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60화 (60/176)

삼발이가 뭔지 아십니까

“전하.”

“···오라버니 오셨습니까.”

연회가 끝난 다음 날.

노바스 공작, 션 노바스는 모후 안느 드 노바스의 집무실에서 그녀를 독대했다.

“피곤해보이십니다, 전하.”

“이 정도야 일상이지요.”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인 안느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언제 봐도 우아함을 풍기는 아름다운 외모이지만,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소녀 시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라버니, 이제 저는 소녀 안느가 아니라 일국의 모후입니다.’

언젠가 누이가 했던 말을 들으며 션은 뒤늦게 깨달았다.

물정 모르고 순진했던 동생은, 자식의 안위를 노리는 수많은 위협 속에서 점차 노련하고 단단해졌음을.

션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제 연회는 어떠셨습니까, 전하.”

“글쎄요, 평소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던 것 같군요.”

안느 드 노바스는 미간을 좁히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브렉 헬리오스는 여전히 시건방졌고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션 노바스는 브렉이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전대 공작이 살아 있을 때부터 헬리오스 백작가는 공공연히 왕가에 반대를 일삼았다.

이제 전대 공작마저 죽고 나자, 백작가의 어린 장남마저 왕실을 허수아비로 보고 막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다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아뇨, 오라버니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오히려 그 자리에서 헬리오스파를 대놓고 적대시하지 않으셨으니 현명하게 처신하신 셈이지요. 게다가···.”

최근 늘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젊은이 하나가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주지 않았나요.”

“···레핀 가문의 세자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레핀 가문의 세자르.

청년의 목소리가 안느의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저라면 폐하의 존안을 자주 뵐 수 있는 기회를 요청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던 세자르에게서는 기묘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을 타고난 것일까.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렇게 느낀 것이 그녀뿐이 아닌지 회장 안의 모두가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지 않았던가.

“어제 그 청년··· 묘하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더군요.”

안느의 대답에 션이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마음에 드신다면 해로드 청년단 후보로 천거해볼까요?”

“···일단은 폐하의 의중부터 여쭙고 나서 진행하지요.”

안느 드 노바스는 어제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렸다.

* * *

과거 온 나라의 귀족이 참석해 국왕 앞에서 아양을 떨던 선왕 유스톤 3세 때와는 달리,

그녀의 아들 테오가 집권한 후로 열리는 왕궁 연회에는 오랜 국왕파와 노바스 가문의 가신들만이 참석해왔다.

‘이번엔 그나마 사정이 낫군.’

오늘은 아카데미의 우수 학생들 역시 참석하는 자리이니만큼, 쓸 만한 인재를 찾고자 이 자리를 찾은 귀족들의 수가 상당했으니 말이다.

그때, 연회장 한가운데서 설전을 벌이는 헬리오스 가의 장남과 그녀의 오빠, 노바스 공작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국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후로 낯 뜨거운 말들이 이어졌다.

안느는 모멸감에 두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폐하가 먼저 들어가셔서 다행이군.’

모후가 뻔히 앉아 있는 자리에서 나올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엄한 언사였지만.

지금의 왕실은 그런 이들조차 함부로 단죄할 힘이 없었다.

“왕관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을 쓸 자격이 없는 것 아닙니까?”

“···!”

브렉의 말에 연회장이 술렁인 순간.

“그렇다면 브렉 공자, 우리 귀족들이 신의 가호를 받았다면··· 그 가호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겁니까?”

호리호리한 소년, 아니 이제는 제법 청년 티가 나는 이가 끼어들었다.

노바스 공작을 비롯해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브렉 공자님께서는 우리가 ‘신의 가호’를 받은 특별한 자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저자가 누구냐, 하고 눈짓을 보내자 측근은 귓속말로 답했다.

‘레핀 가문의 세자르입니다.’

레핀 공작의 사생아이자 ‘레핀 가문의 수치’로 유명한 인물이라고 일러주는데.

“···삼발이라는 물건을 아십니까?”

돌연 세자르가 뜬금 없는 말을 던지며 주의를 환기했다.

“발이 세 개 달린 받침대인데, 위에 올려놓은 물건을 지탱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지요.”

덕분에 모두의 이목이 한층 더 청년에게 집중되었다.

