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첫 발톱을 드러낸 순간
테오 2세의 개인실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단 두 명.
노바스 공작과 어머니 안느 모후였으며.
“···결국 그자는 원하는 것을 얻어냈더군요.”
지금 테오 2세는 안느 모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테오 2세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며 안느가 말을 받았다.
“그 고집불통인 레핀 공작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말이지요.”
“글쎄요. 전 어쩐지 알 것 같은데요, 어머니.”
안느는 꽤 즐거워 보이는 아들의 모습을 주시했다.
최근 아들은 기분이 늘 좋았다.
특히 늘 왕실에 소소한 위협거리를 제공했던 헬리오스 가문을 합법적으로 끌어내릴 빌미를 찾아냈을 때는 뛸 듯이 기뻐하지 않았던가.
‘세자르가 헬리오스 가문의 불법 노예 사업장 운영 경로를 밝혀냈다고 하는군요.’
그때부터였다.
팰러스 레핀과 헬리오스 가문을 중심으로 한 수도 귀족파 세력으로 기울어 있던 균형추가,
급격하게 반대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
“이 정도의 공을 세웠는데 짐 역시 무언가 그에 견줄 수 있는 것으로 보답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보답이라 하시면 무얼 생각하시는지요?”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서로 부담스럽지 않은 선물을 생각하고 있는데···.”
안느의 물음에 테오 2세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세자르의 적자 자격 정통성을, 국왕이 보장하며 최종 승인했다고 한 줄 보태는 것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
“더불어 짐 또한 레핀 가문의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고요.”
안느는 침음을 삼켰다.
‘국왕의 보장과 최종 승인.’
테오 2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어마어마했으니까.
‘해로드 왕실과 레핀 가문이 손을 잡았음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제스처.’
그녀는 제 아들이 레핀 가문의 세자르, 아니 이제는 공작가의 적자가 될 ‘세자르 레핀’을 저의 최측근으로 삼고 싶어함을 깨달았다.
* * *
다시 며칠 전.
레핀 공작은 한참 후에나 입을 열었다.
“네가 이전에 부탁했던 것. 다 준비되었다.”
“부탁했던 것···이라뇨?”
“기억 안 나나? 네가 적자가 되면 이 나라의 모두가 알도록 화려한 연회를 열어달라 했던 것.”
아, 그거.
내 입으로 말해놓고 살짝 잊고 있었다.
‘더불어 당신의 힘이 필요할 때 나서줬으면 좋겠다고도 부탁했지.’
일종의 백지수표를 받아놓은 셈이었으니까.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연회는 다음 주말이 어떠냐.”
“다음 주말이면···.”
너무 빠르지 않은가?
그때까지 준비가 될까 싶어 말을 흐리자, 공작이 덧붙였다.
“다 준비해놨다고 하지 않았나.”
이 아저씨도 은근 츤데레인가.
눈을 마주치길 피하는 공작의 옆모습에서 어쩐지 츤데레의 대표 명사 제이콥의 향기가 느껴진다.
“감사합니다, 각하.”
여기서 아버지라고 한 번 더 하면 이 아저씨가 펄쩍 뛸 수도 있으니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고.
그런데 말이지.
“이미 다 결정을 내려놓으셨다 하니 드리는 말씀인데.”
난 이렇게 상대방이 뭔가를 쉽게 줘버리면, 꼭 하나를 더 얻어내고 싶더라고.
“한 가지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공작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무엇이 궁금하지?”
뭐든 질문해보라는 듯한 그의 반응에 나는 대뜸 직구를 날렸다.
“제 어머니는 누구였습니까?”
“···!”
몇 달 전, 카렌에게 내 어머니가 남긴 로켓 목걸이를 주며 정보를 의뢰하지 않았던가.
나중에 카렌은 그 목걸이를 다시 가져와 이렇게 말했다.
‘몇 년 전에 수도 여인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했던 목걸이라던데. 이것만으로는 정확한 소유자를 알아내기 어려웠지만 네가 알려준 사실들 덕분에 자세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어.’
그녀는 두툼한 서류를 내게 전해주었다.
세자르의 친모뿐 아니라 친부의 정체, 그리고 이들과 흑의 기사가 어떤 관계인지.
그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을 담은 문서였다.
그리고 그 문서를 확인한 나는,
역시 공작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공작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까 전보다 훨씬 어두워진 기색으로 입을 다물고 있더니.
되려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어디까지 알고 왔느냐.”
“글쎄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만···.”
문서의 내용이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나는 다 알고 있다는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각하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습니다. 아니, 제 어머니가 누구인가에 더해···.”
