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일석삼조
롯이 전갈을 받은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오빠들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헬리오스 가문에 끌려와 브렉의 호위가 되었을 때부터 롯은 필사적으로 제 가족의 행방을 찾았다.
같이 끌려온 아버지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들 대부분은 전투 중에 사망했거나 노예로 팔려가버렸다.
‘오빠들의 행방만이라도···.’
그녀 이상으로 무예가 뛰어난 오빠들 나만, 나훔, 나답.
그들만은 죽지 않았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서 수소문했다.
그 결과 자신 같은 이민족 정보원 한 명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의뢰한 결과···.
‘불법 노예 사업장이라니.’
세 오빠가 노예로 팔려나가기 이전 대기하는 창고에 갇혀 있으며.
그들이 지금으로부터 2주 뒤 유프러스 제도로 팔려나갈 거라는 내용이었다.
‘유프러스 제도!’
전 세계에서 노예매매가 가장 활성화되었으며.
노예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으로 유명한 섬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그녀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오빠들을 구해야 해.’
하지만 대체 어떻게, 무슨 힘으로 구한단 말인가.
브렉이 자신을 도와 오빠들을 구해줄 리 만무했고.
그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우만이었지만.
“저, 우만 님.”
브렉의 눈을 피해 힘들게 그를 찾아갔지만, 우만의 반응은 냉랭했다.
“브렉이 널 보냈나?”
“네? 아뇨, 브렉 님이랑은···.”
“롯.”
우만은 미간을 구기며 차갑게 말했다.
“넌 표정을 감추는 데 능하지 못하군.”
“아니···.”
“알아내고 싶은 게 있으면 브렉더러 직접 오라고 하도록.”
롯은 용건은 꺼내보지도 못한 채 그곳을 나서야 했다.
‘우만 님과 브렉 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우만은 그녀를 무척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롯은 우만이 거하는 라페스 자작가를 나와 한참을 방황했다.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브렉이나 우만 말고는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불현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이 나라에 노예는 존재하지 않아. 왕국법상으로 노예는 전부 불법이다.’
‘기왕에 네가 누군가를 섬길 거라면, 네 가치를 제대로 알아봐줄 주군을 택하는 게 좋을 거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그녀 자신을 ‘뛰어난 인재’라고 불러준 사람.
“···찾아가보자.”
우만과 브렉 또한 졸업한 덕분에,
그녀는 그 둘의 감시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터였다.
그다음 날.
롯은 여전히 팰러스를 따르는 추종자 학생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기숙사 북관으로 향했다.
* * *
국왕 알현을 성공적으로 마친 지 며칠이 지난 후였다.
평소처럼 아카데미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도련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기숙사의 응접실에는 선약 없이 찾아온 손님,
그러나 충분히 오리라고 예상했던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쳐서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나는 사용인에게 차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한 뒤, 손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서 와, 롯.”
아무래도 내가 뿌려놓은 씨앗이 싹을 잘 틔운 것 같다.
‘전부 다 카렌 덕분이군.’
얼마 전.
카렌은 대뜸 이런 얘기를 꺼냈다.
‘롯이 오빠들을 찾고 있다던데?’
그녀가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롯의 오빠들은 동부 국경지대에 자리한 노예사업장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다.
‘어떡할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슬쩍 흘려줘.’
그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롯은 이민족 정보원과 정기적으로 접촉해 가족들의 소식을 묻고 있다 한다.
그 정보원에게 정보를 일부러 흘려주면···.
‘롯은 내게 도움을 요청하러 올 테니.’
사면초가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런 나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롯, 차는 입맛에 맞나?”
“···네.”
롯은 제 감정을 다스리는 기색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지나가듯 묻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들을··· 구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녀는 봇물 터진 것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녀의 동족 카디움 족이 얼마나 평화롭게 지냈으며.
