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59화 (59/176)

예쁘게 봐주시죠

왕궁 연회.

이름만 들어도 뭔가 대단히 삐까번쩍한 게 상상되지 않는가.

루이 14세 시절의 화려한 연회.

상상력을 자극하는 온갖 기상천외한 요리들을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먹고 마시며 즐기는···.

“주지육림일 줄 알았는데.”

“네?”

내 뜬금없는 말에 앨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아냐.”

나는 다른 것보다도 연회에서 나올 음식에 큰 기대를 했던 차였다.

고기 파이를 뚫고서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장면이라든가.

배 속에 전복, 대하, 대게 따위를 넣고 꿰맨 거위통구이라든가.

귀한 식재료를 10단 탑처럼 쌓아올린 화려하기 그지없는 요리라든가.

그런 것들을 기대하고 왔건만···.

‘실망이로다, 실망이로다.’

나는 앞에 놓인 접시를 보며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평범한 크기의 스테이크와 역시 평범해 보이는 구운 채소들. 왕족이 먹기에는 상당히 거칠어 보이는 빵 하나가 전부였다.

‘이거야 원, 어제 조리장 벤이 해준 요리보다 더 부실하군.’

하지만 아무도 아직 포크를 들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국왕과 모후의 입장을 기다리는 눈치다.

때마침 전령이 소리 높여 외쳤다.

“에스닐의 유일무이한 태양이신 국왕 폐하와 모후 전하 납시오!”

그에 맞춰 연회장의 기다란 식탁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앞쪽을 주시했다.

저벅저벅, 오직 왕족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로 누군가가 걸어들어옴과 동시에.

연회장의 귀족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에스닐의 태양을 뵙사옵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소년 국왕 테오 2세와 모후 안느 드 노바스였으니.

아홉 살이라고 들었을 때 짐작하긴 했지만, 실제로 본 테오 2세는 예상보다도 훨씬 작았다.

‘몸도 안 좋아 보이고 말이지.’

모후 안느를 닮은 듯 아름다운 외모의 소년이었지만, 창백한 피부에 눈 아래가 시커먼 것이 척 보기에도 건강이 안 좋은 듯했다.

‘머리가 비상하지만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소년’이라는 원작의 묘사 그대로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의식하며 소년 왕이 연회장의 상석에 앉아 입을 열었다.

“왕궁연회에 와준 그대들을 환영하오. 에스닐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는 알레스신께 경배드리며···.”

병약한 소년은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을 향한 희미한 무시 혹은 경시의 눈빛 앞에서도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시간을 마음껏 즐겨주길 바라오.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소년 왕은 그대로 상석에서 물러나 구석의 테이블에 따로 자리를 잡았다.

모후 안느 드 노바스 역시 소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귀족들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시작했다.

‘···좀 당황스러운데?’

왕이 식사를 들기 전에도 이렇게 먹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자.

맞은편에 앉은 리암이 작게 속삭였다.

“원래 폐하는 연회에서 일절 입에 대지 않으신다고 들었다.”

“···?”

“원래는 이 시각에 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게 공식적인 이유이지만···.”

아.

나는 리암이 말을 흐린 이유를 알아차렸다.

···혹시나 모를 독살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는 그 무엇도 입에 대지 않는 거겠지.

“더 말 안 해도 돼.”

그 말에 리암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음식은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맛이 있군.’

그렇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 라고 중얼거리자 카렌이 픽 웃었다.

“대체 뭘 기대했던 거야, 세자르? 해로드 왕가는 청빈과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가풍이 있다고.”

“그래서 넌 깨작대며 먹는 거고?

나는 콩쪼가리와 아스파라거스를 빼놓곤 손도 대지 않은 카렌의 접시를 턱짓했다.

“난 원래 고기를 안 좋아하거든.”

“뭐래.”

리암은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요즘 국경지대의 전투가 늘었다고 들었다. 군비 지출이 늘어난 탓에 다른 쪽의 지출을 제한하는 것 아닐까.”

놀라운 얘기는 아니다.

딸 안느를 대신해 섭정 역할을 하던 전대 노바스 공작이 죽으며 왕권이 크게 흔들렸으니.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되자 사람들은 또다시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악사들의 곡에 맞춰 가운데에서 춤을 추는 무리들.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무리들.

‘그나저나 공작 부인은 안 왔나.’

레몬수를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리아나 레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 그게.”