나는 침통하게 가라앉은 공작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제 어머니와 각하가 어떤 관계이셨는지도.”
“···!”
이 말로 공작은 깨달았을 거다.
레핀 공작이 나의 친부가 아님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시간을 좀 주지 않겠나.”
공작은 잠시 후에야 힘겹게 입을 열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대망의 연회날.
내 어머니가 누구인지.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신은 그들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말해주겠노라고.
‘기대하던 바로군.’
나는 카렌이 전해준 서류에 빠져 있는 몇 조각의 퍼즐을 공작의 입을 통해 찾아낼 생각이었다.
* * *
대망의 연회날이 되었다.
평소 조용하기만 하던 공작저는 꼭두새벽부터 부산했다.
특히 공작저 실무의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총관은 여기 뛰어다니랴 저기 뛰어다니랴 정신이 없었으니.
“연회장 장식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요리는 최종 확인 마쳤나?”
“초대객 명단은? 명단도 재확인해! 초대장에 답장 온 것들은 어디 있나!”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총관마저 오늘 따라 유난히 긴장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오늘 이 연회가 십 년 만에 처음 열리는 레핀 가문의 공식 연회라는 것.
리아나 부인이 공작저로 들어온 이후 소소하게 사교 행사는 벌였지만, 레핀 가문은 본디 좀처럼 연회를 열지 않는 가풍을 지녔다.
‘사교보다는 무와 전투를 숭상하는 가문이었으니까.’
그리고 둘째.
이 연회에 들어간 예산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나도 사용인들에게서 전해들은 바이긴 하지만, 얼마 전 열렸던 왕궁 연회에 들어갔던 예산의 몇 배는 들어갔을 정도라고 한다.
내게 그 사실을 귀띔해준 사용인은 ‘역대급이지요, 역대급!’이라며 덧붙였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하늘이 어둑해지며 ‘세자르의 적자 인정을 축하하는 연회’의 막이 올랐다.
이번 연회의 초대객 명단은 엄청나게 길었다.
“윈저 가문 도착했습니다!”
“페킹튼 백작과 그 자제들 입장하십니다!”
“드컨 남작과 그 자녀들 납시오!”
“차이던 가문의 가주와 자녀들···.”
“필리 자작과 자제분들···.”
아카데미에서 익히 들어봤던 수도 가문들과, 그 외의 유명한 지방 가문들은 거의 다 초대한 듯했다.
그중 대부분이 초대에 응한 것은 다름 아닌 이번 연회가 ‘사교계의 은둔자’라 불리던 레핀 공작의 첫 공식 연회였기 때문이다.
‘숨어 지내던 호랑이가 처음으로 발톱을 드러냈다!’
세간의 이러한 평가를 그저 과장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것은, 얼마 전 국왕의 입에서 나온 말 덕분이다.
‘짐은 세자르 군의 축하연에 참석할 의사가 있소.’
그 한 문장에 사교계는 시끌시끌해졌고, 뒷말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거야말로 왕실과 레핀 가문의 밀월관계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냐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이번 연회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것은 헬리오스 가문을 비롯해 일부 친팰러스 가문들뿐이었지만.
일부 예외도 있었다.
‘저기 보리스 놈도 있네.’
연회장에 입장하는 덩치와 그 무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연신 감탄하는 모습이 10대 어린애 그 자체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씩 웃는데, 옆에 서 있던 리암도 내내 감탄하는 중이었다.
“내가 이런 연회에 주빈으로 초대를 받다니···.”
주빈으로 초대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이냐면, ‘어느 가문의 자녀들’이라는 형식으로 날아간 여타 초대장과는 달리.
카렌과 리암, 앨빈을 비롯한 ‘내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그의 풀네임을 명시한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뭘 그런 걸로 놀라고 그러나. 앞으론 지겹게 겪을 일일 텐데. 뭣보다···.”
페킹튼 가문이 굴지의 백작 가문이긴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애매한 차남의 리암에게는 이렇다 할 사교계 초대장조차 잘 날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넌 이 세자르 레핀의 친우인데.”
“···.”
친우, 라는 말에 리암은 돌연 말이 없어졌다. 이거 쑥스러워하는 건가.
한편,
연회장에 입장한 손님들 사이에서 경탄, 아니 경악에 가까운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와···.”
“엄청난걸.”
“대체 얼마를 쓴 거야?”
“레핀 공작이 세자르를 아낀다더니 이건 그냥 아끼는 수준이 아닌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음식은 물론이고 연회에 쓰이는 모든 것이 전부 최고급품이었으니까.
