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당하느니 먼저 선택한다
그것은 몹시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나의 몸’이라고 인식하는 자신의 육체가 평소와 몹시 다른 느낌.
사물이 제대로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눈앞이 어두컴컴했고···.
‘이 냄새.’
익숙하고도 향긋한 냄새가 식욕을 강렬하게 자극한다.
순간 발닉은 그 압도적인 욕구에 자신을 아예 내맡기고 싶어졌지만.
‘본능에 압도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빙의 능력을 수차례 훈련하며 느낀 사실이 있다.
동물의 육체를 뒤집어쓰게 되는 만큼, 자기 본연의 의지가 사라지면서···.
‘그냥 이대로 머물러 있고 싶다.’
그 편안하고 단순한 감각.
특유의 타성에 젖는 것은 몹시 기분 좋으면서도 두려운 일이었다.
특히 지능이 낮은 곤충류는 그게 한층 심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발닉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더듬이 털에서 느껴지는 공기 진동에 집중했고.
그것은 모종의 ‘소리’ 형태로 변환되어 그의 의식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것은···.’
의미 없이 나열된 기호에 불과했던 신호들은 인간의 기억 속에서 그 의미를 되찾았고.
어느새 ‘언어’의 형태를 갖추고 들려오는 소리를 향해,
발닉은 윙윙거리며 날아갔다.
“···했단 말이지.”
그곳에 있는 것은 책상 앞에 앉은 우만과 그 앞에 선 브렉이었다.
“실패한 건 내 탓이 아니야. 다 아까 그 계집애 때문이라고.”
“롯 말인가?”
“그래. 그년이 내 명령을 거부했단 말이야.”
브렉은 변명하듯 말했다.
그 겸연쩍어하는 얼굴을 보며 우만은 한숨을 쉬었다.
‘왕궁 연회에서 세자르에게 쓴맛을 보여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롯은 브렉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고, 아까 잠시 우만에게 인사만 하고 응접실로 향한 터였다.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리던 우만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롯에게 채찍을 든 건가?”
“아니, 그게.”
오늘 롯이 입은 것은 등 위쪽이 파인 드레스.
시간이 꽤 지난 건지 티가 많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만의 날카로운 눈은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채찍에 맞은 상처의 흔적이라는 것을.
“브렉, 네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우만의 목소리가 살벌해졌다.
“사람에게는 채찍을 들지 않는다. 채찍을 들어도 되는 건 어디까지나 짐승 한정이야.”
“하,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네가 감히 날 가르치려 들어?”
브렉이 한발 다가와 위협적으로 말했지만, 우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초 롯을 데려온 건 어디까지나 팰러스 님을 위해서가 아니었나?”
팰러스의 이름이 나오자 브렉이 조용해졌다.
“그녀가 지닌 ‘포박의 힘’을 그분을 위해 온전히 활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냐는 말이다.”
“···나도 다 알고 있으니 더는 짜증나게 굴지 마, 우만. 아무리 네가 팰러스 님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는 해도.’
브렉이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더니 비열하게 웃었다.
“그 총애가 사라지는 건 한순간의 일이라고. ···끈 떨어진 연의 말로가 어떤지는 네가 더 잘 알 텐데?”
“그거야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너도 롯의 일에 신경 끄란 말이다. 안 그러던 놈이 갑자기 오지랖을 부리고 지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브렉이 뭔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아, 롯을 보니까 죽은 여동생이라도 생각나나 보지?”
“···뭐?”
흔들림 없던 우만의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하, 설마 팰러스 님과 너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
“팰러스 님이 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믿으며 말이지? ···넌 팰러스 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우만.”
우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브렉은 간만에 신이 나 떠벌거렸다.
“그분에겐 모든 게 도구인 거 설마 모르진 않지? 아, 맞다. 너··· 지금 그 이름, 본명이 아니라며?”
“···뭐?”
우만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브렉이 능글맞게 웃었다.
“지금 네 이름이 가명이라고 말했다.”
“···!”
“본명은 레온 드 빈터. ···듣기로는 빈터 가문의 최후 생존자라지, 안 그래?”
그 순간.
우만의 눈빛이 싸해졌다.
“너 대체 어디서 그 이야기를-”
“난 팰러스 님이 제일 신뢰하는 게 너인가 했더니, 그렇지도 않나 보더라고.”
설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타릭에게··· 그 이야기를 하셨다고?”
타릭.
팰러스와는 세 명 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인물.
‘아무리 그래도 그것까지 말씀하셨단 말인가.’
우만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브렉은 맞은편 의자에 천연덕스럽게 앉았다.
“왜 이래, 우리끼리. 우리는 한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 아니었어?”
“···.”
“기왕 속얘기를 털어놓기로 한 거, 정말로 솔직해져 보자고.”
브렉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팰러스 님께 네놈이 불만 하나 없는 순한 양처럼, 입안의 혀처럼 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로 역겨웠거든.”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브렉과 우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정도껏 해라, 브렉. 그러는 너야말로···.”
우만은 불꽃이 튈 듯한 눈으로 힘주어 말했다.
“세자르와 내통한 건 아닌가?”
“뭐?”
“왕궁 연회. 거기서 너와 세자르가 단둘이 대화 나누는 걸 본 사람이 많던데.”
브렉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 어이가 없어서. 내가 놈을 엿 먹이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서-”
“결국 실패했잖아.”
“···.”
