둘러보며 일부러 씩 웃었다.

“이 얼굴이 잘 잔 걸로 보여?”

카렌은 입술을 잔뜩 내밀며 대꾸했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날 걱정했다는 걸 잘 안다.

“도련님이 이기실 거라는 데는 요만큼의 의심도 없습니다만···.”

발닉의 얼굴 역시 어두웠다.

“놈들이 무슨 술수를 부릴지 알 수 없으니 걱정인 것뿐이지요.”

그 말에 그때껏 조용히 있던 농농이가 나섰다.

[앙! 앙앙!]

앨빈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쓰자, 앨빈이 얼른 이를 통역했다.

“아이다페올트 왕자님이 너무 걱정말라 하시는데요.”

[앙··· 옹옹!]

“네가 다치도록 내가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옹, 으그으그, 앙!]

“이 몸이 상대의 살기를 감지하여 위험의 싹을 제거할 것이니.”

나는 농농이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농농이 또한 여느 때와 달리 몹시 진지한 시선으로 마주 끄덕인다.

‘농농이야말로 이번 일에서 핵심 역할을 할 인물이니.’

브렉이 결정한 결투 장소는 번화가 한가운데에 자리한 탁 트인 광장이다.

둘러싼 수많은 구경꾼들 사이에 암살자들이 작정하고 숨어들어간다면, 제아무리 레핀 가문의 사병대라도 그들을 색출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겐 살기를 감지할 수 있는 인물이 있으니까.’

그게 바로 농농이의 역할이 될 거다.

나는 농농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사병대장에게 네 역할에 관해서는 이미 귀띔해놨으니 잘 부탁한다.”

[옹옹, 앙!]

“걱정말라 하십니다.”

“저희 역시 농농 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일반인들에 비해 살기를 알아차리는 본능이 몇 배나 뛰어난 롯과 그 형제들도 암살자 색출에 나서겠다고 했다.

“주군···.”

그럼에도 몇몇은 여전히 얼굴에서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워내지 못했지만.

나는 축 처져 있는 디터의 어깨를 툭 쳤다.

“네가 이러면 어떡하나, 디터.”

“죄송합니다.”

내 신변이 걱정된다며 아카데미에서부터 나와 동행해 이곳으로 온 리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협조하겠다.”

“고마워.”

“몸조심해라.”

그것을 끝으로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며 가신들을 집무실에서 내보냈다.

‘결투 시점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두어 시간.’

나라고 긴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런 티를 내지 않은 것뿐.

“···.”

미세하게 떨려오는 손가락을 말아서 주먹을 꽉 쥔 순간.

반가운 메시지가 떴다.

[도전과제 ‘명탐정’ 달성! - 필리아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보상 ‘금광 지도’를 수령했습니다.]

금광 지도라니···?

당황한 나는 눈앞에 나타난 지도를 펼쳐보았다.

그간 사건 사고가 너무 많아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이건 내가 임리 자작에게 사들인 바로 그 땅이잖아.’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이 지도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금광 조사를 벌여야겠다.

“막간을 이용해 새로운 도전과제를 확인해볼까.”

기존의 다섯 개 중 네 개가 완료되어 갱신됐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도전과제를 불러낸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암살자에게 공격당할 뻔했나요?

-숙적 중 한 명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나요?

-우만을 가신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나요?

-국왕이 내준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나요?

-금광을 발견했나요?

맨 위에 적힌 도전과제는 아마도 결투 현장에 배치되었을 암살자를 말하는 것일 테고.

두 번째 적힌 도전과제야말로···.

‘브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지막까지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결단을 내릴 때였다.

* * *

웅성웅성.

수많은 군중이 둘러싼 가운데 나는 광장 한가운데에 가 섰다.

몇 걸음 앞에는 중립적 가문 소속의 기사 하나가 심판 격으로 서 있었고.

그로부터 더 몇 걸음 앞에는···.

“오늘 반드시 네놈의 목숨을 가져가주지.”