헬리오스 백작이 이끄는 토벌대가 그들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사내는 죽이고 계집은 노예로 삼아라!’
머스킷 총병들 앞에서 그들의 검이 얼마나 ···한 것인지.
토벌대가 그들을 어떻게 도륙했는지.
“저 외에 살아남은 건 오빠 셋뿐이에요. 그리고 제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국경지대의 어느 노예창고에 갇혀 있는데···.”
그녀가 탁자 위에 지도 하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것을 흘깃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상황은 그만하면 알겠고···.”
롯이 기대감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마주 보았다.
“내게 네 형제들을 구해주면 넌 내게 뭘 줄 수 있지?”
롯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예상을 못 했나 보다.
“네 사정은 딱하지만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
“팔려가기 전의 노예를 구해내는 게 얼마나 위험 부담이 큰 일인지 너 역시 모르진 않을 텐데.”
롯은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잘 생각해봐라, 롯. 내가 그 정도의 부담을 감수할 만큼의 가치를 지닌 게 뭐가 있을지.”
“제가··· 세자르 님께 뭘 드릴 수 있을지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내가 했던 말을 되새기는 게 아닐까.’
그녀의 재능이 탐난다고 했던 말.
그것을 잊지 않았다면···.
“세자르 님. 제가 세자르 님의 가신이 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역시나.
나는 만족감을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이지?”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요.”
“질문해봐.”
“어째서 저인가요?”
“···.”
이건 내가 국왕에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 아닌가.
“제 이능 때문인가요?”
그녀가 정곡을 찔렀다.
이 정도까지 나왔으면 나 역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 나는 네가 지닌 포박의 이능이 탐나거든.”
“그렇군요.”
“그 외에도 이능자들을 가신으로 거둬야 할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개인적인 이유라면 말씀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한 대답에 롯은 되려 안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준비해둔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에 펼쳐놨다.
그녀의 시선이 종이로 향했다.
“계약서다.”
계약서의 골자는 단순했다.
롯이 내 가신이 되어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 그녀의 오빠들을 구해주는 것.
“더불어 네 오빠들의 왕국민 신분도 보장해줄 거다.”
“···!”
롯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놀랄 만도 하겠지.’
그녀가 브렉에게 채찍질당하면서도 헬리오스 가문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헬리오스 놈들이 비열한 꼼수를 부렸으니까.’
에스닐 왕국은 이민족 동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한다.
왕국법상, 개척전쟁 혹은 토벌전쟁에 패해 포로가 된 이민족 주민들은 정식 절차를 밟아 정식 왕국민이 될 수 있다.
정책의 취지에는 문제가 없지만.
‘토벌전을 수행하는 놈들이 이걸 법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지.’
그중에서도 헬리오스 가문은 유독 악독했다.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의 머릿수를 일부러 줄여서 신고한 뒤, 나머지 포로들은 노예로 팔아치웠다.
나름 호위로 둘 만큼 아낀다는 롯은 정식 절차를 밟아 왕국민으로 만들어주었지만···.
“네 오빠들을 설령 무사히 구해서 이곳에 데려온다 해도, 제대로 된 신분이 없다면 떠돌이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 아닌가.”
“···감사합니다, 세자르 님.”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으려는 롯을 제지했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하자고.”
“나중에요···?”
나는 계약서의 한 구절을 가리켰다.
『본 계약은 3번 조항이 실현된 시점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3번 조항.
롯의 오빠들을 무사히 구해낸다는 조항이다.
“그 전까지 너와 나는 서로 최대한 아는 척을 하면 안 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즉,
브렉이나 우만 등 팰러스 잔당들이 우리의 공조를 알아차리지 못해야 한다는 것.
내 말에 롯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드넓은 왕궁 한구석에 자리한 별관.
‘해로드청년회’의 회원들이 열띤 토론을 펼치는 가운데.
나는 롯과 나눴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이해가 빨라서 좋다니까.’
검술만 수준급이 아니다.
