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77화 (77/176)

너나 잘하세요

잠시 망설이던 공작은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름 아닌, 팰러스를 향해.

“팰러스, 아우의 기쁜 소식을 축하하러 먼 길을 달려와주어 고맙구나.”

“···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며 나는 내심 감탄하는 중이었으니.

‘호오.’

방금 전 공작의 대처는 제법 훌륭했다.

겉으로 보기엔 나와 놈의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는 듯하지만.

‘속내를 파고들어 보면 어디까지나 아우인 내게 힘을 실어주는 말.’

모르는 이들은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민감한 이들이라면 충분히 눈치 챌 만한 언사였다.

그 사실을 팰러스라고 모를 리 없었다.

“착각하지 마라, 세자르.”

“착각이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날뛰어봤자 너는 이 거대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순간에 휩쓸려 사라질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것 참 참신한 관점인걸.

“너는 저 닳고 닳은 사내에게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해.”

“글쎄요, 누가 누구에게 이용당하는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지요.”

그 순간.

그 도자기 같은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

팰러스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런 친절한 조언에 나 역시 맨입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형님을 존경하는 동생으로서 한 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듯 서 있는 팰러스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남 걱정 말고 네 앞가림이나 똑바로 해, 새끼야.”

그러고는 미소 지으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

팰러스는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는 게 처음인 듯 두 눈을 부릅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웃는 낯으로 내 할 말만 했다.

“제가 형님을 늘 우러러보는 것 알고 계시지요. 그럼 부족한 아우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등을 돌리고 멀어지려던 순간, 팰러스가 날 불러 세웠다.

“세자르,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무얼 말씀이십니까?”

그는 간신히 입가에 미소를 유지했지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나 역시 이대로 그냥 순순히 넘어갈 생각은 없으니.”

팰러스가 그냥 넘어갈 위인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는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꾸러뜨려야 하는 숙적이며.

‘나 역시 순순히 넘어갈 생각은 없거든.’

그는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읊조리듯 말했다.

“오늘 네가 경거망동한 대가를 곧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돌아보지 않았다.

팰러스가 그대로 연회장 바깥으로 멀어지자, 공작이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찬가지로 자리를 떠나려는 그를 붙잡았다.

“아버지.”

“···.”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공작은 몹시 불편한 기색이었다.

“해주시기로 한 이야기는 마저 해주셔야죠.”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연회장 바깥에 마련된 야외 정원을 가리켰다.

“잠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나 역시 바라는 바였다.

* * *

카렌이 내게 문제의 서류를 가져다준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주 전의 일이었다.

“절대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돼, 세자르.”

“내가 안 그럴 거 알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이건 아주 민감한 비밀이라. 그리고···.”

카렌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마주 보았다.

“나 역시 이 비밀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너에 대한 내 태도가 바뀌진 않을 거야.”

“그게 대체 무슨 말인데?”

“서류 읽어보면 알 거야. ···넌 이러나 저러나 내 주군이라고. 더 물어보지 마.”

새침하게 덧붙이고는 뒤돌아선 카렌.

그땐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민감한 정도가 아니라 핵폭탄급 비밀이잖아.’

그녀가 준 서류는 예전에 내가 도서관 금서구역에서 발견한 서류와 비슷한 형식이었다. 그때 그 서류가 ‘이언 왕세자 암살사건 파일’이라면 이번 서류는···.

‘이언 왕세자의 여인과 사생아.’

어림짐작이긴 하지만, 그 사생아가 다름 아닌 바로···.

“이 세자르 레핀이시다, 이 말씀인가.”

서류를 죽 읽어내려가는데 문장 하나가 눈에 박혔다.

‘이언 왕세자는 레핀 공작의 호위기사 중 하나를 자신의 호위로 삼겠다고 청했다.’

공식적으로는 레핀 공작이 자신의 호위기사를 왕세자에게 바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왕세자가 일방적으로 호위기사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사의 이름은 ‘율리아나’였다고 말이지.”

레핀 공작의 사생아 세자르.

그 아이의 후견인을 자처한 흑의 기사.

흑의 기사가 섬겼던 이언 왕세자는 ‘율리아나’라는 여기사를 마음에 들어했다라···.