카렌의 말에 나는 공작 부인이 혹시 왔을지 싶어 연회장 안을 살펴봤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여긴 안 왔을 거야.”

“왜?”

“최근에 왕궁연회는 국왕을 지지하는 소수의 귀족들만이 참석하는 자리가 돼버렸거든. ···물론 오늘은 아카데미 학생들도 오는 자리이니, 쓸 만한 인재를 찾는 귀족들도 온 거지만.”

그녀는 좌중을 휙 둘러보며 덧붙였다.

“공작 부인은 지금 라페스 자작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고 들었어.”

“···라페스 자작?”

이름은 들어봤던 것 같은데, 아마···.

카렌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 나라 제일의 거부.”

“아.”

“소문으로는 라페스 자작이 공작 부인에게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던데? 수도의 보석상과 드레스상들이 라페스 자작가에 하루가 머다 하고 찾아간다고···.”

원작과 벌써 많은 것이 달라졌구나 싶다.

원래는 공작과 별거 중이 아니었으며, 음식 속 비소를 모르고 복용하던 공작에게 처음으로 증상이 나타난다.

‘건강이 나빠져 마음이 약해진 공작을 공략해, 공작 부인은 공작저의 실권을 상당 부분 제 것으로 만들지.’

그것은 결국 팰러스가 사교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는 데 밑거름이 되었으나···.

‘이제는 공작저에서 쫓겨나 돈 많은 하급귀족의 정부를 자처한다는 건가.’

레핀 공작이라는 든든한 자금줄이 사라진 이상, 지금 팰러스 세력에게 가장 시급한 건 재원을 확보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한 무리의 대화가 들려왔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하, 그렇다면 지금 이 시국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수도의 대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상당 부분 내려놓았습니다. 헌데 그걸로도 모자라 사병을 내놔야 한다는 겁니까?”

지금 이건 브렉의 목소리였고.

“사병을 내놓으라는 게 아닐세. 북부 국경지대의 전투가 점점 치열해지고 길어지고 있다는 것뿐.”

그와 팽팽히 대치 중인 건··· 누구지?

그때 카렌이 한마디했다.

“젊은 노바스 공작이네.”

···저 사람이 안느 드 노바스의 오빠인 션 노바스라고?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노바스 공작에게 접근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던 차다.

나는 카렌을 놔두고 그쪽으로 슬쩍 접근했다.

“카렌, 잠시만.”

“어? 어.”

노바스 공작의 점잖은 말을 브렉은 조소하듯 받아쳤다.

“하, 그래서 결국은 같이 싸우자는 것 아닙니까.”

“···북부 국경수비대를 맡고 있는 윈저 가문에서 공식 증원 요청을 해왔네. 그대가 속한 헬리오스 가문 또한 과거 윈저 가문과 함께 전장을 누빈 역사가 있지 않은가.”

“대체 언젯적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공작님. 그때야 무인들의 시대라고 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옛말에 이런 것이 있지요.”

브렉은 그 자리에 모인 다른 귀족들, 특히 제게 호의적인 귀족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왕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분노로 몸을 잘게 떠는 공작을 보며 그가 비열하게 웃었다.

“그것조차 견디지 못한다면, 왕관을 쓸 자격이 없는 것 아닐까요?”

“어디 무엄하게-”

노바스 공작이 폭발하려는 순간.

“그렇다면 브렉 공자.”

내가 끼어들었다.

나를 발견한 브렉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스스로를 ‘대귀족’이라 칭하는 헬리오스 가문은 무엇을 짊어지고 있습니까?”

“그게 무슨-”

“왕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리고 또···.”

나는 일부러 기억을 더듬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아, 이렇게도 말씀하셨죠. 우리처럼 신의 가호를 받고 태어난 이들은 못 가진 자들을 위해 한 걸음 물러서줘야 한다!”

브렉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브렉 공자의 말로는 우리 귀족들이 신의 가호를 받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는 브렉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이내 다른 귀족들을 한 명 한 명 돌아보며 말했다.

“그 가호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겁니까?”

방금만 해도 소란스럽던 연회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 * *

“레핀 가문의 세자르 군이라고 했소?”

션 노바스가 한 걸음 나서자, 세자르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알아봐주시니 영광입니다, 각하.”

“이번 검술대회의 우승자라 들었소.”

“저 혼자 우승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자르가 뒤편에 쭈뼛거리며 서 있는 자신의 또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승을 차지하는 데는 친구들의 공이 더 컸습니다.”

