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결판을 내야 할 시점
나는 테오 2세 앞에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소년의 시선이 내 위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폐하, 어쩐 일로 이런 곳까지-”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자 소년의 웃는 얼굴이 공작에게로 향했다.
“레핀 공작, 초대해주어 고맙소.”
“···천만의 말씀입니다.”
당황한 것은 공작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국왕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은 의례상이지, 그 누구도 국왕이 제 발로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기 마련이니까.
초대에 응한다는 답장조차 보내지 않고 온 것을 보면, 테오 2세는 일부러 기별하지 않은 듯했다.
‘겉만 어린애이지 속은 십 년 묵은 구렁이나 다름없다니까.’
그런 속내는 생각조차 못한 채, 테오 2세가 내게 말을 건넸다.
“짐이 공에게 직접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었는데 연회장에 보이지 않더군.”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의 의문이었으니.
‘국왕이 아까 그 얘기를 들은 걸까?’
공작과 나는 목소리를 꽤 낮추어 대화를 나눴다. 주변에 나무가 울창한 만큼 소리가 제대로 들렸을 리는 없지만,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법.
‘만약 들었다면 어디서부터 들었을까.’
방금 전 공작과 나눈 대화를 빠르게 복기해보자.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꺼냈던 것이 기억났다.
‘사생아를 왕으로 만들 방법이 없지는 않다.’
이런 젠장.
물론 나야 왕이 될 생각은 요만큼도 없으며, 누군가가 이 세자르를 이용해먹을 가능성을 시사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러나.
‘국왕이 그 말을 들었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텐데.’
더군다나 이후는 내내 이언 왕세자를 내 아버지로 지칭하며 대화하지 않았던가.
차오르는 불안감에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데, 소년 국왕이 나를 돌아보았다.
“세자르 공.”
“네, 폐하.”
“연회장으로 함께 돌아가지 않겠소?”
나는 꾸벅 허리를 숙인 뒤,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러는 동안 국왕의 눈치를 살폈지만, 소년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기색이다.
‘역시 듣지 못한 걸까.’
추후에 카렌의 능력을 통해 속내를 슬쩍 떠봐야겠다.
헌데 어째서 날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걸까.
···그 의문은 생각보다 금방 풀렸다. 왜냐하면.
“저기 봐봐!”
“어머, 폐하가 세자르 공자와···.”
“국왕 폐하가 세자르 공자를 총애하신다더니 그게 정말···.”
“역시 왕가와 레핀 가문이 밀월 관계라는 게···.”
나와 국왕이 나란히 서서 연회장 앞쪽으로 향하는 동안.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려서 떨어질 줄을 몰랐으니까.
‘이런 걸 노렸군.’
수도 귀족 가문들이 팰러스 레핀을 위시하여 왕가에 등을 돌리고 있던 찰나.
고립무원 상태였던 국왕에게 나란 존재는 일종의 탈출로나 마찬가지였고.
레핀 가문의 적자로 인정받은 지금에는···.
‘세자르 한 사람만이 아닌, 레핀이라는 가문이 왕가를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으니.’
게다가 이는 내게도 전혀 나쁜 접근법이 아니다. 오히려 윈윈에 가까운 관계라고 할까.
“폐하, 이제 연회장에 다 왔으니···.”
나는 소년의 옆얼굴을 힐끔거리다 조심스레 한 마디를 던졌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시지 않겠습니까?”
내숭은 그만 떨고 너 하려던 거 해라, 라는 말에 소년 국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세자르 공.”
국왕은 좌중의 이목이 제게로 집중된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세자르 공의 희소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이리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다니.”
“···.”
“그 자체만으로도 기쁜 일이지만, 세자르 공은 짐에게도 무척 소중한 인재인 만큼 이 자리에 와준 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전하오.”
“···!”
이것으로 국왕은 자신이 세자르와 한 배에 탔음을 모두의 앞에서 명시했다.
이 나라의 명망 있는 귀족들이 전부 모인 가운데, 그는 인사 치레 같은 말을 잠시 늘어놓고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짐 또한 이 기회를 기념하여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표할까 하는데.”
좌중의 눈빛에 기대감이 실렸다.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세자르 공은 얼마 전부터 해로드청년회에 정식 입단하여 활동을 시작했소.”
“···!”
