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속삭임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숙하고 영민한 분.’
그것이 테오 2세에 대한 주변의 평가였다.
또래 아이들과 달리 제 감정을 숨기는 데 능했고, 자신을 한낱 아이로만 여기는 주변 어른들을 조종할 줄도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자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일면식도 없는 저를 등용하시려는 겁니까.”
정곡을 찌른 세자르의 말에 테오 2세는 뜨끔하고 말았다.
‘과연 말 한 마디로 귀족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은 인물답군.’
그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아주 오랜만에 평화를 되찾은 느낌을 만끽하며 소년은 문득 깨달았다.
‘이명이 들리지 않잖아···?’
어느 날 갑자기 발현된 ‘이능’.
그것은 소년에게 특별한 힘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만성 편두통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온종일 계속되는 이명 혹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소리의 향연이,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들리지 않는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일까.’
알 수 없는 현상에 잠시 당황했지만, 소년은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지금 그것이 중요한가?”
“···.”
세자르가 그의 이능을 알아차렸든 아니든.
지금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니까.
“짐이 직접 들었든, 누군가를 통해 전해들었든 중요한 건 그대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 아니겠나. ···짐의 선택을 그대에게 설명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일부러 불편한 기색을 담아 말하자 세자르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폐하. 제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쨌거나 짐이 그대의 부친에게 말한 것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겠나.”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짐은 유능한 인재를 해로드청년회에 가입시키고, 그대는 레핀 가문의 족보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니 말일세.”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저보다는 폐하께 조금 더 좋은 제안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소년 국왕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들어보고 싶네만.”
“실례를 무릅쓰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바라는 바네.”
세자르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받았다.
“폐하께서는 해로드청년회에서 폐하에게 충성할 인재를 얻으시는 것 외에도···.”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팰러스 레핀.”
“···.”
“폐하의 정적이라고 볼 수 있는 그자가, 감히 폐하의 자리를 넘볼 때에-”
소년 국왕은 미간을 좁히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방패막이로 활용할 수 있는 자를 손에 넣으시는 셈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
속내를 읽혔다는 생각에, 소년의 눈이 커졌다.
* * *
여전히 입을 떼지 못하는 테오 2세를 보며 내가 말을 계속했다.
“제가 공작가의 적자가 되면 왕위계승 3순위라는 팰러스의 공고한 지위가 흔들릴지 모른다, 라고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
“아무리 서자라 해도, 레핀 공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따지고 보면 그 속내를 짚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지금의 소년 국왕은 정치적 생명이 거의 끝난 셈이나 다름없으니까.’
너무 어린 탓에 후계자가 없으며.
본인의 건강 또한 좋지 못하고, 섭정을 맡은 안느나 그녀의 오빠 또한 이 닳고 닳은 모사꾼들 천지인 정계에서는 애송이일 뿐.
‘반면 팰러스는 어떠한가.’
왕실의 방계인 레핀 가문의 적장자.
사교계에 데뷔했던 십 대 시절부터 꾸준히 두각을 드러냈으며,
수도의 전통 강자 헬리오스 가문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 가문을 제 편으로 포섭했다.
‘거기에는 공작 부인의 힘이 한몫했지.’
한때 사교계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했던 리아나 레핀.
그녀는 그저 향락과 사치를 위해 사교계에서 활동했던 게 아니다.
‘제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포석이었으니까.’
게다가 수도 귀족들은 최근 왕가에 일어난 일들을 잘 알고 있다.
왕세자와 2왕자의 급작스러운 죽음.
외부에는 사고라고만 알려진 이 죽음들이, 실은 계획된 암살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지금의 테오 2세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이 하나같이 팰러스 레핀에게 꼬리를 흔드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
테오 2세는 의중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어쩔 텐가? ···내게 맹목적인 충성이라도 맹세할 셈인가?”
나를 시험하는 듯한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폐하.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충성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그저 헛된 미사여구이자 그럴싸한 사탕 발림에 불과하니까요. 그보다 저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나는 힘주어 말했다.
“공생 관계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공생?”
소년의 눈에 흥미의 빛이 일었다.
“외람되지만 지금의 폐하는 거대한 역사의 돌풍 앞에서 언제든 꺼질 수 있는 촛불이나 다름없습니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언사에도 소년 왕은 흥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를 잘 견뎌낸다면, 폐하는 분명 이 나라를 강대하게 만드실 위대한 통치자가 되실 겁니다.”
“···아첨은 그만 하면 충분하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헛기침을 하는 소년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폐하께 필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실 때까지, 폐하의 불을 돌풍으로부터 가려줄 바람막이가 있어야겠지요.”
“그렇다 한다면, 무엇이 그 바람막이가 될 수 있겠나?”
나는 소년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강력한 왕권입니다.”
“···.”
“그리고 왕권을 강화하려면, 귀족 세력과 교단의 권한을 제한하는 방법뿐.”
이를 위해 내가 궁리해온 방안을 소년에게 하나씩 털어놓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생각해냈다기보다는···.’
원작의 팰러스가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했던 것들.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바라본 것에 불과했다.
“···.”
그러나 소년 왕은 내 의견에 상당히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끝에 입을 열었다.
“과연 노바스 공작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했더니, 이런 배경이 있었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테오 2세는 국왕의 특별 권한으로 나를 해로드청년회에 정식으로 가입시키기로 했다.
‘물론 기존 회원들의 반발이 있겠지만.’
내 자질을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내게 어려운 과제를 주고, 그것을 내가 능히 해내는 모습을 보이면 해결될 일이다.
···오히려 왕의 권한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말이다.
“···헌데 그대는 진정으로 적자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없는 건가?”
