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스킬
성 로드님 축일 당일이 되었다.
성 로드님 축일이란 일종의 추수감사절인데,
수확의 계절인 가을을 기념하여 농민들도 단 이틀간은 일을 쉬고 먹고 마시며 다음의 힘든 시간을 준비하는 기회였다.
이 기간에는 아카데미를 비롯해 모든 기관이 쉬는 만큼, 나는 가신들을 데리고 공작저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어머, 세자르 도련님이 돌아오셨어!’
‘도련님이 오셨다!’
‘도련님이 농농이를 데리고 오셨어!’
어쩐지 나보다 농농이를 더 반기는 것이 핀트가 묘하게 엇나간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공작저 사람들 모두가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했다.
여튼 나 역시 기분이 꽤 좋았는데.
‘가을이 수확의 계절이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내 방 창문 너머로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훈련에 매진하는 롯, 그런 그녀를 둘러싸고 함께 검을 휘두르는 삼형제였다.
나를 주군으로 섬기기로 한 롯은 조심스레 브렉 얘기를 꺼냈다.
‘혹시 제 상황 때문에 세자르 님에게 피해가 가기라도 하면···.’
그러면서 덧붙이길,
자신이 어째서 브렉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는지 이제 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애초 따지고 보면 브렉과 헬리오스 백작이야말로 제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자 원흉인데.’
본래 자신의 성격이라면 그 둘에게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은.
‘그 두 사람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큰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과 압박에 시달렸거든요.’
그 말을 들으니 짚이는 바가 있었다.
‘롯, 혹시 팰러스 형님과 대면한 적이 있나?’
‘네? 아, 네. 생각보다 꽤 자주···.’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아마 팰러스는 자신의 이능을 이용해 롯에게 수차례 세뇌를 건 게 아닐까.
‘롯. 브렉의 일은 걱정 말고 훈련에나 매진하도록.’
‘···감사합니다.’
나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롯의 거처를 기숙사 북관에 마련해놓았고.
그녀의 오빠들 역시 함께 사는 식솔로서 그 옆에 방을 마련해주기로 했다.
‘브렉이 알면 난리가 나겠지만.’
이미 놈과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가 아닌가.
하루이틀 차이일 뿐, 곧 판가름을 내야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나저나···.”
나는 4차원 주머니에 넣어놨던 보상 아이템인 ‘랜덤 스킬 스크롤’을 꺼내보았다.
일견 평범한 두루마리처럼 생긴 물건이지만, 그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랜덤 스킬 스크롤’(잔여 사용 횟수 1회)
- 설명 : 스크롤을 찢는 이능자에게 이능 스킬 하나를 랜덤으로 부여한다.
- 비고 : 이능자만이 스크롤을 찢을 수 있으며, 자신이 보유한 이능에 관계된 스킬만을 받을 수 있다.』
이 설명을 읽어보면 아예 상관없는 스킬을 받는 게 아니라, 자신의 원래 이능과 관련된 것을 부여받는 듯하다.
‘예컨대 디터 같은 경우는 괴력에 관계된 스킬일 거고.’
디터의 이능 스킬은 2단계까지 개방되었다.
1단계가 괴력이고, 2단계가 일종의 광역딜 스킬인 섬멸의 일격.
나는 오랜만에 호감도 목록을 띄워 가신들의 이능 현황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카렌은 몇 단계까지 개방되었다는 게 없는 것을 보니, 이 이상 더 이능을 발전시킬 여지가 없는 것 같다.
‘하긴 지금 이 이능 자체만으로도 밸붕이나 다름없으니.’
발닉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추가 스킬이 생기는 게 아니고, 수련을 통해 지배할 수 있는 동물 종류를 하나씩 늘려나가는 형태.
앨빈 역시 <영혼의 서>를 이용해 접신 가능한 영혼의 수를 늘릴 수 있고 말이다.
“그러면 롯의 이능은···.”
나는 롯의 호감도창을 확인해보았다.
『가신 ‘롯’(충성도 70점) - 이능자 ‘포밧의 밧줄을 부리는 자’ (1단계 개방)
1. 포박의 올가미 (숙련도 lv. 1)
- 설명 : 자신의 시야에 있는 누군가를 움직이지 못하게 ‘포박’할 수 있다.
- 지속시간 : 10초
- 쿨타임 : 2시간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지속시간은 증가하고 쿨타임은 감소합니다.)』
1단계 개방이라는 걸 보니 디터나 나와 마찬가지로 다음 단계의 스킬이 존재하는가 보다.
‘누구에게 이 스크롤을 주는 게 좋을까.’
생각에 잠긴 채 각자의 능력과 스킬을 다시 한 번 체크하며 고민하는데.
문에서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났다.
“도련님, 제이콥입니다.”
“들어와.”
제이콥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다리시던 게 준비되었다는 발닉의 전언입니다.”
나는 제이콥의 안내를 받아 저택 지하실로 내려갔다.
* * *
지하실로 내려가니 공기가 확 달라졌다.