“이 위에 올려진 것이 이 나라 에스닐이자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것을 받치는 세 개의 발은 왕과 귀족, 교단이 아닐까요?”

방금 전 브렉과 노바스 공작이 설전을 벌일 때만 해도 웅성거리던 실내는,

세자르의 웅변에 어느덧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발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나라 전체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왕이 된 자가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의무이나, 우리 역시 이 왕관을 지탱하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차분하고도 설득력 있는 목소리에 그 누구도 쉽사리 반박하지 못했다.

일부 나이든 귀족들은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으며.

젊은 귀족들은 깊은 인상을 받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저 청년 같은 인물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인지도 모르겠다.

안느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 * *

왕궁연회에서 얻은 소득은 생각보다 컸다.

일단은 노바스 공작에게 내 존재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운 좋게 그 순간에 공작의 상태창이 떠줄 줄이야.’

『‘노바스 공작’ 션 드 노바스(호감도 +0점)

- 특성 : 정직, 올곧음, 우직함, 호방함

- 비고 : 타고난 책사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무인처럼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소년 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아군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덕분에 나는 노바스 공작이 듣고 싶어할 만한 말만 쏙쏙 골라서 해주었고.

‘상당히 야심찬 젊은이로군.’

공작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으니, 적어도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게다가 매혹의 향수까지 썼으니.’

향수의 실질적인 효과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안 쓰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노바스 공작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게 왜 중요하냐고?

‘그거야 내가 지금 아군으로 포섭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이니까.’

지방 귀족들은 어떨지 몰라도 수도 귀족이라면 대부분 이렇게 생각했다.

국왕과 노바스 가문은 지는 해요,

팰러스 레핀은 떠오르는 해라고.

‘레핀 공작의 서열이 더 높긴 하지만, 애초 권력에 관심이 없어 은둔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니.’

그에 반해 팰러스는 사교계를 들락거리며 자신의 야망을 주저없이 피력해왔다.

덕분에 수도 귀족 세력 대부분은 이미 팰러스 쪽으로 돌아선 상태였으니까.

‘설령 내가 적자로 인정을 받는다 해도.’

장남인 팰러스에 비해 서열도 밀릴 뿐더러,

출생이 천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아무리 레핀 공작의 지지를 받는다 한들, 누가 적장자 대신 사생아를 지지하는 모험을 하겠나.

‘하지만···.’

내가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어필하며 지금의 국왕, 그리고 노바스 가문과 손을 잡는다면 상황은 좀 달라진다.

그리고 이 구도를 잘만 이끌어나간다면···.

팰러스와 나의 대립 구도가 ‘단순한 적장자 vs 사생아’의 구도에서-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 하는 위험한 적장자 vs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충성스러운 차남’의 구도로 변할 수 있다는 것.

삼발이 고사라든가.

태양의 주변을 도는 달이라든가(이 동네에서 ‘지구’라는 말을 잘 쓰는지 모르겠어서 달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넓게 보면 달도 태양 주변을 도는 게 맞으니까).

이런 오글거리는 표현을 쓴 것은 다 그런 목적에서였다.

‘물론 레핀 가문의 일원인 나를 팰러스와 한 통속으로 여겨 경계할 수 있지만.’

그러한 우려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나는 일부러 브렉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팰러스의 총애를 받는 사내와 내 사이가 절대 좋지 않음을 보여준다면, 나를 팰러스와 엮어서 생각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이번 연회에서, ‘나는 팰러스와 다르다’라는 것을 노바스 가문에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그렇게 왕궁연회가 성황리에 막을 내린 지 일주일 뒤.

-레핀 가문의 세자르 귀하, 퍼킨스 가문의 저택에서 사교연회를 개최하오니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십사···.

-세자르 님께, 여유가 되신다면 저희 데스할트 가문의 정기 무도회에 참석해주시기를···.

-식견이 높은 청년들의 정기 사교회 ‘조찬기마청년단’에 귀하를 초청하오니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방학이 한참 남은 덕에 집에만 있기가 아쉽던 차에, 지난번 연회에서 마주쳤던 귀족들이 공작저로 초대장과 명함을 산처럼 보내왔다.

