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62화 (62/176)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

내 손등에 그녀가 손을 얹은 순간부터 느낌이 싸했다.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약을 팔려고 이러나.’

그 약이 보통 약이 아닌 것 같았지만, 일단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여기서 얻어낸 예상 외의 정보가 있다면.

‘공작 부인이··· 사실은 평민 출신이라고?’

원작에서는 공작 부인의 과거사가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

그저 외국의 귀족 영애이며,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탓에 어느 고위 귀족이 그녀의 후견인이 되어주었다고.

누군가의 소개로 참석한 사교파티에서 운명처럼 레핀 공작을 만나 불 같은 사랑에 빠졌고, 이듬해 팰러스를 낳았다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왜 갑자기 저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는 것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이 여자의 계산이 빤히 보였다.

‘사생아의 뒤를 봐주는 미지의 권력자를 섣불리 건드렸다간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지.’

그것도 보통의 권력자가 아니라고 지레짐작했을 터다.

레핀 공작저 내부의 사정까지 훤히 꿰고 있으며, 자신의 힘으로는 그 정체조차 알아낼 수 없는 자가 아닌가.

‘공작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가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

아마 그런 생각으로 휴전을 결심한 게 아닐까.

“···적대시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목소리까지 바꿔가며 몸을 낮추는 그녀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어린 세자르에게 제대로 된 의식주도 공급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종국에는 바야르를 시켜 채찍으로 학대하지 않았던가.’

이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상대가 되자 손바닥 바꾸듯 태도를 뒤집는 저 모습이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입안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 순간,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고-

[‘무효화의 목걸이’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2단계 스킬 ‘적극적 유혹’이 무효화됩니다.]

···2단계 스킬이라고?

‘공작 부인이 2단계 개방 이능자라고 했었지.’

보아하니 1단계 스킬은 패시브로 작용하는 것 같고.

2단계 스킬은 자신의 의지로 힘을 행사하는일종의 액티브 스킬인가 보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고개를 숙이자 리아나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저에게 무릎이라도 꿇기를 기대하는 모양이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가급적 기대에 부응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거든.’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는 리아나의 면전에 대고,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개소리는 그걸로 끝입니까?”

“···!”

리아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충격받은 얼굴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뭔가 큰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원래는 그녀의 현 상태를 탐색해보려는 심산이었지만.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당신이 무슨 일을 겪었든 어떤 과거가 있든, 그쪽이 날 죽이려 했던 건 변함이 없어. ···설마 벌써 잊었다고 할 셈인가?”

···이 기회를 이용해 그녀를 좀 더 압박해보기로.

리아나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자신의 이능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나 보다.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자르 네가 내게 쌓인 게 많은 건 알겠지만··· 내가 겪어온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면 안 되겠니?”

“이해?”

“난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네게 말했단다. 그 성의를 봐서라도···.”

“하아.”

한숨을 내쉬자 리아나가 몸을 움찔했다.

“내가 언제 비밀을 얘기해달라고 한 적이 있나?”

“하지만 그럼-”

“어떤 과거가 있든 간에 난 그쪽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마음도 없어.”

그 말에 리아나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분노가 일시적으로 당황함을 이겨낸 순간,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그럼 여긴 대체 왜 온 건데!”

그 뻔뻔한 모습에 어이가 없어졌다.

“···글쎄, 왜 왔을 거라고 생각해?”

한 걸음 다가서자, 리아나 또한 한 걸음 물러났지만.

어느새 밀려날 대로 밀려난 그녀의 등 뒤에 난간이 닿았다.

더는 도망칠 구석이 없음에 그녀가 당황한 순간, 내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 근처로 다가갔다.

“···!”

겁을 집어먹은 걸까.

그녀의 목울대가 꿈틀하며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던 손을 거두며 씩 웃었다.

“뭘 그리 겁먹는 건데?”

“···.”

“설마 내가···.”

나는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인공폭포를 향해 눈짓했다.

