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나야?
···스킬 이름이 ‘세뇌’라고?
정신 계열 능력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충격적이긴 하다.
‘팰러스가 그렇게 많은 추종자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나.’
<왕도의 대가>를 읽으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부분들.
그것이 알고 보니 팰러스의 이능 때문이었다니, 라고 감탄하는데.
[스킬을 무효화하려면 상대의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렇구나.
나는 팰러스의 스킬 발동 조건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첫째. 상대에게 단답형 질문을 던질 것.
둘째. 그 상대에게 예, 라는 대답을 들을 것.’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뇨.”
그 말에 조용하던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마시지요, 형님. 팰러스 형님의 빈자리는···.”
나는 주변을 한 번 슥 돌아본 후 농담조로 말했다.
“제가 잘 메꿀 테니까요.”
그 말에 긴장하던 좌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멋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그저 형제간의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농담이 아니거든.’
그리고 그런 내 뜻은 팰러스 일행에게도 잘 전달된 듯하다.
“···.”
모두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중에도,
팰러스와 그 정예 세 명은 웃지 않았으며.
“그러니 형님은 이곳을 제게 맡기시고, 걱정 말고 유학 길에 오르시지요.”
“···고맙구나.”
‘웃는 가면’ 같던 팰러스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에게 등을 돌리자,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팰러스가 꽤 충격을 받았나 보군.’
내 말 자체보다도 자신의 세뇌 스킬에 내가 걸려들지 않은 것에 놀란 모양새였다.
그건 그렇고.
내가 놈에게 한 말에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팰러스가 외국에서 힘을 키울 동안, 원래라면 그의 손에 들어갔어야 할 것들을 하나씩 빼올 생각이니까.
‘···일단은 롯부터 내 사람으로 만들고 나서.’
그렇게 다섯 명의 이능자를 가신으로 거둔 뒤 종국에는 공작가의 적자로 인정받는 것.
그것이 내 근미래 계획이었다.
* * *
며칠 뒤.
팰러스의 졸업에 이어 또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디터의 군사학부 시험 합격이었으니.
“디터!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디터 경.”
“정말 대단해요! 그 어렵다는 시험을 한 번에 붙다니···.”
특히나 앨빈은 유난히 더 호들갑이었는데, 주변에서 군사학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라 뭐라나.
쏟아지는 축하 세례 속에서 디터는 쑥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다들 감사합니다.”
발닉이 흐뭇하게 웃으며 한마디했다.
“디터 이 놈이 근성이 엄청나거든요.”
“그래요?”
“농농이와 놀아줄 때나 밥 먹을 때 빼고는 거의 수련에만 매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옹! 옹!]
어느새 응접실로 아장거리며 나온 농농이가 다가가 옹알거리자.
디터가 그 자그마한 손을 붙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농농이도 고마워.”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본인도 엄청 뿌듯한 모양이었다.
‘제가··· 붙었다고요?’
제 눈으로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이나 되물었을 정도이니까.
디터가 다음 학기부터 군사학부에 편입할 거라는 것을 화제 삼아 우애단 녀석들과 내 식솔들이 대화를 이어나가는 가운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내가 디터에게 말을 붙였다.
“디터.”
“네.”
축하한다는 말은 생략하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언젠가 네가 자신 없다고 했던 것 기억나나? 힘센 것 말고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며.”
“···.”
디터의 눈이 커졌다.
몇 달 전의 기억을 더듬는 듯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네가 해낼 줄 알았다.”
물론 처음만 해도 원작에서 디터가 펼치는 활약을 알고 있었기에 확신했던 거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더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닌, 지난 몇 개월간 동고동락했던 전우에 대한 믿음이랄까.
“그리고 이제부턴···.”
나는 우애단 녀석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너 역시 우리 우애단에 들어왔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
멍하니 입만 벌리는 디터와 우애단 녀석들의 눈이 마주쳤다.
“꺅! 대환영이에요!”
“환영합니다, 디터 경.”
“와, 그러네요 정말! 신입 회원!”
그다음 얼마나 화기애애한 광경이 이어졌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웃고 떠드는 녀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카렌을 따로 불러냈다.
