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66화 (66/176)

이런 대반전이라니

와.

이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이야.

하지만 레핀 공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렇게 적자 자격을 얻어버리는 건 너무 싱거울뿐더러, 뭣보다 국왕이 권유한다고 그대로 따를 사람이 아니지.’

공작의 속내를 파악한 내가 얼른 말을 받았다.

“각하, 일단 제가 그걸 노리고 연회에서 돋보이려 한 것은 아니라는 점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거야 나도 안다, 다만.”

공작은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너의 경솔한 행동 하나 때문에, 여태껏 정치적 중립을 지켰던 우리 레핀 가문이···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걸 정말로 모르느냐?”

엄하게 훈계하는 목소리에 나는 도리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각하, 아니 아버지.”

“···.”

“아버지야말로 진정 모르시겠습니까?”

‘아버지’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유독 움찔하는 레핀 공작을 보며,

힘주어 말했다.

“지금 같은 시국에서 정치적 중립이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한시적인 것. ···어차피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게 되어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선택을 당하기보다, 선택을 하는 입장이 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유리한 조건을 등에 업고서 말이지.’

레핀 공작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을 보니 내 말에 적잖이 흔들리는 눈치다.

“그러니 각하.”

나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갔다.

“제가 폐하를 알현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주시지요.”

* * *

결국 레핀 공작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내 선에서 공식 알현을 요청드려보도록 하지.’

레핀 가문의 알현 일정이 잡히길 기다리는 한편, 나는 간만에 갱신된 도전과제들을 살펴보았다.

‘지난번 과제들은 하나 빼고 전부 완수한 셈인가.’

다이어울프에게 목이 뜯길 뻔했나요, 라는 과제만 취소되고 나머지는 다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새로이 생긴 과제들은 아래와 같았으니.

-해로드청년회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나요?

-또 다른 이능자를 가신으로 두는 데 성공했나요?

-필리아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아냈나요?

-암살자에게 공격당할 뻔했나요?

-적자의 자격을 인정받았나요?

···이거 딱 봐도 시간순으로 배열된 듯한 과제다.

2번째에 적힌 ‘또 다른 이능자 가신’을 거둬야만 5번째의 ‘적자 자격 인정’을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

“헌데 필리아는 누구지.”

처음 보는 이름이다.

원작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던 순간.

‘설마··· 우만의 여동생 이름인가?’

정황상 그것밖에는 짚이는 게 없다.

내 추측이 맞다면, 이건 일종의 힌트인 셈이다.

“일이 오히려 쉽게 풀릴 수도 있겠는걸.”

문제는 그다음의 도전과제인데.

-암살자에게 공격당할 뻔했나요?

어쩐지 한동안 조용하다 했지.

왕궁 연회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고, 우만에게 분란의 씨앗을 던져놓은 만큼···.

‘어차피 맨입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나는 보안을 강화할 필요가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해로드청년회에 들어가는 건 국왕과 알현만 잘 해내면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늘 그랬지만.

이 부분 역시 원작과 많이 달라졌다.

일단 이 시기에는 레핀 공작 대신 공작 부인이 공작저의 전권을 손에 넣었으며.

‘이번 해 연회가 아닌, 다음 해 연회에 팰러스가 참석하지.’

거기서 팰러스는 무슨 수를 써서인지 모후 안느 드 노바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모후와 소년 국왕 사이를 이간질한다.

안느와 그녀의 오빠 젊은 노바스 공작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팰러스 때문이다.

‘국왕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갔지, 아마.’

그렇게 왕과 모후 곁에서 사람들을 몰아낸 뒤, 그 주변을 모두 자기 인물들로 하나둘씩 채워 넣는다.

안느를 조종해 국고를 탕진하게 하여 왕가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막상 본인은 자문회에 들어가서 대활약을 펼치지.’

그렇게 왕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을 무렵.

당시에는 이미 전문 암살자로 거듭난 우만이 소년 왕과 모후를 암살한다.

‘겉으로는 사고사로 위장되었지만 말이지.’

그렇게 마침내-

팰러스는 왕관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그때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불만이 많았는데.”

모후 안느가 바보도 아니고, 자신의 정적을 저렇게 철석같이 믿는 게 말이 되냐고 말이다.

‘개연성 망이다, 여기서 하차합니다, 같은 댓글이 꾸준히 달렸었지.’

헌데 지금 돌이켜보니 짚이는 바가 있다.

“···팰러스의 이능.”

딱 한 번, 팰러스와 마주쳤을 때 느꼈던 그 기이한 힘.

지금 돌이켜보니 역시 이능이 맞는 듯하다.

다만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팰러스의 상태창은 뜬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 리아나 부인의 사례를 보니, 호감도가 마이너스 100을 찍으면 호감도창이 공개되던데.

어쩌면 팰러스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금 정도면 나를 향한 악감정이 꾸준히 쌓였을 테니···.

‘가능하면 한 번 확인해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역시 기회는 졸업식 때뿐인가.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아, 세자르 님! 다름이 아니고···.”

문을 열고 들어온 앨빈은 기쁜 소식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제가 새로운 영혼에 빙의할 수 있게 되어서요.”

“새로운 영혼이라니?”

“그··· <영혼의 서>에 적힌 후보 목록 말이에요.”

그중 ‘불세출의 역관 하라라’라는 천재 통역관이 있는데.

서재에서 그의 전기를 발견하고는 며칠간 밤을 새워 독파했단다. 그 덕에 하라라의 영혼 친밀도가 60점까지 올라갔다고.

“덕분에 이젠 이 영혼에도 빙의할 수 있게 되어서요.”

앨빈은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덕분에 숙련도가 상당히 올랐고, 이제는 지속시간이 꽤 늘어났다고 덧붙였다.