‘들리는 얘기로는 총관 앞에 놓인 내역서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나.’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가 하면, 얼마 전 왕궁연회를 가며 기대했던 음식들, 그러니까···.
“저것 봐! 파이 속에서 비둘기가 날아올랐어!”
“저 음식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거위 배 속에 든 게 이대륙에서 왔다는 귀한 과일들 맞아?”
파이를 뚫고 날아오르는 비둘기.
배 속을 갈라 그 안에 온갖 고급 과일을 넣고 통으로 구운 거위라든가.
각종 귀한 식재료를 탑처럼 쌓아올린 요리들이 나올 정도였다.
‘대박이군, 대박.’
속으로는 약간의 문화적 충격까지 받은 터였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연회장 앞쪽으로 향했다.
···다름 아닌, 내게 온 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으로.
‘어마어마하군.’
검을 비롯한 온갖 무기, 방어구를 비롯해 온갖 사치품, 장신구, 보석류까지.
일국의 왕자에게 갖다바친다 해도 믿을 법한 진귀한 물건들이 한가득이었다.
‘아니지, 레핀 가문의 적자이면 일국의 왕자나 마찬가지인가.’
선물을 뜯어보는 건 연회가 끝난 뒤로 미루도록 하고.
내가 기대하는 선물은 그보다 훨씬 더 뜻깊은 것이니 말이다.
잠시 후.
간단한 공식 일정이 마무리되고 향연에 가까운 식사가 이어진 뒤, 자유로이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연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은 가운데.
“각하, 아니···.”
나는 창가 앞에 홀로 서 있던 레핀 공작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아버지.”
“···.”
레핀 공작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감개무량한 얼굴에 가깝다고 할까.
“제게 온 선물들이 저 앞에 한아름 쌓여 있더군요.”
“축하한다.”
레핀 공작이 무뚝뚝하게 대꾸했지만, 나는 그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헌데 저는 그보다···.”
들고 온 잔을 공작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실 선물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젊은 날의 혈기는 사라지고 기백만 오롯이 남은 형형한 눈빛이 나를 주시했다.
“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 이상으로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공작은 잠시 마른 입술에 침을 적셨다. 내게 전부 얘기해주겠다고 결심은 하고 왔지만, 쉽사리 꺼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인 듯했다.
“세자르, 네 어머니는···.”
하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하인이 이렇게 외쳤으니까.
“팰러스 공자님이 도착했습니다!”
“···!”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문가로 집중되었다.
열린 문 사이로 언제나처럼 화려한 금발의 미남자가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왔다.
팰러스 레핀.
쏟아지는 시선을 한몸에 받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내.
미소 띤 얼굴로 연회장 안에 들어선 그는 공작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런.’
그 때문일까.
공작은 제게 다가오는 ‘장남’을 바라보며 뒷말을 이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기분인걸.’
이윽고 우리 두 사람의 앞에 선 팰러스는 세상 공손한 몸짓으로 공작에게 인사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아, 버, 지.”
‘아버지’라는 단어의 음절 하나 하나에 힘주어 말한 그는, 공작의 옆에 선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놈의 의도가 뻔히 짐작된다.
‘네까짓 게 아무리 적자 인정을 받더라도 차남일 뿐. 적장자는 오로지 나뿐이다.’
그 사실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니겠나.
하지만 나 역시 그 속내를 알고도 그냥 넘어갈 성격은 되지 못한다.
“형님.”
“···.”
공작을 향해 서 있는 팰러스에게 한 걸음 다가가, 그의 눈앞에 섰다.
“제게는 인사도 안 해주시는 겁니까? 이래 봬도 오늘 이 자리는 다름 아닌 저의 적자 자격을 축하하는 기회인데 말이지요.”
“···세자르, 축하한다.”
도자기 인형처럼 매끈한 그의 얼굴은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형님. 형님이야말로 머나먼 타지에서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나저나 힐 오프러스 대공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까?”
나는 일부러 오프러스 대공의 이야기를 꺼냈고, 의도했던 대로 팰러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
왜냐면.
놈이 싸움에 진 개처럼 여기서 달아나 제게 힘을 실어줄 누군가를 찾아 갔다는 것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여준 셈이니까.’
그는 내게 몸을 한껏 붙이더니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정도껏 해라, 세자르.”
그러나 나는 그의 위협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공작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형님이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형님의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세자르.”
뒤늦게 나서려는 공작을 바라보며 나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뭐라고 한 마디 해주시지요. 아, 버, 지.”
“···!”
그 말에 공작은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