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79화 (79/176)

배신자는 너다

공작은 종이에 적힌 문구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안 나가면 안 되겠나?”

그러고는 흠칫 놀라버렸다.

자신이 세자르의 결투를 만류하리라고는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다행히 세자르는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의상 하시는 말씀이시겠죠?”

“그렇다기보단···.”

공작은 말을 흐렸다.

그 또한 헬리오스 가문의 결투 신청을 절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으니까.

‘헬리오스 가문엔 명분이 너무 많다.’

헬리오스 가문의 작위 회수.

이에 대한 귀족 사회의 반발은 딱히 없었지만, 모두가 불만 없이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왕가와 레핀 가문이 손 잡고 술수를 부린 것 아니냐.’

‘헬리오스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연극에 불과하다.’

그런 말이 암암리에 나도는 상황에서 세자르가 결투 신청을 거부한다?

레핀 가문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그 누구도 그들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을 터다.

‘그리고 세자르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이제 불과 십 대 후반의 나이에 불과하지만, 세자르의 눈빛은 노련한 정치가처럼 여유롭게 빛났다.

‘율리아나의 아들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군.’

그 모습에 공작은 든든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입안이 쓰기도 했다.

“결투를 거부할 수 없는 건 명백하지만, 네게는 아주 위험한 일이 될 거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헬리오스 가에서 네게 무슨 위협을 가하려 들지 모르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에 걸맞는 대비를 하고 가야겠지요.”

세자르는 피식 웃더니 덧붙였다.

“그래도 전보단 상황이 훨씬 나은걸요.”

“전보다라니?”

“모르셨습니까? 제가 아카데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곳의 검술 교관이었던 림 바야르 경이 제게 결투를 신청했었거든요.”

모를 리가 있나.

공작은 사람을 심어 세자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게 했고, 림 바야르가 예의 결투를 신청했다는 사실 또한 보고받은 바였다.

‘그 한심한 놈이···.’

‘어찌할까요, 각하. 중간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공작은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놔두기로 했다.

‘세자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두고 보고 싶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세자르는 언변 하나로 림 바야르의 결투 신청을 무효화했으며.

‘그대가 말하는 ‘기사의 자긍심’이란,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불리한 상대를 완력으로 이기는 것을 의미하나 보지?’

관중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동시에 상대의 속을 완전히 뒤집는 그 대사를 전해듣고-

공작은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으니까.

‘율리아나!’

타고난 신체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수준급의 언변과 재치로 레핀 사병대를 화기애애하게 해주었던 장본인.

‘고 녀석 말하는 것 보면 꾀돌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언젠가 측근 하나가 말했던 그 꾀돌이스러운 면모를, 그녀의 자식에게서 발견한 공작은 감회가 새로웠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세자르를 이전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

생각에 잠겨 있던 공작의 귓가에 세자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거나 걱정마십시오, 아버지. 저 역시 브렉을 상대할 계획은 다 있을 뿐더러···.”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림 바야르를 상대할 때만 해도 장난기로 빛나던 그의 눈은, 이제 어느덧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일을 수도 귀족 가문들의 불만을 잠재울 기회로 역이용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면야 할 말이 없지만···.”

“제 걱정은 마시지요.”

진중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공작은 청년을 돌아보았다.

세자르는 많은 걸 책임진 사람 특유의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아니, 공작 각하.”

뭐든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공작이 고개를 들자, 청년의 말이 이어졌다.

“레핀 가문의 사병대를 결투 현장에 배치해주십시오.”

“···.”

공작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사병대가 해야 할 역할이 무언지 충분히 짐작갔으므로.

더불어 이제 겨우 십 대 후반에 불과한 세자르의 어깨에 실린 부담감 또한 익히 실감났다.

“알겠다.”

결투 시일은 모레.

사병대를 배치하고, 현장에 도사릴 예상 밖의 위협을 대비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었다.

“사병대의 전권을 네게 넘기마. 곧바로 연병장으로 향할 거냐?”

“시간이 부족하긴 합니다만, 그에 앞서···.”

세자르의 두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처리할 일?”

공작이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그러거라.”

세자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공작의 집무실을 나섰다.

‘이제는 나조차 저 아이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군.’

어느새 멀어져버린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레핀 공작은 설명할 수 없는 감회에 잠겼다.

* * *

오후 3시, 수도 번화가의 커피하우스.

밀담을 원하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방에서 나는 약속 상대를 기다렸고.

우만은 내가 일방적으로 정한 약속 시각에 맞춰 도착했다.

“···.”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나, 여기저기를 힐끗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꽤 긴장한 모양이다.

맞은편에 앉은 우만은 앙다문 잇새 사이로 내뱉듯 말했다.

“확실치 않은 정보로 억측이나 들려주려고 날 부른 거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돌아가고 싶나?”

나는 탁자에 놓인 잔을 들어올리며 대뜸 물었다. 우만은 흠칫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네놈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온 의문의 해답을 가져왔다는 상대에게···.”

“···.”

“나라면 그렇게 건방지게 굴지 않을 텐데 말이지.”

그 말에 우만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고분고분해졌다.

나는 내가 가져온 서류들을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말로 설명해주는 것보다 이 편이 빠르겠지.”

