팰러스의 졸업을 축하합니다
예상했던 대로 앨빈은 반나절 정도 기절해 있다가 깨어났고.
나는 농농이와 디터를 데리러 1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은 이미 시끌벅적했다.
사용인들이 잔뜩 모인 그 중심에는 농농이가 있었다.
[까르륵!]
농농이가 눈을 반달처럼 휘며 웃을 때마다 사용인들이 가슴께를 붙잡고 괴로워했다.
“꺄아, 어떡해, 까르르 웃었어!”
“아윽, 보기만 해도 심장이···.”
처음만 해도 사용인들은 도련님이 아기를 데려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지만.
재작년만 해도 떠돌이 용병이었던 발닉이 어느 마을에서 만든 아이라고 둘러대자 다들 수긍하며 농농이를 몹시 귀여워했다.
‘이 발닉을 그리 무책임한 사내로 만들어버리시다니···.’
물론 당사자인 발닉은 자신을 지조도 뭣도 모르는 사내로 만들었다며 억울해했지만.
“귀여워라. 어쩜 이렇게 잘 웃을까.”
“그 발닉 씨와는 하나도 닮지 않았네, 외탁한 걸까?”
농농이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다가가서 뺨을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앙?]
“어머, 아기가 내 얼굴을 만져줬어!”
“손도 어쩜 이렇게 부드러울까!”
···젊고 예쁜 여자 사용인한테만 그러는 게 어째 묘하다 싶었는데.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디터의 어깨를 짚었다.
“잠깐 위로 올라갈까?”
“아, 네.”
[···.]
디터의 품에 안긴 농농이는 여느 때처럼 귀여운 아기로 보였지만.
오늘 따라 유독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였다.
둘을 데리고 내 집무실로 돌아가자,
앨빈은 ‘하라라’에 접신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당혹스러워하는 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놈이 한 말이 확실한 거야?”
어쩌다 보니 전설적인 통역관이 ‘그놈’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아기 옹알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말들이 사실은 노움어이더군요.”
“하아.”
“간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흥분했는지, 농농이··· 아니 본명 ‘빛처럼 빠른 자 아이다페올트’ 왕자님이 엉겁결에 지난 얘기를 다 털어놓으신 것 같았어요.”
“본명이 뭐라고?”
“빛처럼 빠른 자 아이다···.”
“아냐 됐다.”
어쨌거나 앨빈이 말한 추가 정보에 따르면,
농농이는 노움족의 왕자가 맞으며, 노움의 수명을 인간식으로 치환하면 두 살이 맞지만.
‘두뇌 발달이나 성장 수준은 청소년 정도라고 하더군요.’
농농이, 아니 아이다페올트는 그 던전에서 우리의 활약을 보고는 우리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으며.
나무 정령한테 으름장을 놓아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것.
“···대체 왜?”
“음, 바깥 구경을 하고 싶었다 하더라고요. 거기다 이 세 명이면 같이 다녀도 재밌을 것 같다고 하면서···.”
여태껏 가만히 듣기만 하던 발닉이 혀를 찼다.
“맙소사. 그럼 여태까지 우린 이 노움한테 놀아난 것 아닙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디터가 반박했다.
“놀아나다뇨!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이 순수한 눈을 보세요. 우리 농농이가 어딜 봐서 그런 거짓말을 한다고···.”
[마! 마!]
“절 보며 엄마 엄마 하는 아이가 아닙니까.”
디터는 제 옷자락을 당기는 농농이를 따스한 눈빛으로 보았다.
“엄마가 보고 싶은 거구나, 가엾은 녀석.”
그 모습을 본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잃었지만.
‘···하긴 디터는 원래 저런 놈이었지.’
말 한 마디에 내 가신이 되겠다고 충성을 맹세할 만큼 물러터진 놈이 아니었던가.
어쩐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나는 디터, 아니 그의 품에 안긴 농농이 앞에 다가가 섰다.
“어이, 농농이.”
[···앙?]
“귀여운 척은 그만하고.”
[옹옹···.]
내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듯 농농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내 뒤편에 선 발닉과 앨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너한테 속았다고 화낼 사람 없으니까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말고.”
[···.]
“그거 뭐야. 암살자? 그건 무슨 얘기야.”
어제 앨빈의 몸을 빌린 하라라가 말한 내용 중 신경 쓰이는 게 있다.