“여기서 ‘어머니’를 밀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그 말에 리아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너, 서, 설마-”

“그럴 리 없잖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아무리 그쪽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다 해도, 이렇게 뻔히 증거를 남길 만한 짓은 저지르지 않아. 다만···.”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당신을 감쪽 같이 처리할 방법은 고려해볼 수도 있겠지만.”

리아나의 얼굴이 또다시 창백해졌다.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리려는데, 앙칼지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웃기지 마!”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아까 내 행동에 상당히 겁을 먹었나 보다.

“레핀 공작의 총애는 한순간에 사라질 바람 같은 거다. ···너는 나와 팰러스가 두는 체스판의 졸에 불과해.”

그놈의 체스판 되게 좋아하네.

원작에서도 리아나는 체스 이야기를 백 번 정도 했던 것 같다.

“당신이야말로 크나큰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착각이라니?”

“가끔 가다 자신이 거미줄을 쳐서 다른 곤충을 잡아먹는 거미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있잖아. 근데, 그런 인간들은 꼭···.”

나는 잔뜩 경계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제아무리 거미줄을 그럴싸하게 치는 거미라 해도, 뱀의 아가리 앞에서는 한 입 거리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더군.”

“···!”

리아나와의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내가 등을 돌리고 저택 안으로 걸어가는 내내 그녀는 그곳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생각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군.’

라페스 자작가에 머물고 있는 공작 부인과 만나 동태를 파악하는 것.

이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용건에 불과했다.

그런데 설마 호감도창이 등장하고, 그녀에게 이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줄이야.

‘오프러스 대공가와 긴밀한 협력 관계임.’

게다가 비고 2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연회 때 들었던 소문에 따르면 지금 팰러스가 바로 이 오프러스 대공가에 머물고 있단다.

팰러스와 공작 부인, 오프러스 대공가가 대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다.

‘원작에서는 오프러스 공국 얘기는 거의 안 나왔던 것 같은데.’

만약 그들이 이 말대로 정말 긴밀한 협력 관계라면, 팰러스가 집권한 이후 공국에서 상당한 이득을 챙겼겠지만···.

왕위에 오른 팰러스가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결말이 나버렸으니, 외교적 상황을 알 도리가 있나.

하지만 오늘 이 라페스 자작저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만과 접점을 만들고, 그가 배신자가 맞는지 확인하는 것.’

아까 그 응접실로 돌아가자, 라페스 자작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르 님, 부인과는 말씀 잘 나누셨습니까?”

“그럼요. 자작님 덕분입니다.”

“다행입니다.”

자작은 오늘 저녁, 계획했던 대로 사교 모임이 열릴 거라고 덧붙였다.

···우리 우애단 단원들이 참석하는 사교 모임 말이다.

* * *

우만은 지금 앉은 이 자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의 손님들은 오늘의 사교모임에 무척 만족하는 눈치였지만.

“어머, 이건 산티노 공화국에서 수입한 물건들인가요?”

“이야, 오늘은 한층 더 훌륭합니다. 이 차도 그렇고, 함께 나온 다과들도 그렇고···.”

“눈만 호강하는 게 아니라 혀까지 호강하네요. 자작님의 고급스러운 취향이 배어나오네요.”

평소에도 라페스 자작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저택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그것을 매번 우만은 바쁜 일과를 핑계로 삼아 거절했으나.

‘세자르와 그 측근들도 참석한다고?’

게다가 자신이 그 자리에 참석하길 바라는 것을 보면.

이 자리가 다소 불편하더라도 그 속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흠흠, 다들 감사합니다.”

손님들의 칭찬에 라페스 자작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아, 오늘은 평소보다 힘을 좀 줘봤습니다. ···이 자리에 특별한 손님을 모셨거든요.”

“특별한 손님이라면?”

라페스 자작이 응접실 한가운데에 앉은 세자르를 소개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레핀 가문의 세자르 님과 그분의 친우들이 오늘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세자르가 그에 대꾸하듯 가볍게 눈인사를 해보이자,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어머, 저분이 말로만 듣던 레핀 가문의 세자르 님이신가요?”

“이번 왕궁 연회에서 근사한 말씀을 하셨다던데.”