나를 보며 짓씹듯 내뱉은 브렉 헬리오스가 서 있었다.

오늘의 결투를 위해 특별히 차려입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퀭한 눈 밑에 흙빛의 얼굴색까지는 가릴 수가 없군.’

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브렉은 그런 나를 도발하려는 듯 계속해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지만.

‘암살자 색출은 잘되고 있는 건가?’

내 관심사는 오로지 그쪽이었으니까.

흘긋 옆을 돌아보자 내 가신들과 레핀 사병대가 군중에 섞인 채 소리없이 색출 작업에 나선 것이 보였다.

[옹옹, 앙!]

특히 앨빈의 품에 안긴 농농이가 벌써 한 명을 잡아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체포하는 법이 어디 있냐며 상대는 격렬하게 반항했지만.

‘뒷말이 나오더라도 안전부터 확보하는 게 우선이니까.’

그 광경을 보고 흠칫 굳어버린 브렉을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

“비겁한 꼼수를 준비하지 않고선 결투도 신청할 수 없나 보지?”

“누, 누가 뭘 준비했다고··· 날 음해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브렉은 끝까지 잡아뗐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허리에 찬 검을 검집에서 창- 하고 뽑아들었을 뿐.

‘아다만티움 검.’

겨우 몇 달 전에 받은 거지만 아주 오래 전 일처럼 느껴진다.

금속 중 최강의 금속인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이 검이라면···.

‘브렉 놈이 저 안에 어떤 갑주를 걸쳤든, 놈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을 수 있다.’

검을 꼬나들고 제자리에 서자.

브렉 놈 또한 검집의 검을 꺼냈다.

“네놈과 네 아비가 실추시킨 우리 헬리오스 가문의 명예를···.”

브렉은 주변의 반응을 유도하려는 듯 일부러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회복하겠다!”

비장한 대사와는 달리 군중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평민인 그들에게 귀족 간의 싸움은 딴 나라 일이나 다름없을 거다.

“글쎄, 명예 회복은커녕···.”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검을 가슴 께까지 들어올렸다.

“개죽음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브렉 헬리오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브렉은 욕설을 내뱉었지만, 시간을 끌려는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얼른 심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만 시작하지 않고 뭐하나!”

“아, 알겠습니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던 기사는 브렉의 재촉에 황급히 한 손을 들어올렸다.

“브렉 헬리오스 대 세자르 레핀의 결투를 시작한다!”

군중 사이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냥 신이 난 그들과는 달리, 나와 브렉은 잔뜩 긴장한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로선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농농이 무리가 색출해낸 의심 인물은 서너 명이 전부.

헬리오스 가문이 어떤 준비를 했는지 전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간 허점을 내주는 셈이 돼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작해버렸으니···.’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브렉의 검을 실수 없이 막아내는 것.

그리고 틈이 생기는 그 즉시-

‘그의 목숨을 취한다.’

나는 두 다리를 넓게 벌린 안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브렉 또한 어릴 적부터 뛰어난 검 실력으로 명성을 날린 귀족 자제답게, 빈틈 없는 자세로 날 맞이했다.

“···.”

우리는 서로 간격을 유지해가며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내가 다가가면 저쪽이 물러서고.

내가 물러서면 저쪽이 다가오고.

그렇게 잠시 탐색의 시간을 가진 후.

부우웅-

브렉의 검이 먼저 찔러들어왔지만!

‘느리군.’

챙! 챙캉!

나는 곧바로 막아내는 동시에 여유롭게 도발까지 해주었다.

“그간 검이 많이 무뎌진 것 같은데.”

“···네놈이야말로!”

롯의 검술이 규격 외의 검술이라면, 브렉의 검술은 왕국 전통 검법의 정수였다.

뒤로 빠진 브렉의 검이 곧바로 방향을 틀어 빛처럼 찔러들어 왔다.

‘이번엔 조금 날카로웠지만.’