“카렌, 너희 검은손 길드에 의뢰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발닉이 들려줬던 얘기, 기억나?”
우만이라는 이름은 가명이며, 본명은 레온 드 빈터.
2왕자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혐의로 멸문에 처해진 빈터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
“정황상 팰러스가 우만의 신분을 위조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신분 위조가 맞다면 우리 전문 분야니까 쉽게 조사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우만의 여동생도 같이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여동생 이름은 ‘필리아’야. 필리아 드 빈터.”
도전과제가 뜨자마자 빈터 가문의 족보를 비밀리에 입수해 조사한 터였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필리아는 우만의 여동생 이름이 맞았으니.
나는 잠깐 고민하다 덧붙였다.
“그리고··· 타릭이 이 일에 관련됐을 수도 있어.”
“타릭?”
발닉이 들려준 대화를 몇 번이나 곰곰이 곱씹어봤다.
‘난 팰러스 님이 제일 신뢰하는 게 너인가 했더니, 그렇지도 않나 보더라고.’
브렉의 말로 미루어보면,
타릭과 팰러스가 나눈 대화를 엿듣고서 우만의 비밀을 알아낸 듯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팰러스가 타릭을 신뢰해서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 같진 않단 말이지.’
그건 팰러스의 캐릭터와 맞지 않다.
그보단 차라리 타릭이 애초 이 사건에 깊게 관여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
내 말에 카렌은 일리 있는 의견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리고 네가 솔깃해할 정보가 하나 있는데.”
“솔깃해할 정보?”
“브렉의 수하인 롯 카디움에 관한 거야.”
이어진 카렌의 말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이거라면.’
어쩌면 롯을 생각보다 쉽게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카렌,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카렌이 미소를 지었다.
“어려울 것 없지.”
그때, 사용인이 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세자르 도련님, 도련님 앞으로 편지가 왔는데요.”
편지도 그냥 편지가 아니다.
무려 국왕의 인장이 찍힌, 왕실의 정식 초대장.
‘···알현 약속이 잡혔다.’
나는 테오 2세와 담판을 지을 작정이었다.
* * *
에스닐의 왕궁.
깡마른 체구의 소년이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폐하, 페네틴 가문의 국책 사업 요청안에 관해서는 어떻게 대답을···.”
“오프러스 공국와 맞닿은 서부 국경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남부 대평야지대의 평민들 사이에서 폭동의 조짐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노련하게 안건들을 처리한 소년은 한 손을 들어올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만 물러들 가도록.”
손짓 한 번에 신하들이 물러났다.
마지막 한 명이 나가고 나서야 소년의 어머니, 안느 드 노바스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폐하, 혹시 몸이 안 좋으시기라도···.”
“괜찮습니다, 어머니.”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습관적으로 누르던 소년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밤잠을 설쳐서 피곤한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안느는 제 아들이 편두통에 오래도록 시달려온 것을 알았다.
그런 저를 걱정할까 봐 늘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 또한.
‘내 아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구나.’
유스톤 3세가 노환에 시달리면서부터 해로드 왕가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그해에 왕세자가, 이듬해에 2왕자가 때 이른 죽음을 맞이했고.
선왕이 4년 전 서거한 뒤 2왕자와 안느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
테오 2세가 다섯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남들처럼 뛰어놀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답답할 나이인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벌써 수많은 암살의 위협을 헤쳐나와야만 했다.
그런 아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지만 안느는 단 한 번도 티를 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폐하. 헌데 오늘 레핀 가문의 세자르가 폐하를 알현하기로 했다 들었는데요.”
“맞습니다, 어머니.”
아이의 눈동자가 오랜만에 생기로 끓어오르는 것은 그 덕분일까.
그때 시종이 다가와 보고했다.
“폐하, 레핀 가문의 세자르가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미는 먼저 나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 너머로 호리호리한 체구의 청년이 보였다.
‘···레핀 가문의 세자르!’
테오 2세는 기대감에 부푼 가슴으로 청년을 맞이했다.
* * *
생각 외로 소박한 알현실.
그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왕좌에 소년은 앉아 있었다.