“저는 욕심이 많습니다. 다만 폐하의 호혜로 그것을 얻기보다는, 제 손으로 직접 얻는 편을 선호할 뿐.”
그 목표까지 남은 것은 단 한 명.
나는 롯을 어떻게 내 사람으로 만들지 이미 구상을 마쳤고.
‘그 계획을 현실로 옮기기 위한 씨앗을 뿌려놨지.’
내 의미심장한 표정에 국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했던 것보다 그대가 훨씬 더 마음에 드는군.”
···이거 원, 겉모습만 어린애이지 속알맹이는 여간한 중년 아저씨 뺨 칠 정도다.
그렇게 일련의 대화를 마친 뒤 나는 알현실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아까 테오 2세의 호감도창이 떴었지.’
나는 호감도창을 다시 확인해보았다.
『소년 국왕 ‘테오 2세’ (호감도 10점)
- 이능자 ‘멀리 듣는 자’(1단계 개방)
- 특성 : 합리적, 계산적, 신중함, 정치적
- 비고 : 어린 나이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자신의 부담을 함께해줄 믿을 만한 인재를 찾는 중.』
그러자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소년이 이 위험천만한 왕궁에서 제 뜻을 다 펼쳐보이고도 여태껏 무사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이유.
‘천리안이 아니라 천리이耳의 이능을 가졌기 때문.’
그렇다면 연회장에서 빠져나간 후에도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는 게 된다.
이를 통해 ‘레핀 가문의 세자르’라는 인물을 파악한 뒤, 나를 등용할 계획을 세운 듯하다.
‘국왕 또한 이능자였다니.’
이쯤 되자 의문이 들었다.
분명 원작의 설명에 따르면 이능자는 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공작 부인과 팰러스로도 모자라 국왕도?’
내 주변, 아니 이놈의 왕가나 귀족가엔 어째서 이능자가 이렇게 많은 걸까.
“···어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능은 신이 내려주는 축복’이라는 교단의 주장과는 달리, 그저 유전적인 능력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그리고 더 나아가.’
애초 이능을 지녔던 이들이 그 힘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해 이 나라의 왕족과 귀족으로 군림했으며.
거기서 시작된 가문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게 아닐까 말이지.
‘그리고 후대에서 들어서 이능을 신의 축복이라고 포장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에 관해 앨빈에게 조사시키기로 마음먹으며 나는 왕궁을 나섰다.
* * *
오프러스 공국으로 출발하기 직전.
팰러스를 배웅하러 나선 ‘트라이던트’ 사이의 분위기는 몹시 좋지 않았다.
일단 우만과 브렉은 서로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으며.
“어이, 너희 언제까지 이 지랄 할 거냐?”
···남들에게는 하등 관심이 없는 타릭조차 그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뭐가?”
“아니.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었는지는 관심없는데 말이지. 안 그래도 영 심기가···.”
타릭은 문 너머로 보이는 팰러스를 가리키며 말을 흐렸다.
팰러스의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니 너희까지 이러지 말라는 뜻.
‘졸업식 이후로 내내 저기압이셨지.’
우만은 팰러스와 세자르가 서로를 마주 보며 기싸움을 벌이던 모습을 떠올렸다.
‘···팰러스 님을 상대로 거의 대등하게 나오다니.’
세자르는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수도에 있는 누구라도 알 법한 그 사실을, 팰러스 님이 모르실 리 없다.
게다가 며칠 전.
세자르가 왕궁에서 국왕을 알현했다는 소문까지 나도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기분이 안 좋으신···.’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벌컥, 하고 문이 열리며 팰러스가 들어섰다.
“우만.”
“네.”
“내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한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아도 알 거고.”
말이 부탁이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부재를 틈타 다른 세력, 특히 세자르가 힘을 키우는 것을 우만 네가 알아서 경계하며 중요한 정보를 얻으면···.
‘바로 바로 전서구를 보내라는 뜻.’
우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팰러스의 시선이 브렉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브렉.”
“···네.”
팰러스의 얼굴에 남아 있던 희미한 미소가 사라졌다.
“너는 이미 두 번을 실패했다.”
그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브렉은 심장이 덜컹했다.
“팰러스 님, 그게···.”
“변명이라면 그만하거라.”
“···!”
“허나···.”
팰러스는 한참을 그를 주시했다.
브렉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팰러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의 무능함에는 실망했지만, 너와 네 가문의 충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다, 브렉.”
팰러스가 한 걸음 다가섰다.
브렉은 묘한 한기를 느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초점 없는 유리알 같은 눈이 브렉을 주시했다.
“이번만큼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 믿는다. 그렇지, 브렉?”
그 눈을 마주 본 순간, 브렉은 자신의 이성이 한순간 날아감을 느꼈다.
동시에···.
“네, 팰러스 님.”
머릿속에 입력된 명령어를 내뱉듯 기계적으로 ‘네’ 하고 답했다.
팰러스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다면 날 위해···.”
그는 몸을 기울이더니 브렉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세자르를 죽여다오.”
“네, 팰러스 님.”
브렉은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팰러스 님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만이 뇌리에 박혔을 뿐.
“기대하겠다.”
타릭은 그 둘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유심히 지켜보던 우만은 미간을 좁혔다.
‘방금 브렉에게 무슨 말씀을···.’
어쩐지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광경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끝으로 팰러스는 타릭과 함께 출발했다.
그 둘을 태운 마차가 저 멀리 멀어지는 가운데.
“실패하지 않겠다.”
브렉은 뭔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이 말만을 중얼거렸다.
“절대, 실패하지 않겠어.”
“···.”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우만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