그 말에 좌중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해로드청년회에 들어간다는 건 향후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실권자가 될 거라는 의미이니까.
테오 2세가 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헬리오스 가문의 부패를 발각해낸 것도 따지고 보면 공의 활약 덕분. ···이 자리를 빌어 짐은 그대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네.”
나를 향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한층 뜨거워졌다.
‘다들 헬리오스 가문 사건을 모르지 않을 테니.’
선망, 기대, 질투, 시기···.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국왕 앞에 허리를 깊이 숙였다.
“폐하의 하해 같은 은혜 덕분입니다.”
그렇게 모두의 앞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도전과제 ‘정식 입단 완료’ 달성! - 해로드청년회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도전과제 ‘이젠 호부호형도 오케이’ 달성! - 적자의 자격을 인정받았습니다.]
[특수과제 ‘일석이조’ 달성! - 두 개의 도전과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에 이어 곧바로 보상이 주어졌다.
[보상 ‘진실의 단서’를 수령했습니다.]
‘진실의 단서’라는 아이템명에 어리둥절한 순간, 손바닥 안에서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졌고.
인사를 마치며 손을 펼치자 일종의 서류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위조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우만의 호적 증명서였다.
‘이거라면.’
카렌이 핵심적 정보에 접근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줄 게 분명하다.
* * *
세자르의 적자 자격을 인정하는 연회가 성황리에 끝난 지 1주 후.
우만은 간만에 헬리오스 가의 저택을 방문했다.
브렉과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 처음 찾는 백작저는 휑하기 그지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젠 백작저가 아니지만.’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공식적으로 작위를 회수당한 이후.
헬리오스 가문은 쇠퇴일로를 걸었다.
가문 구성원의 절반 정도가 살 길을 찾아 이탈했으며.
그간 헬리오스 가에 충성을 맹세하던 가신 가문도 대부분이 반기를 들고 나가버렸다.
“···부귀영화가 사라지는 건 한순간의 일이로군.”
하인의 안내를 받아 우만은 브렉의 방에 도달했다.
“브렉 공자님, 우만 님이 오셨습니다.”
열린 문 뒤로 드러난 브렉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뭇 아가씨들의 마음을 설레게 해던 미남자는 어디로 가고, 며칠째 깎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한 데다 다 구겨진 옷차림을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브렉.”
우만의 부름에도 브렉은 바로 돌아보지 않았다. 책상 끝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더니, 한 박자 뒤에야 우만을 돌아보았다.
“하, 내 몰골을 비웃으러 온 건가?”
자조 섞인 대꾸에 우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들었던 세자르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브렉과 타릭 중 한 명이, 모종의 거래를 요구하며 내게 그 정보를 넘긴 거라면?’
‘지금 같은 편에 있다고 해서 영원히 같은 편이리라는 순진한 착각은 하지 말라는 거다.’
그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자신은 곧바로 브렉을 의심했었다.
브렉이 세자르와 내통했으며, 자신의 비밀을 팔아넘긴 대가로 뭔가를 약조받지 않았을까 하며.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의심이었던가.’
지난날의 오판을 뼈아프게 시인하는데, 브렉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롯이 도망쳤다.”
“···롯이?”
“그냥 도망친 게 아니야.”
브렉의 입가에서 뿌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났다.
“그 빌어먹을 세자르 놈에게 갔단 말이다.”
“···!”
“나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브렉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비록 채찍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그는 롯을 내심 아끼던 터였으니까.
“어떻게 된 거지?”
우만은 상대를 흥분시키지 않으려 조심하며 브렉에게서 정보를 캐냈다.
그 결과 알아낸 사실은 놀라웠다.
‘헬리오스 가문 사건이··· 결국은 롯의 오빠들을 구출하기 위해서였다고?’
덕분에 롯과 그 형제들을 세자르 본인의 가신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헬리오스 가문을 풍비박산내기까지.
우만은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이거야말로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는 격이 아닌가.’
그 순간, 세자르가 남겼던 말- ‘배가 기울고 있다’는 표현이 자꾸만 뇌리를 감돌았다.
팰러스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기울어진 균형추를 되돌리기란 점점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지금 내게 팰러스 님을 따라야 하는 명분이 남아 있는가.’
우만은 명분과 정당성, 그 둘 중 무엇도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팰러스 님께선 네게 뭐라고 하셨나?”