머리 회전도 빠른 데다 ‘포박하는 자’라는 어마어마한 이능의 소유자가 아닌가.
‘규격 외의 강자를 상대하는 데 적격인 이능이지.’
롯을 가신으로 삼게 된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기 그지없지만.
무엇보다 일이 전부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기분 좋다.
‘돌 하나로 세 마리 새를 잡는 꼴이니.’
어째서 세 마리냐 하면.
첫째, 롯을 가신으로 거두어 ‘다섯 명의 이능자 가신’을 완성할 수 있고.
(···잘하면 그녀의 오빠들까지도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둘째, 브렉의 헬리오스 가문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되냐면···.
“세자르 님, 세자르 님!”
“···네?”
날 부른 놈이 신경질을 냈다.
저 자식이 해로드청년회 정기회의의 의장이라고 했나.
“대체 신경을 어디다 두시는 겁니까?”
멍하니 고개를 들자 기다란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딱 봐도 호의적이지 않은 게 분명한 웃음.
“갑작스레 이곳에 들어오게 되셨으니 따라오기 벅찬 것도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놈이 흘러내린 안경을 손 끝으로 올리며 말했다.
“저희가 그렇다고 세자르 님의 수준에 일일이 맞춰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웃음소리가 한층 커졌다.
여기나 아카데미나 유치하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물론 여기 놈들이 좀 더 머리는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전국의 수재, 혹은 해로드 왕가에 오랫동안 충성한 가문 출신으로 가려 뽑는다고 했나?’
그래 봤자 10대 후반의 어린애들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잠시 딴 데 정신이 팔렸군요.”
“하, 여기가 교실도 아니고 일일이 주의를 줄 수는-”
“여러분 대화가 하도 지지부진하다 보니 졸음이 올 정도라서 말이죠.”
“···!”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의장을 마주 보며 말했다.
“지금 안건은 그거 아닙니까. 동부 국경지대에서 불법 노예 사업장이 발견되었는데, 그게 수도의 어느 귀족 가문이 뒷구멍으로 관리하는 곳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돈다고.”
그리고 나는,
그 불법 사업장이 누구의 소유인지 알고 있다.
“뒤, 뒷구멍이라니-”
“이렇게나 명확한 사안에 다들 가타부타 말을 못 하는 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라도 그 가문과 척을 지는 게 두려워서잖습니까.”
“···!”
정곡을 찔린 의장이 아무 말도 못 했다.
‘제아무리 왕가에 충성하는 해로드청년회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역시 어디에 붙어야 할지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의미다.
다들 하나같이 눈을 피하는 가운데, 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거 어떻습니까.”
“···무슨.”
의장을 비롯해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다들 맡고 싶어하지 않는 이 안건, 제가 맡도록 하죠.”
“···!”
회의장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바로 일석삼조의 마지막 효과.’
국왕이 본인의 입김으로 나를 이 안에 밀어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청년회 회원들은 나를 쉽사리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나를 향한 견제와 시기, 무시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
‘하지만 모두가 기피하는 이 안건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낸다면?’
···해로드청년회에서 실권을 쥘 기회가 될 거다, 이 말이지.
의장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정말로···.”
“레핀 가의 사병대는 뛰어난 실력으로 유명하지요.”
레핀 가문의 이름을 들먹이자 청년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날 보는 눈에 기대감이 깃들었다.
“한때 ‘전장의 영웅’이라 불렸던 저희 부친이 직접 육성한 부대이기도 합니다.”
“오오오.”
저렇게 말해두면 다들 내가 아닌, 레핀 공작이 직접 움직임에 나설 거라고 예상하겠지만···.
‘사병대까지 데리고 갈 필요도 없지.’
그러나 어느 정도 뻥카는 쳐주는 게 좋으니 말이다.
“단숨에 일망타진하고 오겠습니다.”
···너희가 상상하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박살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