잠시 후.

어느새 수많은 손님들이 세자르를 둘러싸고 질문 공세를 하는 형국이 되었다.

“검술대회에서 우승하셨다면서요?”

“아카데미에는 어떻게···.”

“혹시 노바스 공작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실내가 소란스러운 가운데,

라페스 자작이 리아나 부인을 데리고 나타났다.

“···.”

여기 모인 이들은 대부분 세자르와 리아나가 어떤 관계인지 아는 만큼, 입을 다문 채 서로의 얼굴만 흘긋거렸다.

자작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다들 세자르 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리아나 부인이 미소 지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어미로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역시 부인이라면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저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라페스 자작을 보며 우만은 눈을 크게 떴다.

‘···자작님?’

자작은 호인이긴 한데 가끔 지나칠 정도로 분위기 파악을 못 할 때가 있다.

어쨌거나 -엎드려 절 받기이긴 하지만- 리아나 본인이 직접 그렇게 말한 덕분에,

손님들은 또다시 세자르를 화제로 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세자르 님의 검이 그렇게 신출귀몰하다지요?”

“검술대회를 보러 가지 않은 게 천추의 한이로군요.”

“세자르 님의 검술을 한 번 보고 싶은데···.”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리아나 부인이 툭, 이런 말을 던졌다.

“그래봤자 우만 군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지요.”

갑자기 튀어나온 제 이름에 우만이 고개를 든 순간, 리아나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우만 군이라 하심··· 팰러스 공자님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분이 아니십니까?”

“아카데미가 문을 연 이래 최고의 수재로 알고 있는데, 검술까지 뛰어나단 말입니까?”

참석객들의 화제가 우만으로 옮겨가자 리아나 부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섭하군요, 어머니.”

“사실은 사실이지 않니.”

“아카데미에 들어온 후로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아쉬울 것까지야.”

멋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사이 좋은 모자가 틱틱거리며 대화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야, 둘 사이에서 불꽃이 막 튀는데?”

“그러네, 정말.”

라페스 자작의 초대를 받고 온 카렌과 리암의 말대로,

세자르와 리아나 부인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카렌이 말했다.

“그나저나 공작 부인은 진짜 예쁘네. 여자인 내가 봐도···.”

“음, 나는 리아나 부인보단-”

“부인보단 뭐?”

“아, 아냐.”

한편.

우만은 이 모든 대화의 중심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은 채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는데.

돌연 세자르가 폭탄 같은 발언을 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저와 우만 선배가 대련을 선보이는 건 어떻겠습니까?”

···뭐라고?

우만은 벌떡 일어서고 말았고, 좌중의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호오, 그러고 보니 우만 님이 팰러스 공자님의 호위를 맡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군사학부 학생들이 가르침을 청할 정도라는 게 사실인가요?”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상황을 정리하듯 라페스 자작이 우만의 의향을 물었다.

“우만 군은 어떤가? 갑작스럽겠지만···.”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 말대로였다.

우만은 세자르의 경기를 관전했던 만큼 그의 실력을 알고 있었고, 이렇게 확신했다.

‘확실히 나이에 비해 뛰어난 편이지만, 그 정도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리아나 부인이 풋 웃으며 말했다.

“그거 재미있겠구나, 세자르.”

“그럼요.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어머니.”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맞받아친 세자르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우만의 앞에 와 섰다.

“우만 선배.”

그 친근한 호칭에 우만은 차갑게 대꾸했다.

“···우리가 선후배 하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허, 같은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는 사이인데 선후배 사이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만은 미간을 좁혔다.

저놈의 선배 소리에 팔 위에 소름이 돋으려는데.

“이번 대련을 걸고 저랑 한 가지 내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기?”

세자르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제가 지면 구미가 당길 법한 정보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

대체 이 자식이 무슨 꿍꿍이일까.

우만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리고 제가 이기면···.”

세자르가 그에게 몸을 붙이더니,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선배의 ‘여동생’에 관해 단 둘이 대화를 나눠보는 것 어떨까요?”

“···!”

우만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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