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58화 (58/176)

주군을 선택할 권리

브렉은 분노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히 네 놈이 날 비웃어?’

그냥 비웃은 것도 모자라 이 멍청한 공작새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을 인지하자 브렉의 두뇌 회전이 멈춰버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도 모르게 세자르의 멱살을 잡으려던 순간.

세자르는 우아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자님.”

“그···래.”

“다음에 또 즐거운 대화를 기대하지요.”

그렇게 인사한 세자르는 브렉의 곁을 스치듯 지나가다 귓가에 속삭였다.

‘아, 다음에는 그런 꼼수 못 쓰실 겁니다.’

···꼼수를 쓰다니?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어 멍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자,

세자르는 고개를 홱 꺾으며 ‘깨꼬닥’ 하고 기절하는 시늉을 하고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씨···.”

다음 말을 간신히 삼킨 브렉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놈이 말한 ‘꼼수’라는 것이, 검술대회 마지막 시합에서 자신이 앨빈에게 ‘잠드는 힘’을 행사한 것을 가리키는 것임을.

그 사실을 곰곰이 생각하자 이내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놈 설마··· 내가 이능자인 걸 아는 건가?’

그렇다면 더더욱 세자르 놈을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얼마 전, 검술대회에서 참패하고 돌아온 자신에게 팰러스 레핀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브렉. 너는 이미 나의 신뢰를 잃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널 향한 나의 애정마저 사라지지 않도록 스스로 답을 찾아보도록.’

자신의 쓸모를 제대로 입증할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

그런 결론을 내린 브렉은 왕궁 연회라는 기회를 어떻게 이용할지 궁리한 터였고.

“롯.”

오늘을 위해 특별히 롯을 제 파트너로 데려왔다.

평소와 달리 어깨를 우아하게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롯이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네, 공자님.”

“···작전은 잘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롯이 얼른 브렉에게서 멀어지려던 순간.

“어, 공자님 이 아리따운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근처에 서 있던 사내들의 관심이 일제히 롯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이 롯의 탐스러운 검은 머리칼과 매끈해 보이는 커피우윳빛 피부에 달라붙었다.

‘이런 분위기는 불편한데.’

난생 처음 입어보는 드레스도 불편했고, 공기 중에 그대로 노출된 어깨도 신경쓰였다.

롯은 떨떠름한 얼굴로 브렉을 돌아보며 그가 자신을 ‘호위기사’라고 말해주길 기다렸으나.

다른 누군가가 선수를 쳤다.

“어, 저 피부색을 보니··· 혹시 정복전을 나가셨다가 데려왔다는 그 노예가 맞습니까?”

“아, 뭐.”

브렉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이야, 척 보기에도 대단한 미인인데요. 에스닐의 미인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햇볕에 그은 피부가 아주 곱군요.”

“어떻습니까, 공자님. 보니까···.”

롯의 심장이 불안감으로 두근거리는 가운데.

귀족 사내 하나가 브렉의 귓가에 뭔가를 속닥거렸다.

그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저 끈적한 시선만 봐도 절대 좋은 얘기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리고 브렉은···.

피식 웃기만 할 뿐, 부인하지 않았다.

‘···도련님.’

브렉이 그 부분에서만큼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오판이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치욕감에 롯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데.

“롯.”

“네··· 네?”

“뭐하고 있나.”

브렉이 눈살을 찌푸리며 정원 쪽 통로를 고개짓해 보였다.

···세자르가 정원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얼른 쫓아가지 않고.”

롯은 복잡한 마음으로 서둘러 정원으로 향했다.

* * *

에스닐 왕궁은 생각 외로 소박한 편이었다.

바닥부터 천장에 이르기까지 황금과 보석으로 때려박은 눈부신 궁전을 상상했던 것에 비해서는 아쉽다고나 할까.

‘음악은 나쁘지 않지만.’

저쪽 한구석에선 궁중 악사로 보이는 이들이 열심히 악기를 연주하는 덕분에, 연회실에는 시종일관 듣기 좋은 음악이 흘렀다.

일부는 가운데서 왈츠 같은 춤을 추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가장자리에 자리한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와 앨빈은 감동에 젖은 채 ‘내가 왕궁연회에 오다니’를 무한반복하는 리암과,

레몬주스를 홀짝거리는 카렌과 함께 있었다.

“근데 세자르 너, 인기가 엄청나던데?”

그녀의 말대로였다.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으니까.

안쪽으로 들어서는 도중에 계속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붙잡혀 대답을 해주다 보니, 카렌과 리암에게로 오는 데만도 한참 걸렸고.

‘게다가 브렉에게 잘못 잡혀 있던 앨빈까지 빼내오느라 좀 걸렸지.’