맨 위에 있는 것은 호적 관련 서류였다.

우만의 본명인 레온 드 빈터와 그 여동생 필리아 드 빈터의 호적증명서 및 족보.

두 번째는 필리아 드 빈터의 사망 선고를 내린 의사의 소견서.

“내 친구가 소속된 정보 길드에서 조사한 내용들이다.”

우만은 두툼하게 쌓인 서류들을 집어들어 하나둘씩 읽기 시작했다.

“이 서류 외에도 길드원들이 발로 뛰어 수소문한 것에 따르면···.”

“이럴 리가 없어.”

의사의 소견서를 막 다 읽은 우만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필리아는··· 필리아는 물에 빠져 죽었단 말이야.”

나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우만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물에 빠진 건 맞아. 하지만···.”

우만이 탁자에 내려놓은 소견서 한 부분을 가리켜 보였다.

“직접적인 사인은 그게 아냐.”

소견서에 적힌 ‘교살’이라는 글자가 섬뜩해 보였다.

“···.”

“고통스러운 기억이겠지만 당시를 회상해봐라, 우만.”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덕분에 카렌의 길드원들은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원하는 정보를 생각보다 수월하게 끌어낼 수 있었고.

그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증언했다.

‘아주 괴이한 일이었지요. 워낙에 유량이 적어 생전 불어나는 법이 없는 하천이,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넘쳐났으니까요.’

‘더 이상한 일이라면··· 그 이후로 그 하천은 단 한 번도 불어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작년에 전국이 홍수로 몸살을 앓았을 때조차 말이지요.’

생각에 잠긴 우만을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일이지 않나? 마른 하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평소 넘치는 법이 없는 하천이 넘칠 정도로 비가 오고.”

“···.”

“하필이면 그렇게 넘친 하천에 네 여동생이 빠져서-”

“그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고통스러운 듯 우만은 내 말을 잘랐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지만.

나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힘들어도 직시해야 한다.”

“그만, 그만하라니까!”

“대체 언제까지.”

나는 ‘교살’이라 적힌 부분을 다시 한 번 짚어 보였다.

“···네 여동생을 죽인 주범에게 꼬리를 흔들 참이냐?”

“···!”

우만은 두 눈을 부릅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도 무의식 깊숙한 곳에선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그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하다는 걸,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너라면 모를 수가 없었겠지.”

“···.”

“게다가 타릭은 4대 원소를 다루는 자. ···마른 하늘에서 비를 퍼붓게 만드는 건 그의 특기 중 특기일 뿐 아니라.”

이제 시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우만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놈에게 사람을 목 졸라 죽이는 건 문제도 아닐뿐더러, 어린 여자들에게 기이할 정도로 집착한다는 걸···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나.”

우만은 황망한 눈빛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타릭은 원작에서도 일종의 도착증이 있는 캐릭터였지.’

팰러스의 수하들 중 최악의 악질.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길 뿐 아니라, 젊은 여자를 죽이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끼는 인물로 나왔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타릭 저 새끼 언제 죽냐는 댓글이 일종의 드립처럼 굳어졌겠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빈터 가문은 2왕자의 사고를 사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멸문지화의 위기에 몰렸고.

빈터 경과 그 부인은 자식들만이라도 살리려고 레온과 필리아 남매를 비밀리에 도주시켰다.

하지만.

‘신앙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

레온과 필리아 두 사람 다 이능자였으며.

독실한 알레스교 신자였던 그들의 부모는 두 아이가 이능을 보이자마자 교단에 그 사실을 알려 이능자로 등록해놨다.

그리고 그 이능자 목록의 일부가···.

“리아나 부인, 당시로선 레핀 공작 부인의 손아귀에 들어간 거다.”

“···.”

“공작 부인과 팰러스는 우만 네가 지닌 이능을 탐냈지만, 필리아의 이능은 원하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교단에서 비밀리에 입수해온 ‘이능자 목록’의 한 부분을 가리켜 보였다.

“그녀의 이능이 ‘무효화’였거든. ···다른 이능자가 지닌 능력을 무효화하는.”

우만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냐고?”

나는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고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팰러스는 두려웠던 거다.”

“두렵다니, 무엇이?”

“필리아가 자신의 이능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우만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팰러스 님에게··· 이능이 있다고?”

나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여지껏 눈치채지 못했나?”

우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너처럼 명석한 자가 어째서 팰러스 앞에만 가면 두뇌가 없는 것처럼 그의 말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게 되는지.”

“···.”

“그런데 팰러스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또 그 틈을 타 팰러스를 향한 의심이 끓어올랐다가.”

내 말을 경청하는 우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마침내 돌아온 팰러스의 얼굴을 보면 그런 의심이 또 물거품처럼 사그라드는지.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냐는 말이다.”

우만의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저런 반응을 보아, 본인 또한 그 사실을 의심해본 모양이다.

이쯤에서 나는 쐐기를 박았다.

“팰러스의 이능자명은 ‘세뇌하는 자’.”

“···!”

“즉, 너는 여태껏 그의 세뇌에 걸려들어 네 여동생을 죽인 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우만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거야말로.’

원작의 우만이 팰러스를 배신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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