수십여 개에 달하는 초대장을 주루룩 훑어본 후 그중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고.

“어떻게 좀 입에는 맞으십니까?”

지금은 그중 한 곳을 방문해 귀하디 귀한 손님 대접을 받고 있다, 이 말이다.

나는 대륙 남부 어느 지방의 특산품이라는 귀한 차를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아주 훌륭하군요.”

“오, 다행입니다.”

“자작 부인께서 고급스러운 취향을 지니고 계신가 봅니다.”

내 말에 자작은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이, 저.”

옆자리 손님이 귓속말로 귀뜸해주었다.

“저, 자작 부인은 5년 전에 타계하셨습니다.”

“아, 이런.”

나는 정말로 몰랐던 척하며 자작에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작님. 제가 사교계 소식에는 워낙 무지한 터라···.”

“아닙니다, 세자르 군. 게다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게 이 차를 고른 분의 안목은 정말로 탁월하니까요. 그분이 이 저택에 오신 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라페스 자작은 한눈에 보기에도 푹 빠진 얼굴로 ‘그분’의 칭찬을 이어나갔다. 재산은 물론이고 영혼까지 탈탈 털어줄 기세인 자작을 보며 옆자리 손님이 맞장구를 쳤다.

“리아나 부인이라면 유명하시지요. 외모만 아름다우신 게 아니라 취향과 안목까지···.”

“리아나 부인이라니, 그분이 누구십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묻자.

“아, 세자르 님은 모르셨군요. 그것이···.”

민망해하는 자작을 대신해 옆자리 손님이 설명했다.

“사실은··· 얼마 전부터 리아나 부인, 아니 레핀 공작 부인께서 이 라페스 자작가에 거하고 계십니다.”

리아나 공작 부인.

본디 ‘레핀 공작 부인’이 격식에 맞는 호칭이나, 공식적인 별거에 들어간 후 공작 부인 본인이 ‘리아나’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들었다.

···내가 라페스 자작가를 불시에 방문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리아나 레핀’의 눈앞에 나타나 그녀의 허를 찌르는 것.

‘그리고 이 만남에서 뭔가를 알아낼 수 있으면 더 좋고.’

나는 엄청나게 충격 받은 얼굴로 외쳤다.

“···어머니가, 이곳에 계신다고요?”

일부러 ‘어머니’라는 단어를 택하자 두 사내의 표정이 급숙연해진다.

“···세자르 님께서는 모르셨군요.”

나는 일부러 한 박자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귀가했는데 아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주지 않더군요.”

“···.”

연민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는 두 사내.

아무래도 이 ‘사생아 세자르’의 가정환경에 관해 저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듯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어머니가 자작님과 친분이 있으시다고 하여, 혹시 이곳에 계실까 싶어 염치불구하고 찾아뵌 것입니다.”

“그런 연유가···.”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라페스 자작은 무척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 이해해주시다니 기쁘군요.”

자작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리아나 부인’을 응접실로 데려오겠다고 말했다.

“아, 그럼 한 가지···.”

그녀에게 ‘세자르’가 방문했음을 얘기하지 말고 데려와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어머니께서 저를 피하려 하실 수도 있으시니까요, 하지만···.”

일부러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저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세자르 님···.”

라페스 자작의 목소리에 물기가 맺혔다.

이 사람 좋은 아저씨를 이용해먹는 데에 아주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지만.

나는 리아나 부인을 데리러 가는 자작을 붙잡지 않았고,

잠시 후.

“손님이 오셨단 말인가요?”

“그래요. 부인을 아주 보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라면···.”

몇 달 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지만 틀림없었다.

리아나 레핀.

그녀가 자작과 함께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언제나처럼 눈부신 금발에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십여 년 이상 수도 최고의 미녀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인.

“너는···.”

리아나 레핀이 날 보며 눈을 부릅 떴다.

‘목적은 무사히 달성했고.’

그 순간, 간만에 호감도 메시지가 떴다.

[‘리아나 공작 부인’의 호감도가 -100에 달했습니다.]

[‘리아나 공작 부인’의 호감도창이 공개됩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공작 부인의 호감도창이···

이제야 공개된다고?

그다음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특수 해금 요건을 충족해 ‘리아나 공작 부인’의 이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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