나는 테오 2세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레핀 가문의 세자르, 에스닐의 태양을 뵙사옵니다.”
“고개를 들게.”
어린 목소리에서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나를 정면으로 향하는 아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 만 열 살이 되었을 테니 우리 나이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인데.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은 편이라더니.’
그래서인지 유난히 어려 보이는 데도, 한 나라의 국왕다운 위엄이 느껴진다.
원작에서 팰러스는 소년 왕을 일종의 정신병 환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 이런 대사를 쳤지.
‘왕이 정말로 미쳤는지는 중요치 않다. 남들이 그를 미쳤다고 여기면 그는 광인이 되는 것이니까.’
그 말대로였다.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안느를 통해 소년 왕을 방 안에 가둬놓은 뒤.
그의 평판을 바깥에서부터 무너뜨렸다.
소년은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하며 방에 갇힌 채 기본적인 의식주만 보장받았고.
‘소년 왕의 침실 주변에 악사들을 모아다놓고 온종일 악기를 연주하게 했지.’
요즘으로 치면 층간소음 고문법이라고나 할까. 국왕은 기이하고도 은밀한 고문에 시달린 끝에 진짜로 서서히 미쳐갔다.
마침내 우만이 ‘벽을 통과하는 이능’을 이용해 그의 침실에 침입했을 때.
소년은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죽음을 청했다.
‘나를 이 지독한 모멸감에서 벗어나게 해주게.’
우만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목숨을 끊었고 말이다.
원작에서 그런 장면을 읽었기 때문일까.
난생 처음 보는 이 아이가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지는데.
···그런 내 감상이 무색할 정도로, 테오 2세는 능청스러운 질문을 던져왔다.
“반갑네, 세자르 공. 헌데 어쩐 일로 짐에게 알현을 청했는가?”
어째서 알현을 요청했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알 텐데 말이다.
하지만 나 또한 저런 뻔한 질문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은 없다.
“에스닐의 태양을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야 이 나라 모든 청년들의 공통점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나는 고개를 들어 소년 왕을 마주 보았다.
“폐하께서 제 부친에게 따로 귀뜸을 하셨다 들었습니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 말이었다.
소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레핀 공작이 보기보다 말수가 많은가 보군.”
“말수가 많지는 않지만, 보기보다는 애틋한 부자관계를 자랑하는 편이지요.”
“그렇게 둘 사이가 애틋하다면···.”
소년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짐이 공작에게 어떤 요구를 했는지도 들었겠군.”
···이것 봐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아홉 살짜리 어린애가 이런 능구렁이 같은 화법을 구사할 줄이야.
속으로 혀를 차며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얘기를 빨리 진행할 수 있지 않겠나.”
“폐하, 본격적인 얘기가 오가기에 앞서··· 질문 한 가지만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소년은 뭐든 물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저입니까?”
“어째서라니?”
여전히 시치미를 떼는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해로드청년회는 수도의 귀족 청년이라면 누구나 들어가길 선망하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소년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개 서자에 불과하며, 몇 달 전만 해도 이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우스갯거리로 여겨졌던 자를.”
“···.”
“그것도 일면식도 없는 저를 등용하시려는 겁니까.”
소년의 목울대가 꿀렁, 하고 움직였다.
‘아무래도 내가 정곡을 찌른 모양인데.’
내가 알기로 테오 2세는 여간해서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들었다.
어릴 때부터 암살의 위협에 수없이 시달려온 탓이기도 하고, 머리도 웬만한 어른들보다 비상하다고 했으니.
‘어머니나 삼촌의 말이라고 덥석 믿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라고 들었는데 말이지.’
이쯤에서 좀 더 파고들어 볼까, 라고 생각한 순간.
[‘무효화의 목걸이’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순간에 무효화의 목걸이가 작동했고.
그다음 나타난 메시지를 보고 깨달았다.
‘소년 왕이 어째서 나를 점찍었는지.’
그리고 원작의 팰러스가 그런 같잖은 고문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사실은 제 목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는 소년의 파리한 얼굴을 보며 말을 맺었다.
“···폐하의 두 귀로 직접, 말이지요.”
그 순간.
테오 2세의 호감도창이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