“훌륭한데?”

앨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

우리는 그 길로 수련실로 향했다.

* * *

앨빈은 발닉과 디터(의 품에 안긴 농농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본격적인 영혼 빙의에 들어갔다.

원래는 두 사람까지 함께할 계획은 아니었는데.

‘앨빈 님, 앨빈 님만 괜찮으시다면 이 발닉이 참관해도 될까요?’

‘저도 부탁드립니다.’

‘앙!’

지난번 이능 사용에 성공한 일로 발닉은 부쩍 열이 오른 모양이었고.

다른 두 사람이 부쩍 앞서나가는 데에 디터 또한 자극을 받은 듯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영혼의 서>를 바닥에 펼쳐놓고, 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앨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몸 주변에서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

그 광경에 발닉과 디터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고.

“···후우.”

잠시 후, 앨빈이 가부좌를 풀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놀림만 보면 확실히 ‘흑의 기사’에 빙의했을 때와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때는 별것 아닌 손동작도 절도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어이구, 이거 웬 손님이 이리들 많으십니까!”

익살맞은 표정도 그렇고, 저 능글능글한 눈빛도 그렇고.

뭣보다 목소리부터가 다르다.

‘어떤 영혼에 접신하느냐에 따라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진다 이건가.’

앨빈답지 않게 걸걸하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다들 깜짝 놀란 순간.

앨빈, 아니 앨빈의 몸을 빌린 ‘하라라’는 디터와 발닉 곁으로 쪼르르 다가가 말을 붙였다.

“이분들은 어디 출신이신가? 흠, 외모만 보면 힘 좀 깨나 쓰실 것 같은데···.”

장사 좀 해본 말투에 말하는 속도도 엄청 빠르다.

그러고 보니 하라라는 왕의 통역관이 되기 이전에 이대륙 출신의 상인이었다고 했지.

그 극적인 캐릭터 변화에 두 사람 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앙! 앙앙!]

···농농이가 ‘하라라’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하라라가 깜짝 놀라며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아니, 이건 설마 노움어?”

···노움어라는 게 있다고?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벙찐 채 그를 지켜보는데.

농농이의 말을 듣던 하라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 이, 이분은···!”

[앙, 앙앙··· 옹옹?]

하라라가 그 말을 알아듣는 게 정말인지 농농이의 옹알이가 유난히 많아졌다.

하라라는 그에 맞장구치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어이쿠, 그게 정말이십니까? 아니지, 노움어로 해야···.”

저 역시 옹옹 앙앙거리며 농농이와 대화를 나눴다.

나와 디터, 발닉은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알 수가 없어 서로의 얼굴만 돌아보았고.

마침내 옹옹거리기를 마친 하라라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허어, 거참 복 받으신 분들이군요.”

“저기,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디터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하자, 하라라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팡 쳤다.

“아니, 이분은 노움족 왕자님이시잖습니까.”

“···누가?”

“얘가?”

“농농이가?”

짜놓은 만담을 하듯 나와 발닉, 디터가 차례로 말했고.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농농이에게로 향했다.

[옹?]

우리를 쳐다보며 두 눈을 반짝이는 요정의 반응에,

우리는 다시 말도 안 된다고 반박했지만.

하라라는 한결같았다.

“아까 이분이 말씀하신 것의 요점만 추리자면.”

···요점을 추린다던 말과는 달리.

농농이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옮기는 듯했다.

-내가 얘들 잘 돌봐주고 있지. 날 귀여워해 주는 건 좋긴 한데 가끔 지나칠 때가 있어. 그래도 기본적으로 애들이 착하니까 뭐.

-던전에만 있으면 지겹잖아. 뭣보다 거기 있으면 끝없이 일해야 한다고. 하루에 보석을 몇 개씩 만들어내야 하는데··· 강제노동이 따로 없다니까.

-응? 아. 나무 정령, 걔 내 말 잘 듣거든. 내가 이런 식으로 인간 세상 구경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는 척이면 척이지.

-쟤, 세자르한테 암살자가 가끔 찾아오는데 내가 종종 처리해줬지. 이 몸이 아니었으면 몇 번은 죽은 목숨이었을 거다.

“···라고 하시더군요.”

저걸 다 기억해서 통역하다니 과연 ‘불세출의 역관’답기는 한데.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는다.

“거짓말.”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간 말에 하라라는 몹시 억울해했다.

“진짭니다! 제 목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당신 이미 죽었잖아.

“정 그렇게 못 믿겠다면 이분이 원래 거하셨던 던전의 정령들에게 따지든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농농이가 던전에 있었다는 것도 아는 거야?’

그렇다면 지금 저 말이 진짜라는 건가.

그 순간.

하라라, 아니 앨빈의 몸이 픽 하고 고꾸라졌다.

“앨빈!”

“이게 대체···.”

놀라며 앨빈을 부축하는 두 사람에게, 나는 손에 든 회중시계를 보여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제한 시간이 지나서 그런 것뿐이니까.”

게다가 이제 보니 오늘은 그 한계를 살짝 넘어선 듯했다.

‘아무래도 앨빈은 오늘도 반나절 정도 기절해 있을 것 같군.’

나는 디터의 품에 여전히 쏙 안겨 있는 농농이를 조용히 돌아보았다.

무언의 압박 비슷한 눈빛을 느꼈는지 농농이가 날 보더니.

[앙? 으그으그.]

갑자기 양손으로 주먹을 쥐고 뺨에 비비대며 애교를 부렸다.

···그래 봤자 소용없거든.

[옹옹, 앙···.]

“···.”

요정족 아기인 줄만 알았더니 아기가 아니라 왕자라고?

‘이런 예상치도 못한 반전을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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