곰팡내가 나는 음습한 복도 끝에 다다르자 임시 감옥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택에 이런 곳도 있는지 몰랐는데.’
그 안에는 발닉이 준비시켜놓았다는 대상이 있었으니.
복면이 씌워진 데다 재갈이 물린 사내가 웁웁거리며 바닥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저놈이군.’
나는 제이콥에게서 열쇠를 받아든 뒤, 창살의 문을 열고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콥, 먼저 가봐.”
“하지만···.”
“괜찮다니까. 차나 두 잔 가져다줘.”
옥 바깥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제이콥이 자리를 뜬 뒤.
나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 복면을 거칠게 벗겼다.
“흡!”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중년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재갈까지 마저 풀어주자, 사내는 준비했던 말을 따발총처럼 쏟아냈다.
“가, 감히 날 이렇게 대하다니! 나는 헬리오스 가문의 방계인 터닙 가문의 4대손으로···.”
“앉아.”
방금 전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사내는 고분고분 탁자 앞에 앉았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양옆을 두리번거리는 사내에게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아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내가 움찔하며 답했다.
“모, 모른다! 대체 네놈들은 누구길래 내게 재갈을 물리고 복면을 씌운 채로 이리로 데려온 것이냐!”
발닉이 일처리 하나는 확실하단 말이지.
“내가 누군지는 알고?”
“허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어디서-”
“그 애송이가 말이지.”
나는 그의 등 뒤에 자리한 벽을 가리켰다.
사내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더니, 벽 한가운데 그려진 레핀 가문의 상징르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이 나라의 제1공작가, 레핀 가문의 차남이거든.”
“···!”
물론 아직은 아니긴 한데, 곧 그렇게 될 테니까 상관없겠지.
몹시 당황한 사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 제가 뭘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렸습니다, 부디···.”
“상관없어. 몰라서 그런 거잖나?”
“그럼요, 그럼요.”
이 ‘터닙’이라는 자가 누구냐면.
‘노예 상인과 잘 얘기가 된 덕분에.’
문제의 약속 장소로 무사히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그 부근에 잠복해 있던 우리 쪽 병사들이 생포해온 ‘헬리오스 가문의 노예 사업 담당자’였다.
사내의 기가 죽었다고 판단한 나는 본격적인 설득에 나섰다.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듣던 터닙이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말씀하신 ‘꼬리 자르기’라는 것이···.”
“그 일에 관계된 인물 중 가장 말단인 자네를 잘라낼 거라는 얘기지.”
나는 그를 대신해서 문장을 완성해주었다.
사내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질문했다.
“자, 이제 선택은 자네 몫이야. 잘려나가는 꼬리가 되어 참수형을 당할래, 아니면···.”
“차, 참수형이라니요?”
“이 나라에서 노예는 엄연한 불법이라는 것 몰랐나?”
이제 터닙의 얼굴은 하얘지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 하지만 노예를 사봤자 고작해야-”
“노예를 사들이는 건 벌금형으로 끝나지만.”
나는 준비해온 법전을 꺼내 남자의 눈앞에 들이대었다.
“여기 적힌 대로, 노예를 판 장본인은 사형에 처하게 돼 있다. 물론 유통을 담당한 중간업자도 마찬가지이고.”
“···!”
사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런 반응을 보니 전혀 몰랐던 사실인가 보다.
‘보아하니 어느 방계 가문의 후손인 듯한데.’
이제는 작위가 없는 평민에 가까운 자를, 그저 노예 사업 유지를 위해 이용한 모양이다.
“터닙. 설마 헬리오스 가문이 널 끝까지 지켜주리라 생각했나?”
“하, 하지만···.”
터닙은 이제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온갖 더러운 일을 직접 처리한 게 네놈이잖나. 그럼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너부터 제일 먼저 잘라내려고 하지 않겠어?”
“제, 제가···.”
사내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살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터닙은 의외로 이해가 빨랐다.
···태세 전환은 더 빨랐고 말이다.
* * *
성 로드님 축일이 끝나자마자 열린 왕실 정기회의.
회의실의 제일 상석에 앉은 국왕 테오 2세를 중심으로,
섭정 안느 모후와 노바스 공작, 그 외의 귀족들과 고위 행정관들이 기다란 탁자에 둘러앉았다.
“그런데 저자는···.”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회의 참석자들의 시선이 탁자 끝으로 향했다.
본래는 해로드청년회의 대표자가 앉는 좌석에 낯선 얼굴이 앉아 있었다.
“저거 대체 누구요?”
“아니, 저건···.”
“어째서 저 자리에 저자가···.”
그를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모르는 사람대로 웅성거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헬리오스파라 불리는 귀족 무리들이 눈에 띄게 반발했다.
“어째서 저자가 감히 이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겁니까! 고작해야 일개 아카데미 학생에 불과하며···.”
‘그래 봤자 서자 주제에’라는 말을 그는 가까스로 삼켰다.
분위기가 몹시 좋지 않은 장내를 둘러보며 정기회의의 의장인 노바스 공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조심하시오, 칼튼 자작.”