브렉을 대놓고 엿 먹인 건 개인적인 악 감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절반은 놈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자리에 올 인간이 아닌데 굳이 나타난 것부터 의심스러웠을 뿐더러.

‘왜 굳이 롯을 데려왔지?’

본인은 롯을 눈에 띄게 하지 않는다고 애를 썼지만, 롯은 이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과장 약간 보태자면, 롯과 카렌 두 명이서 지분을 절반씩 가져갔다고 해야 할까.

나는 레몬주스만 홀짝이는 카렌을 보며 되받아쳤다.

“그러는 너야말로 인기 많던데?”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주변 귀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중인 카렌이 되물었다.

오늘 그녀는 붉은 머리를 곱게 땋아 틀어올리고,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은 터였다.

“아무래도 카렌의 드레스 차림이···.”

“내 드레스 차림이 뭐?”

“아니, 아냐.”

카렌과 눈이 마주칠세라 얼른 시선을 피하는 리암.

애꿎은 헛기침을 하며 딴곳을 보는 리암의 귀 끝이 또 빨개져 있다.

···말이 중간에 새긴 했지만, 요는 그거였다.

‘브렉 놈을 자극해 롯을 데려온 이유를 알아내자.’

나는 내 일행에게 돌아온 후에도 브렉의 동태를 티 안 나게 살폈다.

브렉 또한 롯에게 뭐라 뭐라 속삭이며 이따금 나를 흘깃거리는 것을 보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은 듯했다.

‘일부러 틈을 보여볼까.’

브렉이 준비한 수가 대체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이 기회를 틈타 롯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레핀 공작과의 약속이 이행되려면, 나는 한 명의 이능자를 더 가신으로 거둬야 한다.

머릿속을 정리한 나는 일행에게 말했다.

“잠시 정원에 산책하고 오지.”

“산책?”

되묻는 카렌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혼자 생각을 정리할 거니까 따라오진 말고.”

“야, 누가 따라간대?”

발끈하며 대꾸하는 카렌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다녀올게.”

저 멀리 선 브렉의 시선이 등 뒤로 따라붙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정원을 향해 나 있는 문을 나섰다.

왕궁 한가운데에 자리한 실내 정원은 제법 고즈넉했다.

차가운 밤 공기가 뺨을 스치는 가운데, 잘 관리한 수목과 분수 따위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풍경이 근사하군.”

일부러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틈을 보인 것과는 달리.

나는 온 신경을 등 뒤에 집중한 터였다.

자박, 자박, 자박.

최대한 소리를 죽여 걸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 정도 거리라면···.’

하나, 둘, 셋-

그대로 뒤를 돌아본 순간.

“핫!”

깜짝 놀란 롯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등 뒤에 뭔가를 숨긴 기색이었다.

‘독 묻은 비수라도 숨긴 건가.’

그녀는 한순간 당황했지만 미간을 좁히며 이내 집중했고.

‘이 느낌은.’

얼마 전 검술대회장에서도 느꼈던 그 기운.

롯이 나를 상대로 ‘포박의 이능’을 썼음을 확신했지만-.

[‘무효화의 목걸이’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포박의 이능’이 무효화됩니다.]

화려한 예복 아래 숨긴 목걸이의 효능이 발휘되었다.

내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롯의 눈이 커졌다.

“어··· 어떻게!”

그녀가 당황한 새를 놓치지 않은 채, 나는 그대로 그녀의 팔을 뒤로 꺾으며 등 뒤에서 붙잡았고-

“아악! 아, 아파요···.”

다른 한 손으로는 품 속의 날붙이를 꺼내 그녀의 목에 들이대었다.

“···!”

목에서 느껴지는 금속의 차가운 금촉에 롯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곳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던 만큼 나는 목소리를 낮춰 조곤조곤 말했다.

“날 포박하려고 마음 먹은 시점에서부터 이런 건 예상했어야 하는 일 아닌가?”

“그게···.”

“뭘 숨겨온 거지?”

꺾인 팔을 한층 세게 잡자, 롯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게 넘겼다.

···비수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부드러운데?

자세히 보니 술을 담아 마시는 용도의 가죽 주머니였고.

“이 안에 뭐가 들었나?”

미간을 좁히며 묻자 롯이 힘없이 대답했다.

“돼지 피예요.”

“···?”

“브렉 도련님이 세자르 님께 망신을 줘야 한다고 하셔서···.”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팔을 놔주자.

롯은 잡힌 곳이 아팠는지 신음하며 제 팔을 주물렀다.

‘설마, 포박으로 날 꼼짝 못 하게 만든 다음 이 돼지 피를 부어주려고 했던 건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브렉의 머리가 그리 잘 돌아가는 편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어린애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에 잠긴 채, 등을 보이고 선 롯을 문득 본 순간.