“헌데 네 속내를 들으니 이제는 일부러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무슨 그런 같잖은 말을···.”
브렉이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 모습에 우만의 의심은 한층 커졌다.
“왜, 헬리오스 백작가는 이제 상황을 지켜보기로 한 건가? 아버지의 눈 밖에 난 적장자와, 아버지의 애정을 독차지한 서자 중 어느 쪽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선을 넘었음’을 뻔히 알았음에도.
우만은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순간.
“···하시겠습니까?”
문 밖에서 들려온 사용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대화를 멈췄다.
밖으로 새어나가기엔 무엇 하나 좋을 것이 없는 대화였으니.
“그 정도 해, 우만.”
브렉의 눈동자는 이제 분노로 이글거렸다.
“네놈이 날 의심하건 말건 알 바 아니지만, 내 가문의 충성을 의심하는 건 선을 넘어도 지나치게 넘은 행위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문을 벌컥 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두 사람의 주변에서.
엥엥엥.
모기 한 마리가 한 바퀴를 빙 돌더니 열린 문 틈으로 날아가버렸다.
* * *
“몸은 괜찮나?”
내 물음에 발닉이 씩 웃었다.
“제 몸부터 걱정해주시다니 이거 감동입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디터가 건넨 물 한 컵을 쭉 들이켠 발닉이 크,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잊어버리기 전에 바로 말씀드려야죠.”
그렇게 말문을 연 발닉은 엿들은 대화를 남김없이 들려주었고.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성공이군.”
우만과 브렉 사이에 분란을 조장하는 데 확실히 성공했다.
게다가 예상 외의 정보도 입수했다.
‘우만의 본명, 레온 드 빈터.’
2왕자의 시해 혐의로 멸문을 당한 빈터 가문.
우만이 그 가문의 최후 생존자라니.
‘그럼 팰러스가 그런 우만을 보호해주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우만이 팰러스를 자신의 은인으로 여기고 충성을 다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 건은 따로 조사해봐야겠군.”
내 말에 발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발닉의 이능을 이런 식으로 정말 활용할 수 있을 줄이야.’
그 점이 가장 고무적이었다.
발닉이 ‘동물 빙의’라는 능력을 개화시켰을 때, 나는 이 이능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 고민했는데.
‘동물에 빙의해 누군가의 대화를 엿듣는 건 어떨까?’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
첫째, 그 동물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아야 한다는 것.
둘째, 그 동물의 청각이 인간의 소리를 엿들을 수 있을 만큼 발달해야 한다는 것.
지능이 낮거나 친밀도가 높아야 빙의 성공율이 높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동물을 찾기 쉽지 않았으나···.
‘모기는 어떻습니까?’
지나가듯 던진 질문에 제이콥이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모기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서 몸을 피한다고 하더군요.’
나 역시 모기의 청력에 관한 기사를 봤던 기억이 있었다.
청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최근에는 사람의 대화를 듣는 수준임이 드러났다고 했던가.
하지만 발닉의 이능에 관해 중요한 의문점이 하나 있었는데.
‘빙의한 동물이 죽으면 발닉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이 의문에 관해서만큼은 실험을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찰나.
‘저, 세자르 님. 제가 따로 조사를 좀 해보았는데···.’
앨빈이 서재를 탈탈 뒤져서 찾아낸 책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얻었다.
이에 따르면 어떤 유목민들은 자신이 길들이는 동물에 빙의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빙의한 대상체가 예상치 않은 죽음을 맞이할 때였다.
대상체와의 친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대상체의 지능이 높으면 높을수록,
빙의능력자에게 돌아오는 피해가 커졌다.』
오래 길들여 빙의한 늑대가 죽음을 맞이하자, 빙의자는 그 충격으로 미쳐버렸고.
독수리의 경우는 한 달여를 내내 앓았으며.
거미의 경우는 하루 정도 기절해 있다가 깨어났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발닉은 걱정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것 아닌가.
‘그럼 뭐, 모기 정도면 설령 잡혀서 죽는다 해도 하루 정도 기절해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발닉이 기절할 필요 없이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것을 축하했고.
그다음 날, 자작가 방문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공작저로 돌아왔다.
* * *
“부르셨습니까?”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공작이 호출했다는 말에 그의 집무실로 향하자.
레핀 공작이 황망해하는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의 이런 모습은 처음인걸.’
맞은편에 털썩 앉자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자르, 너··· 대체 왕궁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온 거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폐하께서 날 부르시고···.”
“폐하께서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에 공작이 날 돌아보았다.
“폐하가 널 꽤 마음에 들어하신 모양인가 보다.”
나를? 어떻게?
‘연회 때 난 국왕의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데.’
게다가 국왕은 얼마 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내 얘기를 들었을 리도 없고 말이다.
“그게 왜 그렇게 이어지는 겁니까?”
“폐하가 널 해로드청년단에 넣고 싶어하신다. 하지만 청년단에 입회시키려니 다른 단원들이 너의 출신 성분에 불만을 가졌고.”
···설마 모후 안느나 노바스 공작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 나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한다고?
‘그렇게 귀가 얇다는 인상은 못 받았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국정의 대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소년 국왕은 두뇌가 명석하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가신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그거야 레핀 공작이 얼마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고.”
내가 그 말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미간을 좁히자.
공작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폐하가 날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너를···.”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짚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적자로 삼아줄 수 있느냐고.”
“···!”
···이건 나도 예상치 못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