‘사건의 정황이 대충 짐작 가는군.’

레핀 공작의 호위기사였던 율리아나가 어떤 연유로 이언 왕세자의 눈에 띄었고.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남녀는 빠르게 사랑에 빠졌지만···.

일개 귀족의 아내도 아니고, 무려 왕세자비 아닌가.

‘평민 기사를 아내로 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주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을 테고, 결국 율리아나는 비밀리에 사생아를 낳게 되었겠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아이를 거둬서 키운 것이 왕세자의 호위 ‘흑의 기사’였던 거고, 이 사생아가 바로···.

“레핀 가문의 세자르다, 이 말이로군.”

흑의 기사는 내란에 휘말린 탓에 세자르를 공작에게 맡기게 된 거고 말이다.

예전에 카렌이 전달해준, ‘흑의 기사’가 남겼다는 쪽지를 꺼내보았다.

『공작각하께.

약속은 반드시 지켜주길 바라오. 그 아이는 각하께도 소중한 부하였으니.』

여기서 말하는 ‘그 아이’가 율리아나이고, 율리아나는 레핀 공작에게 총애받던 기사가 아니었을까.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자르가 공작의 사생아도 아닌, 왕세자의 사생아라니.’

맙소사.

이건 그냥···.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있나.”

나는 남일처럼 혀를 쯧쯧 찼다.

그러지 않으면 이 충격이 감당 안 될 정도였으니까.

‘세자르의 비밀이 이 정도라면, 팰러스나 리아나 부인에게 숨겨진 비밀은 어느 정도일지 기대가 되는걸.’

어쨌거나.

세자르의 뒷배경에 이런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졌음을 알고 나자, 공작가 구성원들의 태도 또한 이해가 갔다.

일단 팰러스는 세자르를 일종의 보험으로 데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자신이 전면으로 나서기 전, 세자르를 이용해 정국을 혼란에 빠뜨린다든가.’

물론 사생아에겐 왕위 계승권이 없지만, 이언 왕세자에겐 정실 부인이 없었으니 그럴싸한 명분만 내세운다면-

사생아인 세자르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다.

‘물론 엄청난 피바람이 불겠지만.’

공작부인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적대적이었던 것 또한 이해가 갔다. 그녀는 애시당초 위험의 싹을 잘라버리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던 거다.

“결론적으로는 리아나 부인의 판단이 옳았던 셈이군.”

이 세자르의 존재가 결국은 팰러스의 발목을 붙잡는 원흉이 되었으니.

그러나,

아직 단 한 가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레핀 공작은 대체 왜 세자르를 받아준 것일까.’

정황을 보면 흑의 기사가 멸문지화를 당해 쫓기는 상황이 되기 직전, 소년을 공작에게 맡긴 것 같다.

그런 민감한 처지의 아이를 아무 대가 없이 맡은 이유는 무엇이며.

그렇게 데려온 아이를 그토록 방치해두었던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로부터 2주가 지난 지금 이 시점.

나는 그 해답의 목전에 와 있었다.

* * *

평소에는 보통 닫아두지만 오늘 연회를 위해 특별히 개방한 야외 정원.

정원사의 세심한 손길이 느껴지는 초록빛 정원을 말없이 거닐며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여간해서는 엿듣지 못할 깊은 곳으로 다다른 후에야 공작에게 말을 붙였다.

“여기면 괜찮겠습니까, 아버지.”

정원 안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자 공작이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슨 질문을 제일 먼저 하고 싶느냐?”

“그렇게 물으신다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 질문했다.

“어째서 저를 데리고 오신 겁니까?”

“어째서라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몹시 민감한 상황의 아이를 덜컥 맡아서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공작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 마디 던졌다.

“혹시··· 왕위계승권 때문입니까?”

그 말에 공작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상한 질문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여태 네가 했던 질문 중 제일 멍청한 질문이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생아에게 계승권이 없다는 건 저 또한 잘 압니다만···.”

공작의 두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말했다.

“사생아를 왕으로 만들 방법이 없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

공작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 참 너다운 발언이구나.”

···너다운 발언이 뭔데?

의외의 반응에 의아해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작은 이렇게 말했다.