“너 이거···.”

실랑이를 벌이다 드레스가 살짝 내려간 탓에, 등에 난 상처가 겉으로 드러나 있었다.

척 보기에도 채찍을 휘둘러 생긴 듯한 흔적이다.

“···.”

“등에 난 상처. 누가 그런 거야?”

롯이 화들짝 놀라더니 얼른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아니다, 누군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네.”

브렉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나는 질문을 바꿨다.

“왜 그런 건데?”

브렉 그 자식이 좀 많이 찌질하긴 해도 롯을 학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망설이던 롯은.

“···제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표정으로 실토했다.

“사람을 뒤에서 공격하는 건 싫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독 묻은 비수가 아니라 돼지 피를 가져온 건, 브렉과 롯이 합의한 결과라는 것.

‘브렉은 포박의 이능을 이용해 내게 치명상을 입히라고 했고, 롯은 그걸 거부했겠지.’

원작에서도 ‘포박의 밧줄을 부리는 자 사일롯’은 귀족도, 왕족도 아닌 일반 백성들을 위해 싸우던 몇 안 되는 정의로운 캐릭터였다.

결국은 그 정의감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결말을 맞이할 정도였으니까.

그때, 롯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고개를 들자 무척이나 괴로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표정을 보자, 지금이야말로 이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롯.”

이름을 부르자 롯이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처연해 보이는 날씬한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기왕에 네가 누군가를 섬길 거라면, 네 가치를 제대로 알아봐줄 주군을 택하는 게 좋을 거다.”

“···!”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인재이니까.”

롯은 제가 들은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커다란 눈을 껌벅거렸다.

“가족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이나 해댔던 남자 밑에서 오래 있지 말라는 얘기다.”

브렉이 처음 그녀를 회유할 때만 해도 그녀의 아버지를 인질로 삼았다.

롯의 아버지가 ‘우연한 기회’로 목숨을 잃은 후에는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약해진 그녀의 마음을 붙잡았지만···.

‘제 아래로 들어왔다는 확신이 들자 결국엔 채찍까지 들었다는 건가.’

원작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거다.

후일 ‘포박의 사일롯’은 브렉을 비롯한 귀족들을 적대시하는 반군의 수장으로 활약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서서 정원을 나서려는데.

롯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저 같은 노예 따위에게 주군을 선택할 권리가 있을까요? 아니, 주군이 아니라 주인을···.”

“롯.”

천천히 뒤돌아서자 그녀의 말간 눈이 나를 향했다.

“이 나라에 노예는 존재하지 않아. 왕국법상으로 노예는 전부 불법이다.”

물론 전쟁 노예는 예외적인 존재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서도 묵인하는 적폐나 다름없지만···.

어쨌거나 불법은 불법이기도 하며.

“그러니 너 스스로 당당해질 필요가 있어.”

무엇보다 나는,

그녀의 저 순종적인 얼굴 아래서 끓어오르는 투쟁심을 자극해야 하기 때문이다.

“···.”

롯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리려다가 발을 멈췄다.

“아, 마지막으로 질문 한 개만 해도 될까?”

“···네?”

“브렉에게 여동생이 있었나?”

“···.”

롯은 이런 질문을 던지리라고는 예상 못했는지 잠시 멍해 있다가.

“아뇨, 여동생이 있는 건 브렉 님이 아니고···.”

그러다 이내 못 할 말을 했다는 듯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유추하기엔 충분했다.

“고마워.”

롯은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나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정원을 나섰다.

그녀에게 갑작스레 그런 질문을 던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왕도의 대가>에서 팰러스를 배신한 이능자에 관해 언급되는 것은 단 세 가지.

첫째. 배신자는 우만, 타릭, 브렉 세 명 중 하나다.

둘째. 배신자는 팰러스가 왕위를 차지한 후에 그의 침소로 들어가 암살하려 했다.

셋째. 배신자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이 있다, 가 아니라 있었다, 라는 과거형으로 나오는 걸 보면 지금은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롯의 말로는 여동생이 있는 건 브렉이 아니라고 했으니.’

다른 두 명 중 하나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건데, 타릭은 아니다.

3대 독자로 태어나 지나칠 정도의 기대를 받고 컸다는 내용이 원작에 주구장창 등장했으니까.

‘남은 것은 우만뿐인데, 그럼 모든 것이 들어맞잖아?’

애초 우만은 팰러스가 세 명 중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팰러스의 침소로 들어가 그의 목숨을 노릴 수 있는 인물은···.

‘벽을 넘는 자라는 이능을 지닌 우만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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