이러한 우만의 질문에도, 브렉은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버림받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고.
‘쓸모없어진 가신을 곧바로 버리는 주군을··· 신뢰할 가치가 있는가?’
어째선지는 알 수 없으나, 팰러스를 직접 보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를 향한 우만의 믿음 또한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이것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의 브렉은 가만 놔두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반쯤 미쳐버린 브렉의 모습을 잠시 시야에 담다가 우만은 미련 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가자, 편지 하나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편지를 뜯어 첫줄을 읽은 순간.
놀라움은 더더욱 커졌다.
『네 여동생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아냈다.』
* * *
과제 달성으로 받은 보상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문제의 서류를 카렌에게 넘긴 지 며칠도 안 되어 그녀는 내 기숙사로 달려왔고.
‘다 알아냈어! 다 알아냈다고!’
욕조 밖으로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를 외치며 날 붙잡았으니까.
‘뭘 알아냈다는 건데?’
‘본인이 의뢰해놓고 지금 장난해?’
카렌은 승리의 브이자를 그리며 보고서를 건넸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보고서를 죽 읽어내린 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박인걸.’
‘그치? 이거 미친 거 맞지?’
카렌의 말이 맞았다.
우만이 미끼를 물고도 남을 만큼의 미친 떡밥이 분명했으니까.
그녀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우만에게 보낼 편지 내용을 구상했고. 하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웃돈을 주어가며 편지를 비밀리에 전달했다.
그것이 바로 나흘 전의 일.
답장을 고대하던 나에게 드디어 편지 하나가 도착했지만.
“···기대했던 인물에게서 온 게 아닌데?”
편지의 발신인은 우만이 아니었다.
내 말에 편지 봉투를 힐끗거린 디터의 눈이 커졌다.
“주군, 이건···.”
“그래. 브렉이 분해도 보통 분한 게 아니었나 본데.”
나는 편지를 뜯어보았고 그 요지는 단순했다.
브렉 헬리오스.
머리 끝까지 돌아버린 브렉 놈이 내게 보낸 결투 신청장이었다.
『헬리오스 가문의 적장자인 나, 브렉 헬리오스는 세자르 레핀 공자에게 헬리오스 가문의 명예를 걸고 결투를 신청한다. (후략)』
편지는 꽤 길었다.
내가 어떻게 헬리오스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는지.
수도에서 몇 백 년간 왕가에 충성을 바쳐온 자신들을 어떤 식으로 중상모략했는지.
‘구구절절도 이런 구구절절이 없군.’
브렉이 이 부분을 강조한 것은, 내가 이 결투를 피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즉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이지만···.
발닉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브렉 공자는 대체 뭘 믿고 도련님께 결투를 신청했을까요.”
그 경우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째, 내게 이능 무효화 능력이 있음을 전혀 모른 채 ‘잠재우는 이능’을 사용할 작정이라는 것.
‘팰러스나 리아나 부인이 브렉에게 과연 그 사실을 귀띔해주었을까?’
그건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적어도 롯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브렉에게 그에 관한 얘기를 한 적도 없다는 것.
둘째, 도전과제 ‘암살자에게 공격당할 뻔했나요?’가 아직도 달성되지 않은 것을 미루어보아···.
나는 발닉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결투 현장에 암살자를 숨겨놓을 수도 있지.”
“···암살자라뇨?”
“브렉이란 놈 성격상, 처음부터 정정당당하게 결투에 임할 생각은 아예 없을 거다.”
더군다나 지금 놈에게는 더 잃을 것도, 이보다 더 아래로 떨어질 가능성도 없다.
이미 나락에 있는 자에게 명예와 정정당당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결투를 청하는 거겠지.”
나는 맨 마지막에 적힌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결투의 종료 시점 : 둘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을 때까지』
내 목숨을 취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브렉은 잃어버린 팰러스의 신뢰와 가문의 명예를 동시에 되찾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그때껏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카렌이 불쑥 물었다.
“죽일 거야?”
목적어도, 주어도 생략되었으나.
질문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했다.
“···.”
이 세계 속에 떨어진 이후로 최대한 불살주의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순간에 이르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비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래야만 한다면, 그래야겠지.”
···놈과는 이쯤에서 완전히 결판을 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