“동시에··· 네 아비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기도 하고 말이지.”

“제 아비 말씀이십니까.”

공작은 그제야 결심을 굳힌 얼굴로 말을 꺼냈다.

“네 어미가 누구인지 말해주기에 앞서, 네 아비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느냐?”

“네.”

“그것까지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쉽겠구나.”

공작은 담담하게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와 이언 왕세자는 남부지방에 함께 원정을 나간 것을 계기로 알게 되었으며.

“전하는 보기 드문 성품을 지니신 분이셨다.”

“보기 드물다뇨?”

“글쎄. 선왕이신 유스톤 폐하처럼 무인다운 기개가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선왕 유스톤 2세가 전형적인 무인의 표본이었다면, 그의 아들들은 좀 달랐다고 한다.

첫째인 이언은 뛰어난 검객인 동시에 소탈하면서도 정치력이 있는 타입이었고.

둘째인 에르곤은 문인 타입으로 학문의 열정을 지녔다고 했다.

“본인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달까.”

아마 이언이 선왕의 뒤를 이어 왕 자리에 올랐다면 왕실의 힘이 지금보다 훨씬 공고해졌겠지만.

“왕세자로서의 지위가 처음으로 흔들리게 된 계기가 바로···.”

공작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 말을 이었다.

“율리아나였으니까.”

율리아나는 레핀 공작의 사병대에서 활약하던 어린 여기사였다고 한다.

공작이 타지의 전투에 나갔다가 탁월한 신체 능력을 눈여겨 보고 데려온 전쟁 고아 출신이며.

“내게는··· 조카딸이나 다름 없는 아이였다.”

그리고 공작이 이언 왕세자와 함께 원정에 나간 것을 계기로.

왕세자는 저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율리아나와 부쩍 친해졌고. 태어나 처음으로 ‘정치적으로 아무 도움도 안 될’ 감정에 휩쓸렸다.

‘로건 공, 그녀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율리아나를 한낱 갖고 놀 여인으로 보시는 거라면 이 정도에서 그만하시지요.’

‘그런 게 아닙니다, 로건 공. 여인이라면 저도 알 만큼 압니다만, 율리아나는 다릅니다. 그녀를 향한 감정은 일찍이 겪어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공작은 왕세자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세간에서는 이런 걸 사랑이라 부른다 하더군요.’

왕세자는 일생일대의 사랑에 빠졌다.

한낱 전쟁 고아 출신의 기사를 왕세자비로 삼겠다는 그의 포부는 귀족회의 강력한 반발을 야기했고.

그의 지위를 약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그분은 율리아나와 함께 암살당하셨다.”

공작의 표정은 무척 복잡했다.

왕의 재목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 씁쓸한 한편, 아끼던 애제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원망스러운 느낌.

“내가 널 맡은 이유는 율리아나 때문이다.”

“···.”

“내 딸이나 다름없는 아이의 자식인데, 마땅히 내가 맡는 게 도리가 아닌가 싶었으니. 허나···.”

공작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율리아나보다는 이언 전하를 훨씬 더 닮은 널 볼 때마다, 아끼는 마음보다는 원망이 더 커졌다.”

이건 나도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다.

‘세자르를 데려와놓고 신경쓰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인가.’

공작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늘 차갑기만 하던 그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따뜻하게 빛났다.

“그러나 지금의 너는 전과는 다르니 말이다.”

“···.”

둘 사이에 적막이 내려앉은 순간.

하인 하나가 연회장 쪽에서 나를 향해 달려왔다.

“세자르 공자님! 세자르 공자님!”

이제는 도련님이 아니라 공자님이구나.

바뀐 호칭을 새삼 실감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가?”

“그게···.”

하인은 난처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폐, 폐하가.”

“뭐?”

“폐하가 오셨습니다.”

예상치 않은 말에 내 눈이 커진 순간.

“세자르 군, 아니 이제는 세자르 공이라 불러야겠군.”

하인의 뒤로 소년 하나가 나타났다.

“짐 또한 좋은 소식을 축하하기 위해 왔네만.”

“···!”

테오 2세.

소년 국왕이 이곳에 몸소 왔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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