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61화 (61/176)

응 다음 개소리

리아나 레핀은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세자르, 네가 어째서···.”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뭔가 느낌이 다른걸.’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심정이 기억난다.

뭘 지시하든 간에 다 따르고 싶다, 뭐든 다 갖다 바치고 싶다.

사람에게 ‘홀린다’는 기분이 뭔지 여실히 느껴졌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그저 미인이네, 라는 감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찰나.

[‘무효화의 목걸이’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매혹의 이능’(패시브)이 무효화됩니다.]

···역시!

나는 옷 아래 감춰진 ‘무효화의 목걸이’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호감도창을 확인했다.

『레핀 공작 부인 ‘리아나’ (호감도 -100점)

- 이능자 ‘매혹하는 자’(2단계 개방)

- 특성 : 교활함, 계산적, 탐욕스러움, 권력욕

- 비고 : 이 나라의 권좌에 아들 팰러스를 앉히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여인.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용하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 비고 2 : 오프러스 대공가와 긴밀한 협력 관계임.』

‘공작 부인마저 이능자였다니.’

상대를 매혹시키는 이능이라는데, 평소 그녀의 평판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매혹 대상은 ‘남성’에 한정되는 것이 아닐까 싶고.

패시브라고 나왔으니 딱히 이능을 쓴다는 자각 없이 늘 주변인들을 매혹해왔을 것이다.

‘이거야말로 진짜 무시무시한 이능이군.’

여태껏 그녀가 사교계의 전설로 군림하며 수많은 남성을 쥐락펴락하고, 그 완고한 레핀 공작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결혼에 성공한 게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리고 어쩌면 나 역시도-

‘생각해보면 그때, 독사에 물려 죽게 놔둬도 됐을 텐데 말이지.’

야유회 때 말이다.

바야르가 풀어놓은 독사를 굳이 내가 죽여버렸으니 말이다.

그때 공작 부인을 죽게 놔뒀다면 한결 일이 수월해졌을 텐데.

‘원작이 너무 틀어질까 봐, 혹은 팰러스의 유일한 약점을 이렇게 없애선 안 된다는 이유로 굳이 쉬운 길을 피해갔지.’

어쩌면 그때의 나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이미 매혹 이능의 영향 아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이···.

‘생각 외로 이능자의 수가 훨씬 많을 수도 있겠는데?’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등록하고 관리하는 이능자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헌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능자란 대부분 그 능력이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경우다.

‘공중부양을 한다든가 손대지 않고 물건을 움직인다든가.’

반면 리아나 부인처럼 정신계 이능, 그것도 패시브로 적용되는 이능이라면.

남들은 물론이고 자신조차 이능자인 줄을 눈치 못 챌 수도 있겠다 싶다.

‘나야 무효화의 목걸이나 상태창 덕분에 알아차렸지만.’

리아나 부인은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구겼지만, 곧바로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예상치 못한 손님을 봬서 당황했을 뿐.”

그 말에 오히려 라페스 자작이 더 당황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세자르 님이 꼭 좀 부인을 뵙고 싶어하시길래··· 당황하실 거라곤 생각도 못-”

“브루스.”

부인은 자작의 퍼스트네임을 부르며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다정한 사람.”

“···부인.”

“나 역시 세자르를 보고 싶었던 건 마찬가지이니까.”

오히려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줘서 고맙다.

아무리 내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지만 세자르는 늘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다며.

‘아주 청산유수네.’

그런 되지도 않는 말에 자작은 홀랑 넘어가 눈시울까지 붉혔으니.

“부인···!”

보아하니 이 아저씨, 한때 온 나라를 주름잡던 노련한 거상이었던 그의 부친과는 달리 호구 중의 호구인 듯하다.

뭐 나야 딱히 알 바는 아니지만.

“그러니 말인데, 내가 세자르와 단둘이 이야기할 만한 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을까요?”

나 역시 바라는 바였다.

* * *

최근 교양학부 학생들 사이에서는 방학을 맞이해 ‘견문 여행’을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

직사각형으로 생긴 에스닐 왕국은 네 개의 나라와 국경을 맞댄 내륙국.

이 이웃 나라들 가운데서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라 불리는 산티노 공화국이 제일 인기가 많았는데.

‘팰러스 공자님이 오프러스 공국에 가신 건 좀 의외 아냐? 막강한 군사력 외에는 뭐 하나 봐줄 만한 게 없는 나라인데···.’

‘그거야 뭐 개인의 취향 아니겠어. 타릭 님도 같이 가셨다던데?’

브렉 또한 방학 초반을 이용해 짧게 여행을 다녀온 터였다.

그리고 우만은···.

‘우만 군, 이번에도 우리 자작가에 머물러줄 수 있겠나?’

에스닐 최고의 거상인 아버지 덕분에 한낱 평민에서 ‘라페스 자작’이 된 사내.

그 딸의 공부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자작가에 머무는 중이었다.

우만은 브렉과 타릭만큼 좋은 집안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우만 군은 교양학부 사상 최초의 수석 입학자일세.’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것은 대부분 행정학부 학생들이었는데, 우만이 입학한 해에 처음으로 그 역사가 깨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데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고, 검술 실력 또한 수도기사단원들에 버금갈 정도로 발군이었으니.

‘우만 군이 팰러스 공자님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라며?’

무엇보다도 팰러스의 신뢰를 받는 최측근, 이라는 타이틀이야말로 오늘날 우만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준 일등공신.

팰러스는 그를 향한 신뢰를 증명이라도 하듯, 공작과 별거 상태에 들어간 자신의 어머니를 ‘라페스 자작가’에 모시기를 희망했다.

‘우만 네가 있으니 어머니의 안전은 보장된 것이 아니겠나.’