‘쟤, 세자르한테 암살자가 가끔 찾아오는데 내가 종종 처리해줬지. 이 몸이 아니었으면 몇 번은 죽은 목숨이었을 거다.’
암살자가 찾아오는 것은 무엇이며.
농농이, 아니 빛처럼 빠른 자··· 저 노움족 왕자가 그런 살수를 대체 어떻게 처리했다는 건지.
눈치를 살피던 앨빈이 말했다.
“제가 다시 빙의를 시도할까요?”
“아니, 그러다 몸에 무리 온다.”
나는 농농이를 책상 위에 앉히라고 한 뒤 그 앞에 종이와 깃펜을 가져다주었다.
“네가 진짜 왕자라면 글자 정도는 쓸 줄 알 거 아냐?”
농농이가 노움족 왕자가 맞다면, 굳이 하라라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필담을 나눌 수 있을 거다.
[···.]
농농이는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더니, 통통하고 짤막한 손으로 깃펜을 쥐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종이 위에 쓰기를···.
‘동그라미, 세모, 네모?’
아무리 봐도 선이 삐뚤빼뚤한 어린애의 그림이다.
그것을 본 디터가 한마디했다.
“그것 보십시오, 농농이는 그냥 아기···.”
“어, 이거 고대종족의 문자인데요?”
앨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고대종족 문자라고?”
“네, 저도 읽지는 못하지만 고서에서 이런 문자를 본 기억이 나요.”
앨빈은 그 길로 서재로 달려가더니 고어사전 하나를 들고 왔다.
“이 글자는···.”
사전을 붙들고 10분을 씨름하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다 해석했습니다.”
과연 농농이는 뭐라고 적은 걸까. 암살자 이야기는 대체 무엇이며···.
호기심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앨빈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게···.”
앨빈은 머쓱한 얼굴로 농농이를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알면 다쳐’, 랍니다.”
“···.”
내가 말없이 농농이에게 시선을 돌리자.
나와 눈이 마주친 농농이가 까르륵! 웃었다.
‘저 자식···.’
그러나 저러나,
속도 없는 디터는 이런 말이나 늘어놓았으니.
“이것 보십시오, 정말 잘 그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어떻게 이렇게 동그라미를 예쁘게···.”
[마! 마! 까르륵!]
나는 디터의 품에 안겨 나가는 농농이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농농이가 날 돌아보더니 메롱, 하고 작은 혀를 쏙 내미는 것이 아닌가.
문 밖으로 사라지는 둘을 보며 주먹을 꽉 쥐는데, 옆에 서 있던 발닉이 주춤거렸다.
“도련님, 혹시 화나신···?”
“아냐, 화나긴.”
···조금 괘씸하기는 하지만.
암살자 얘기는 차차 물어보면 되겠지.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일주일 남짓 남은 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으며.
그로부터 또다시 한 달이 지났다.
팰러스와 그의 정예들을 비롯한 상급생들의 졸업식 날.
웅성웅성.
아카데미의 드넓은 교정은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이런 광경도 오랜만이네요.”
디터의 말에 발닉이 대꾸했다.
“관계자들 말고도 이 근방 주민들까지 온 것 같군요.”
그 이유는 뻔했다.
말로만 듣던 팰러스 공자님을 먼 발치에서나마 구경하려는 사람들 때문이겠지.
“···저기 오는군요.”
그때.
홍해처럼 갈라지는 인파 사이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 모습에 발닉이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위세는 여전하구만.”
타릭과 브렉, 우만을 호위처럼 데리고서 제왕처럼 등장한 팰러스였다.
여느 때처럼 화려한 외모이지만, 졸업식을 위해 머리부터 발 끝까지 금사로 장식한 복장 덕분에 더욱 눈부셔 보였다.
“팰러스 공자님이시다!”
“팰러스 님!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팰러스 님이 졸업하시면 이제 무슨 낙으로···.”
팰러스의 팬클럽을 방불케 하는 학생들의 반응.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인파를 보자 놈의 영향력이 여전함이 실감났다.
팰러스가 제 추종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귀를 홀리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주변에 퍼져나갔다.
“사랑하는 친우 여러분. 이렇게···.”
듣는 것만으로 신뢰를 갖게 하는 놈의 목소리에 넋이 나가 있는 사람들을 보니 내심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팰러스에게도 일종의 패시브 스킬이 있는 게 아닐까.’
공작 부인 같은 경우 1단계 매혹 스킬은 패시브 형태였지만, 2단계 스킬은 본인이 의도하여 힘을 행사하는 액티브 형태였다.