그 모범적인 대답에 션 노바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버렸다.

‘검술대회에서 우승한 아카데미 학생들을 이 자리에 부르는 건 매해 해오던 일이지만.’

대부분은 난생 처음 참석하는 왕궁 연회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헌데 이 청년은 자신과 브렉 헬리오스가 치열한 설전을 벌이는 데 끼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것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세자르 군. 질문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편히 질문하시지요.”

“그대가 만약 아카데미 검술대회가 아니라 왕궁 검술대회에서 우승했다고 친다면 말이오.”

“···백여 년 전에 사라진, 전설적인 무인들이 합을 겨뤘던 대회 말씀이십니까.”

세자르의 표정에서 묘한 경계가 느껴졌다.

마치, 이 션 노바스가 얼마나 곤란한 질문을 던질지 뻔히 예상하는 것처럼.

“그렇소. 그때의 검술대회는 전 대륙의 내로라하는 무인들이 모여 경합을 벌이던 대축제였소. 그리고 그 우승자의 소원 하나를 국왕은 들어주었고.”

세자르는 확실히 곤란한 표정이었다.

‘이것 봐라.’

노바스 공작은 약간의 장난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대 역시 무엇이든 바라는 것을 받을 수 있다면 뭘 요구하겠소? 돈? 명성? 지위?”

“흠.”

“그것도 아니라면···.”

그때, 옆에 있던 귀족 하나가 장난스럽게 툭 던졌다.

“세상 제일 가는 미인?”

그 말에 좌중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고.

덕분에 시종일관 굳어 있던 분위기가 얼마간 부드러워졌다.

“저라면.”

세자르 또한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의 존안을 자주 뵐 수 있는 기회를 요청하겠습니다.”

···존안을 자주 뵐 기회라고?

션 노바스가 잠시 당황한 순간, 청년은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었다.

“이 나라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폐하가 아니십니까. 폐하가 태양이라면 그분을 보좌하는 우리 귀족들은 달이 되겠지요.”

특유의 부드러운 중저음이 청자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저 역시 태양을 도는 달처럼, 그 곁을 떨어지지 않으며 이 보잘 것 없는 재능을 펼쳐 보일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어찌 보면 지극히 아첨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재능을 펼쳐 보일 기회를 달라’는 노골적인 표현이 이 미청년의 날카로운 인상과 어우러져 도발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젊은 노바스 공작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상당히 야심찬 젊은이로군.”

“청년에게 야심이 없다면 시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노바스 공작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어째서요?”

“돈이나 명예, 지위는 재능을 펼칠 수만 있다면 언제든 얻을 수 있겠지만.”

담담히 말하던 세자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 저의 신분으로는 재능을 펼쳐 보일 기회 자체가 가장 간절하니까요.

“···.”

잠시 아무 말도 안 하던 노바스 공작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세자르의 모습을 잠시 더 눈에 담다가.

“잘 알겠소. 그럼 이만.”

노바스 공작이 그렇게 퇴장한 후에도 일부 귀족들은 여전히 홀리기라도 한 듯 세자르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또 일부 귀족들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러다 폐하 눈에 들어 ‘해로드청년회’에도 들어가는 거 아냐?”

“설마, 아무리 그래도 서자 출신을 청년회에 임명할 리는···.”

해로드청년회.

아카데미에 다니는 청년들 중 눈에 띄는 인재를 뽑아 왕궁에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하는 제도.

대외적으로는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는 목적이라 하지만, 이 청년회 소속들이 훗날 왕실 고문관으로 임명된다는 것을 모르는 왕국민은 없다.

첨언하자면,

세자르가 이 자리에서 존재감을 내보이고자 한 것은 바로 이 해로드청년회에 들어갈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으며.

‘저라면 폐하의 존안을 자주 뵐 수 있는 기회를 요청하겠습니다.’

그 말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바로 그 순간.

세자르가 이런 메시지를 띄웠음은 아무도 몰랐다.

『‘매혹의 향수’(잔여 사용횟수 4회)

- 설명 : 반경 100미터 이내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용자에 대한 호감도를 올린다.

- 비고 : 인간적 매력을 증대해주는 만큼 대상의 성별과 연령에 상관없이 작용하지만, 초면인 인물에게만 효과가 있음.』

[‘매혹의 향수’를 사용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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