챙! 나는 그것 역시 무리없이 쳐냈다.

그렇게 약 1분간.

서로가 서로의 틈을 노리며 검을 찔러넣었지만, 유효타를 날리지 못했다.

‘역시 실력 자체만으론 큰 차이가 나지 않는군.’

어려운 상대는 아니지만, 동시에 방심해서도 안 되는 상대다.

물론 결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하는 데는 내 탓도 있다.

위험 부담이 큰 만큼, 가급적 확실한 한 방을 날리고 싶으니까.

‘그전까진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고, 저쪽의 힘을 빼놓는다.’

챙! 챙캉!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이번 승부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심산인지, 브렉이 온 힘을 실어 검을 부딪쳐왔지만···.

‘리포스트 쉬르 페르!’

그 힘을 역으로 실려 보낸 반격에, 브렉이 큭 하며 신음했다.

‘여기까지일 것 같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호각을 이루었지만.

어느덧 시작한 지 3분에 가까워지자 브렉의 호흡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땀을 비오듯 흘리는 그와는 달리, 나는 다시 한 번 검을 고쳐쥐며 자세를 바로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제아무리 브렉이 최강의 실력을 뽐낸다 한들, 어디까지나 그건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의 얘기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 생활화된 용병들 사이에 껴서 매일처럼 체력 단련을 하는 나와는···.

“시작점부터가 다르단 말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어느새 비어버린 그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찔렀다.

휘이익 부웅!

“흐엇!”

브렉이 깜짝 놀라며 뒤로 펄떡 물러났다.

간신히 이번 일격은 피했지만, 굳건히 유지하던 자세의 균형은 무너진 상황.

‘지금이다!’

이번을 놓치면 다음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른다.

내가 재빨리 아다만티움 검을 내지르려던 순간-

“그렇게는 안 될 거다!”

브렉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강대한 힘이-

[‘무효화의 목걸이’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잠재우는 힘’(액티브)이 무효화됩니다.]

-무형의 벽에 부딪혀 무효화되었다.

“···!”

경악하여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브렉을 보며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소용없다니까?”

그때, 우리를 둘러싼 군중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보고해왔다.

“색출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이제야 맘 놓고 싸울 수 있겠군.

나는 검을 고쳐쥐며 말했다.

“브렉. 넌 네 무덤을 네 손으로 판 거다. 결투 현장에 암살자를 배치해놓은 걸로도 이미 살인미수 혐의를 받기엔 충분-”

“하, 지금 장난해?”

내 말을 자르는 브렉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는데.

“크크크, 살인 미수가 아니라 난 네 놈을 죽일 생각으로 나온 거라고!”

광기 어린 웃음 소리에 살짝 소름이 돋으려 했지만, 말도 안 되는 허세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날 죽이겠다고? 그래봤자 이미 늦었···.’

-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옆에서 강렬한 살기가 느껴졌고.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세자르 공자님!”

탕! 탕탕!

세찬 총격음이 고막을 때렸다.

‘설마··· 총병이 매복하고 있었던 건가?’

등 뒤에 소름이 쫙 돋았다.

옆을 돌아보자, 나를 향해 날아오는 탄환이 보였다.

‘안 돼!’

비명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네놈을 죽이겠다고 했잖나!”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브렉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감각이라는 감각은 오로지 저 멀리서 날아오는 탄환에 집중돼 있었으니까.

기껏해야 손톱만 할 크기의 탄환이 시야를 꽉 채우며 다가온다.

‘이게 바로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지는 감각이로군.’

죽음이 목전에 와 있다는 감각 때문일까.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신경계가 과민하게 경고한다.

‘더는 피할 수 없다.’

쿠오오오-

영화 속 슬로모션처럼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탄환이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왔다.

이곳에서 보낸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펼쳐지···려던 순간.

눈앞에 익숙한 메시지가 떴다.

[2단계 스킬 ‘그림자 방패’(패시브)가 자동으로 발동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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