우만이 리아나 부인을 뵙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때 수도 사교계를 주름잡던 전설적인 미인이라더니, 지금도 그 전설은 유효한 듯했다.

팰러스와 똑 닮은 얼굴의 여인은 3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때로는 소녀처럼, 때로는 완숙한 여인처럼 보였다.

‘라페스 자작이 홀딱 넘어간 것도 이해가 가는군.’

그녀를 볼 때마다 심장 박동 수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샌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좇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 그대로 마성의 여인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젖어 있던 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저, 우만 군?”

“자작님 오셨습니까.”

우만을 위해 따로 마련해준 서재에, 라페스 자작이 직접 찾아와 말을 건넸다.

“다름이 아니고 오늘 우리 자작가에서 특별한 사교 모임이 열리는데, 우만 군이 꼭 참석해줬으면 해서 말이네.”

우만이 미간을 좁히자 자작이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자네가 그런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아네만··· 오늘 그 모임이 아카데미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 될 거라서 말이야.”

“···아카데미 학생들이요?”

그게 누구냐고 묻자 라페스 자작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레핀 가문의 세자르 님을 알고 있나?”

자작은 왕궁연회에서 세자르와 친해져 그를 이곳에 초대했으며, 그의 친우들도 함께 초대했음을 밝혔다.

“친우들···이라 하심은.”

“그 뭐라더라, 무슨 단체 소속이라고 했는데.”

“우애단?”

“아, 맞네. 우애단!”

라페스 자작은 손뼉을 치더니, 우만도 모임에 참석해달라고 다시금 권유했다.

“세자르 님도 우만 군이 함께해줬으면 하는 눈치라서 말이지.”

···세자르가 어째서 나를 찾는단 말인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우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도 참석하지요.”

“고맙네!”

라페스 자작이 사람 좋게 허허 웃었지만.

우만의 눈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 * *

리아나 레핀과 세자르는 자작가 안에 외따로 자리한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좋겠군.’

그녀는 일부러 인공 폭포를 감상하게 해놓은 난간에 몸을 기댔다.

쏴아쏴아.

시원하게 물 떨어지는 소리 덕분에 대화가 바깥으로 새어나갈 일은 없을 터이니.

“기별도 없이 남의 집에 들이닥치다니, 과연 근본이 없는 서자답구나.”

리아나는 어느새 저보다 한 뼘은 더 커진 세자르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내 이름을 대고 그런 식으로 나타나면 내 평판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 안 하나 보지?”

세자르.

이제는 듣기만 해도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강력한 증오의 대상.

얼마 전만 해도 비루먹은 말이나 다를 바 없던 소년은-

‘자중하십시오. 자꾸 나서서 뭔가를 하려 할수록 당신의 명을 재촉하는 일이 될 터이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아예 다른 인물이 되어 자신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고.

‘죄인 훔 바야르를 영구 추방한다.’

‘마님! 림 바야르 경이 체포되었답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제게 완전히 순종하게 한 수족들을 다 잘라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종국에는 그 완고한 공작의 신뢰까지 얻어내···.

‘범인이 자신의 배후에 당신이 있다고 이실직고했소. 2년간 꾸준히 내 식사에 비소를 타느라 고생이 많았군.’

오랫동안 준비해온 자신의 큰 그림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반드시 되갚아주마.’

레핀 공작과는 한 군데도 닮지 않은 곱상한 청년의 옆얼굴을 보며,

리아나는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증오심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내 말이 들리지 않나 보지?”

“아, 잠시 경치를 보느라. 뭐라고 하셨습니까?”

속이 끓을 대로 끓는 그녀와는 달리, 세자르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리아나는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이곳에 작정하고 찾아온 것을 보니 무언가 준비해둔 게 있는 모양인데.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냐.”

“꿍꿍이라뇨, 전 그저 그간 밀린 대화나 나누려고 찾아왔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제는 소년이라기보단 청년에 가까운 세자르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랫동안 공을 들이신 계획이 저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 게 마음 아프실 것 같기도 하고요. 안 그렇습니까?”

“역시 네 소행이 맞았구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자르의 배후를 봐주는 것이 대체 누구일까, 뒤늦게 다시 의문이 든 순간.

청년의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뒤를 봐주는 게 누군지 아직도 못 알아냈나 보군요.”

“···!”

그 말에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열네 살 소년이 혼자 힘으로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리아나의 두뇌가 빠르게 돌아갔다.

긴 속눈썹이 두 번 깜박이더니, 아까 전만 해도 적개심으로 불타오르던 눈동자에 빠른 계산이 스쳐지나갔다.

‘일단은···.’

그녀는 제 안의 증오심을 조심스레 갈무리하고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세자르, 지금의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린 그리 다르지 않은지도 몰라.”

그녀는 난간을 잡은 세자르의 손등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렸다.

청년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모두가 나를 고귀한 집안의 여식으로 알고 있지만···.”

리아나는 그 손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사실은 아니야. 한낱 평민에 불과한 여인이 이런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떤 일들을 겪어야 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거다.”

“···.”

“어쩌면 너와 나는, 처음부터 서로 적대시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청년이 저를 내려다보며 침을 꿀꺽하는 것이 보인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잘나 봤자 사내란 다들 매한가지가 아니던가.’

리아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특별한 힘’을 개방했다.

···여태껏 그 어떤 사내도 감히 거부하지 못한 유혹의 힘을.

‘진작 이렇게 했을 것을.’

괜히 먼 길을 돌아왔다 싶다.

그녀의 매끈하고 가느다란 손이 세자르의 몸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대로 청년의 가슴팍에 손을 얹으려던 순간,

세자르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

어안이 벙벙한 채 위를 올려다보자,

세자르가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개소리는 그걸로 끝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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