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72화 (72/176)

눈 감아

오랜만에 와본 던전은 여전히 눈부셨다.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순간이동시킨 농농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간 늘 이런 식으로 암살자를 처리했다고?’

아기를 보고 경계를 푼 암살자에게 다가가 앙앙거리며 바짓단을 붙든 뒤 여기로 순간이동시키고.

그 뒤처리는···.

“···.”

나는 황망한 눈빛의 나무 정령과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이구나, 인간.]

“오랜만입니다. 헌데···.”

나는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이곳으로 강제 이동된 암살자들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제게 뭐 할 말 없으십니까?”

[으음, 그게···.]

그때.

농농이가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채 말했다.

[앙! 앙!]

[아··· 정말 그래도 괜찮겠나?]

[옹.]

“···뭐랍니까?”

나무 정령이 머쓱해했다.

[자네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줘도 된다는군. 어차피 다 들통났다며.]

“···.”

정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그, 그러니까 농농이가 진짜 노움족 왕자라는 얘깁니까?”

놀란 발닉의 대꾸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자네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많았다더군.]

많은 건 사실이다.

공작 부인과 팰러스를 비롯해 그 두 사람의 수하들까지. 열 손가락으로 꼽기에도 모자라지 않을까.

‘헌데 왜 암살자가 찾아오지 않는 건지 궁금했지.’

[그럼에도 자네가 그 사실을 몰랐던 건, 여기 있는 아이다페올트 왕자가 처리해준 덕분일세.]

“처리라면 어떻게?”

[음···.]

잠시 망설이는 정령에게 농농이는 또다시 ‘옹옹!’ 하고 외쳤다.

[왕자 말로는 사막이나 정글 같은 곳에다 두고 왔다는군.]

“···사막이나 정글이요?”

[그러다 너무 잔인한 것 같아서 여기로 데려오기 시작했다고.]

“데려오고 나서는요?”

[그게··· 나무덩굴로 처리를···.]

“···.”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원작의 던전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았던 이들처럼, 나무덩굴에 몸이 꿰뚫려 죽었겠지.

어쩐지 오싹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자.

디터의 품에 안긴 농농이가 통통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였다.

‘···귀여워 보이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왕자다 , 이건가.’

[흠흠, 어쨌거나 자넨 왕자 덕분에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긴 셈이네.]

“고맙다, 농농아.”

순순히 감사 인사를 하자 농농이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앙!]

어쨌거나 예상 외의 진실에 다소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할 일은 확실히 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기절해 있는 암살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젠 저놈에게 배후를 알아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내게 맡겨라.]

“···어떻게?”

[구체적인 건 묻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정령의 얼굴이 몹시 무서워 보였다.

던전의 나무덩굴이 암살자들의 몸을 어딘가로 옮겼고.

그 멀리서 한동안 사내들의 비명이 울려퍼지더니 잠시 후 잦아들었다.

“···어쩐지 오싹한걸.”

자세한 건 묻지 않는 게 상책이다.

아까 같은 일들이 몇 번 반복된 뒤.

[암살 의뢰자를 알아냈다.]

정령은 내가 기대하고 있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내 암살을 의뢰한 장본인은 헬리오스 가문의 적장자 브렉 헬리오스라고.

“후우···.”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한편으론 충격적이었으니까.

‘이게 진짜 미쳤나.’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암살 길드에 의뢰할 줄은 몰랐다.

···브렉은 아무래도 날 죽이지 못해 이성이 마비된 모양이다.

* * *

성 로드님 축일 1주일 전.

나는 ‘노예 구출 작전’을 예정대로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발닉과 디터가 걱정하기는 했지만···.

‘겁먹어서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말로 브렉이 원하는 바일 테니.’

게다가 이 작전이 성공을 거둔다면, 헬리오스 가문에 큰 타격이 될 거다.

브렉도 내 목숨을 노리기보단 제 목을 보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될 테니.

“일단 참여 인원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 옆에 우직하게 서 있는 발닉을 돌아보았다.

“발닉은 나를 호위하고.”

“네, 도련님.”

“앨빈은 나와 발닉과 함께 들어간다.”

“네.”

“디터와 카렌, 롯은 바깥에서 대기하다가 신호가 떨어지는 대로 1층을 점령한다.”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적은 인원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원작에서는 헬리오스 가문의 노예 창고를 이렇게 묘사했었다.