“하지만-”
“레핀 가문의 세자르 군은 오늘 해로드청년회를 대표하여 온 것이니.”
해로드청년회를 대표하다니?
뜬금없는 말에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공작은 그 반응을 무시하며 말했다.
“세자르 군은 얼마 전부터 해로드청년회에 정식으로 입단하여 활동하기 시작했소.”
“그, 그게 무슨-”
“오늘은 여러분에게 긴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어 이 자리에 함께한 것이니, 더 이상의 불협화음은 없었으면 좋겠소.”
아무리 젊다고는 해도 노바스 공작은 왕국의 단 두 개뿐인 공작 가문을 대표하는 자.
그가 근엄하게 일침을 놓자, 귀족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의제인···.”
예정되었던 의제들이 하나둘씩 처리되었고.
어느덧 마지막 의제까지 마무리되어 세자르의 차례가 다가왔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 향한 가운데서도 청년은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여러분께 소개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회의장 문이 열렸다.
참석자들의 수군거림이 한층 커져가는 가운데, 한 남자가 등장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사내의 정체에 집중된 가운데, 세자르의 말이 이어졌다.
“저자의 이름은 파리스 터닙.”
청년은 탁자 주변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힘주어 말했다.
“헬리오스 가문의 불법 노예 사업장을 비밀리에 관리해온 인물입니다.”
그 폭탄 같은 말에 회의장이 발칵 뒤집혔다.
“뭐라고!”
“거짓말이다!”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설마, 그런 일이···.”
의심과 우려, 놀람과 흥분, 경악까지.
수많은 반응이 회의장 안을 가득 채운 가운데, 누군가가 탁자를 쾅! 치며 일어섰다.
“이런 파렴치한 자를 봤나!”
···브렉의 아버지, 헬리오스 백작이었다.
“배, 백작님!”
뒤늦게 그의 얼굴을 발견한 터닙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네 이놈!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헬리오스 백작이 노호했다.
“어찌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를 이리 갚는단 말인가!”
너무나 진실 어린 목소리에 모두가 넘어가려던 순간.
세자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증거는 이자의 증언만이 아닙니다.”
“···!”
분노로 이글거리는 헬리오스 백작의 눈빛 앞에서도, 세자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그것을 가져와라.”
이내 시종들이 두꺼운 보고서를 한아름 들고 와 회의 참석자들 앞에 한 개씩 내려놓았다.
“이건···.”
무심코 첫 장을 넘겨본 참석자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었다.
“설마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면서 문서로 기록을 다 남겨둘 줄은 몰랐군요.”
꼼꼼한 건지, 아둔한 건지.
세자르는 뒷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한참이나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던 헬리오스 백작이 테오 2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건, 이건··· 조작된 증거입니다, 폐하, 제발 통촉하여···.”
“헬리오스 백작.”
그러나 테오 2세의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곧 정식 재판을 열 테니 변론은 그때 가서 하도록.”
“폐하, 제발, 제발··· 소신은-”
“헬리오스 백작을 끌어내라.”
기다렸다는 듯 병사들이 들이닥쳤고.
그들에게 양팔이 붙잡혀 끌려나가며 헬리오스 백작이 절규했다.
“아니야! 거짓이라고! 이건 조작된··· 조작된 거야!”
복도 너머로 멀어지는 모습을, 세자르는 끝까지 지켜보았다.
* * *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마차 안.
나는 일부 도전과제를 달성한 덕분에 새로운 과제가 생겨난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암살자에게 공격당할 뻔했나요?
이 과제는 어째선지 갱신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얘기는 농농이가 그때 그렇게 활약을 펼쳤음에도···.
‘암살당할 위기를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는 거지.’
즉, 언제고 또다시 죽음의 위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의미다.
누구 때문에 그런 위기가 찾아오는 건지는 안 봐도 뻔하다.
‘브렉 헬리오스. 아니면 헬리오스 백작.’
게다가 얼마 전.
브렉은 자신의 신원을 뻔히 드러내며 나의 암살을 사주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팰러스에게 세뇌라도 당한 걸까.’
설령 그 가설이 맞다 쳐도 이번 일은 정도가 심하다 싶은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팰러스가 세뇌의 강도를 높인 건 아닐까?
원작에서는 패시브 스킬 정도만 써도 권력을 손에 쥐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나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틀어졌으니까.’
때문에 초조해진 나머지 브렉에게 지나치게 강한 세뇌를 거는 무리수를 두었고.
브렉은···.
‘일단은 내 목숨부터 보전하는 게 문제다.’
내 신변을 보호해줄 만한 스킬이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4차원 주머니에 넣어놨던 아이템을 꺼냈다.
‘랜덤 스킬 스크롤.’
마차 안에서 그것을 과감하게 찢었고.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랜덤 스킬 스크롤’을 사용했습니다.]
[이능자 ‘그림자 검객’에게 적합한 스킬이 랜덤으로 배정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두 번째 스킬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