만일 팰러스 역시 2단계 능력까지 개방한 상태라면, 둘 다 일종의 정신 계열 능력이니···.
‘그 힘을 쓰는 형태 역시 공작 부인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때, 카렌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세자르, 난 가끔 말이야.”
“응?”
그 말에 옆을 돌아보자 그녀의 어두운 낯빛이 눈에 들어왔다.
“가끔··· 우리가 하려는 이 싸움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돼.”
그 마음은 이해가 된다.
더구나 카렌은 자기 혼자만의 안위가 아닌, 거대 길드를 책임지는 몸이었으니까.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냐면 지금 이 정도는···.
‘원작에 나왔던 것과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거든.’
원작에선 어땠더라.
일단 이 시기의 팰러스는 완전한 탄탄대로를 걸었다.
‘레핀 공작이 병석에 든 만큼 공작가의 실권을 거진 물려받은 상황이었으니.’
귀족사회 내의 영향력도 상당했던 만큼 정계의 그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며.
소년 국왕의 뒤를 이어 훗날 왕위에 오를 거라 다들 믿었던 만큼, 모두가 그의 앞으로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그 여파가 졸업식에서도 나타났지.’
귀족들이 앞다투어 보낸 화려한 선물 세례가 이어졌을 뿐더러.
직접 얼굴을 보고 축하의 말을 건네러 온 이들도 있었고,
누군가는 명마 중의 명마라는 말을 졸업식장 앞으로 끌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가 제 앞길에 방해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세자르의 존재로,
많은 것이 뒤틀려버렸다.
‘일단은 레핀 공작과 사이가 틀어졌지.’
심지어 서자 세자르가 적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도는 것을, 팰러스가 모를 리 없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지금쯤 엄청 초조해하고 있을 터.’
그것으로도 모자라 내가 연회에서 주목을 받아 노바스 공작의 눈에 들었고,
국왕과 곧 알현할 예정이라는 걸 알게 되면···.
‘팰러스의 눈이 뒤집히고도 남겠군.’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팰러스는 어떠한가.
그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러 오는 귀족들은 거의 없었다.
‘아까 보니 헬리오스 가문과 타릭의 가문에서 하인을 보내 축하의 말을 전했던가.’
일명 ‘헬리오스파’ 혹은 ‘팰러스파’라고 불리는 일부 충성스러운 가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어중이떠중이들은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무엇보다도 팰러스가 졸업 후, 오프러스 공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
귀족들이 섣불리 그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팰러스 본인은 오프러스 공국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겠지만,
이는 곧 국내에서 제 실권이 약해졌음을 보여주는 셈이니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의 팰러스가 상대적으로 초라한 신세라는 건 틀림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나만 알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걱정 마, 카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리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곧 모두에게 알려줄 테니.”
“그게 무슨 말이야?”
어리둥절해하는 카렌에게 대답하는 대신, 나는 그대로 팰러스에게 다가갔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었으니까.
“팰러스 형님.”
그 순간.
나의 등장에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소란스럽던 팰러스의 추종자들도 입을 다물었으며.
무엇보다도 팰러스의 트라이던트라 불리는 우만과 브렉, 타릭은 나를 잔뜩 경계하며 돌아보았다.
‘긴장하기는.’
그때, 셋 중 브렉이 발끈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디 감히 팰러스 님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시비를 걸려고-”
“브렉.”
팰러스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정도 하거라.”
“···.”
그 부드러운 한 마디에 브렉이 순한 양처럼 조용해졌다.
팰러스는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세자르. 이 형의 졸업을 축하하러 와주어 고맙구나.”
조금의 위선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과연 추종자들이 역시 우리 팰러스 님은 마음이 바다처럼 넓으셔, 라고 생각할 만하군.’
하지만 나도 그에 질 생각은 없다.
“고맙긴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와 나는 능구렁이 같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형으로서 너와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아쉽구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이 아카데미의 자랑이라 불렸던 팰러스 형님과 반 년밖에 함께 수학하지 못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군요.”
그러나 대화 내용과는 달리.
나와 놈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내가 졸업하고 나면···.”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팰러스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형의 빈자리가 느껴질 것 같으냐, 세자르?”
그 순간.
이제는 익숙해진 모종의 힘이 느껴졌다.
[‘무효화의 목걸이’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2단계 스킬 ‘세뇌’의 사용을 감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