『사막 한가운데에 오아시스 대신 붉은 벽돌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그곳이 바로 헬리오스 가문이 소유한 불법 노예 창고.

경비 인력이라고는 노예 상인이 고용한 용병 십여 명이 전부였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대부분의 노예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불법 노예 창고를 지키는 용병들의 실력이 S급일 리는 없지 않은가.

반면 우리에게는 A급에서 S급을 오가는 전문 용병 발닉이 있고.

어마어마한 괴력을 자랑하는 디터,

여차할 경우 ‘흑의 기사’에 빙의할 수 있는 앨빈,

발군의 검술 실력을 뽐내는 이능자 롯과 더불어···.

‘카렌의 전투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오는걸.’

어쨌거나.

대부분이 일당백은 아니더라도 일당십은 상대 가능한 실력자다.

물론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다.

‘노예 상인과 실질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헬리오스 가문 쪽 담당자를 잡아야 한다.’

원작에서는 ‘꼬리 자르기’를 당해 참수형에 처해지는 인물로, 방계 가문의 하급 관리라고 했던 것 같다.

이자를 생포해 우리에게 협조하게 만드는 것.

그게 이 작전의 핵심이다.

나는 긴장된 얼굴의 가신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은 이 인원으로 노예 창고를 제압하는 게 1차적 목표이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추가적인 인원도 배치해놀 거다.”

“레핀 가문의 사병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발닉의 말에 내가 대꾸했다.

“그래. 공작께서 이번 작전을 지원해주시기로 했다.”

그 말에 작전 참여 인원들에게서 와, 하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안심하기는.

며칠 전, 나는 레핀 공작과 독대하여 담판을 지은 참이었다.

‘왜 굳이 뜨거운 감자를 네 손으로 집으려는 거냐?’

공작은 처음만 해도 부정적인 반응이었지만.

사건의 자초지종을 듣더니 얼굴색이 바뀌었다.

‘불법 노예 사업의 배후가··· 헬리오스 가문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증거가 있나?’

‘정보의 출처는 검은손 길드이고, 이건 그들에게서 받은 증거물입니다.’

카렌을 통해 얻어낸 증거자료를 보여주자.

공작은 씁쓸한 목소리로 사병대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헬리오스 백작이··· 설마 그 정도로 타락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공작과 헬리오스 백작은 젊은 시절 전장을 함께 돌았던 전우라고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향이 다른 만큼 생각도 달랐는데.

레핀 공작이 꽉 막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예를 중시하는 인물이라면.

‘도리를 행했기 때문에 이긴 게 아니라, 이긴 자가 행하는 바가 도리가 되는 거라네.’

헬리오스 백작은 지나칠 정도의 실리주의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노예 밀무역에 손을 댈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저 탐욕만 좇는 변질자가 되어버렸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공작의 얼굴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달랐는데.

‘원래 그런 인물이었을지도 모르지.’

다만 대세에 맞추어 그것을 실리주의라는 명목으로 포장하고 있었을 뿐.

전대 국왕의 죽음으로 왕권이 약해지고 정세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힘 있는 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제 잇속만 차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입안이 씁쓸한데.

롯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저, 세자르 님.”

“아, 더 궁금한 거라도 있나?”

“그게 아니고···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머뭇거리던 그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건데-”

“지푸라기가 생각보다 꽤 잡을 만했다는 건가?”

농담조로 대꾸하자 그제야 롯의 표정이 풀어진다.

“너무 감사드려요.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보답을 받는 건 네 오빠들을 무사히 구출하고 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벌써 기대가 되었으니.

‘롯 한 명만으로도 엄청난데, 그녀의 오빠들까지 전부 가신으로 거둘 수 있다니.’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롯의 형제들을 어느 구석에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지 행복한 궁리를 했다.

* * *

성 로드님 축일 전날이 되자 나라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한편, 동부 국경지대의 척박한 땅에 자리한 불법 노예 창고 역시 분주하기 그지없었는데.

오늘 따라 귀한 손님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창고를 관리하는 나이 든 상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오늘의 손님은 흉터투성이의 중년 용병 한 명과 귀티가 흐르는 청년 둘.

딱히 특별한 조합은 아니었지만, 이 의뢰자들은 무려 ‘검은손’ 길드를 대표해서 왔다.

‘검은손 같은 거대 길드와 거래를 뚫어놓으면 더할 나위 없지.’

그런 생각에 노인이 잔뜩 들떠 있는데, 중년 용병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직접 보고 상품을 골랐으면 싶은데.”

“그러믄요. 얼마든지 살펴보셔도 됩니다.”

“저 안에 있다고 했소?”

“네. 다만···.”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데도 상인은 괜히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유난히 난폭한 놈들이 있으니 섣불리 자극하시지 않는 게···.”

“걱정마시오. 이런 거래를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하긴, 검은손 길드라면 이런 쪽에도 전문가가 아니겠는가.

카디움 부족은 워낙 고가에 팔리는 인기 상품이니 이번처럼 직접 찾아와 고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나이 든 상인은 검은 머리 청년이 건넨 검은손 길드의 의뢰서를 받아들며 대꾸했다.

“헌데 오늘 같은 날씨에 꽤 두껍게 차려입으셨군요.”

지나가듯 던진 말에 검은손 길드 사람들은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

“남부 지방 출신이라 더위를 안 타는 편이라서.”

“아, 그러시군요.”

세 사람과 나이 든 상인은 벽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일명 ‘창고’라 불리는 건물 안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1층을 지키고 있던 용병 십여 명이 노인의 등장에 벌떡 일어났다.

“노예들을 보실 때는 반드시 저희 호위들과 함께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노예 상인은 용병 중 다섯 명을 대동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충격적인 광경일 수도 있겠지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충격적인 광경이라니?”

검은 머리 청년의 질문에 노예 상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카디움 부족 놈들이 보통 독종이 아니라서 말이지요.”

“···.”

“말을 그나마 듣게 하려면 손을 좀 많이 봐줘야 했습니다. 아, 지금은 재갈을 물리고 사슬로묶어놨으니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청년은 알겠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노예 상인은 문 앞에 잠시 멈춰서더니, 열쇠를 꺼내 커다란 자물쇠를 풀었다.

끼이익.

육중한 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놈들아, 손님 오셨다.”

그 뒤로 나타난 것은 말라 비틀어져 뼛가죽만 남은 대여섯 명의 청년들.

생김새는 다들 달랐지만, 피부색이 어둡고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지녔다.

“정신 차리란 말이야, 손님들 앞에서 이 무슨 보기 흉한 꼴을···.”

“···굶은 지 오래돼 보이는데. 여기선 끼니도 제때 안 챙겨주는 건가?”

검은 머리 청년의 날카로운 말에 상인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저희야 넘칠 정도로 챙겨주고 있지요. 상태는 싱싱합니다.”

상인은 양 팔이 묶인 노예 한 명의 등 뒤로 다가가 재갈을 풀었다.

“확인해보시지요. 아, 험한 말을 들으실 수도 있으니 그 점은 감안하셔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예 청년의 입에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당장 날 풀어-”

그 순간.

철썩! 하며 상인의 채찍이 그의 등을 갈랐다.

“으윽···.”

“어디서 건방지게 소리를 질러! 허허, 이거 못 볼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일단 여기에 있는 놈들이 전부 열 명이고···.”

“설명은 그 정도 하고.”

청년이 상인의 말을 잘랐다.

“앨빈, 얘기해.”

앨빈이라 불린 청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름 아닌 카디움 부족언어였다.

“Ut eriperet nos venerunt tibi(우리는 여러분을 구하러 왔습니다).”

물론 그 언어를 모르는 노예 상인은 영문을 모른 채 옆을 돌아보았지만.

“지금 뭐하는···.”

“Misit soror mea es nobis(우리를 보낸 건 당신들의 여동생입니다).”

상인은 이상한 직감을 느끼고 제일 가까이 서 있던 용병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Sunt justi atque auribus fallat(모두 눈 감고 귀 막으세요).”

이미 너무 늦었다.

카디움 족 청년들이 일제히 두 눈을 감고 귀를 막자마자-

쿠구구구구궁!

파파팡!

고막을 찢는 듯한 소음과 시야를 멀게 하는 듯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으니까.

···그들의 눈앞에서 섬광탄이 폭발했다.

얼마 전 도전과제 보상으로 받은 물건이었다.

『‘섬광탄’(잔여 사용 횟수 3회)

- 설명 : 드워프 족이 만들었다는 비살상용 폭탄의 일종.

- 비고 : 폭발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일시적으로 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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