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일언중천금
친밀도를 올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책벌레인 앨빈에게 이 이상 딱 맞는 능력이 없을 거다.
게다가 공작저에는 몇 백 년 전부터 관리해온 서재가 있다.
말이 서재이지, 작은 도서관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총관에게 열쇠를 달라고 해봐야겠군.’
그리고 또 필요한 것이···.
나는 제이콥을 돌아보며 부탁했다.
“제이콥, 혹시 내 가신들이 수련실로 쓸 만한 공간 좀 마련해줄 수 있을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내 요청에 제이콥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흉악하게 웃었다.
* * *
몇 시간 후, 제이콥은 나와 앨빈을 수련실로 안내해주었다.
“이곳을 쓰시면 됩니다. 그리고 도련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총관님이 이걸 전해드리라고···.”
제이콥은 서재 열쇠까지 건넨 뒤 수련실 밖으로 물러났다.
나는 앨빈에게 <영혼의 서>를 건네며 말했다.
“전에 봤던 것 기억나지? 네 잠재력을 열 배는 늘려줄 물건이다.”
그 말에 앨빈이 기대감으로 두 눈을 빛냈다.
“지금부터 할 필요는 없고, 훈련할 필요가 있으면 여기서 하라고-”
“아니, 지금부터 당장 하겠습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어제 발닉 경이 훈련하시는 것 보며 저도 자극을 받았거든요. 사실은 얼른 시작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습니다.”
···소년만화도 아니고 다들 왜 이렇게 열정이 넘치는 거지.
어쨌거나 본인이 열심히 하고 싶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다.
<영혼의 서>를 주르륵 훑어본 앨빈은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세자르 님이 주신 이 책, 대단한데요. 여기 적힌 대로 차근차근 해보면 이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힐 것 같아요.”
신이 난 기색으로 조잘조잘거리는 앨빈에게 나는 말 없이 열쇠를 건넸다.
“레핀 가문의 서재 열쇠다. 내 가신들이 서재에 들락거리겠다고 총관에게 말해놨으니 걱정 말고 쓰도록.”
귀족 가문의 서재란 본디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는, 오로지 가문 구성원에게만 허용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공작이 따로 지침을 내려둔 것인지 총관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이 열쇠를 내어준 상황.
“와···.”
앨빈 같은 책벌레에게는 기대 이상의 선물일 거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드는 앨빈에게 덧붙여 말했다.
“딱 1달 주마.”
여기 머무는 동안 책이나 읽으라고 주는 건 아니고, 다 목적이 있어서 주는 거였으니까.
“미접신 영혼 목록에 나온 후보들. ···한 달 뒤 방학이 끝났을 때 그 후보들의 친밀도가 50을 넘어설 수 있게 서재를 탈탈 털어대라는 얘기다. 알겠지?”
그 한 달 뒤면,
앨빈은 그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는 재목이 될 터다.
‘그야말로 전천후의 인재가 되겠지.’
그런 내 속내는 꿈에도 모른 채 앨빈이 활짝 웃었다.
“네, 걱정마세요! 체력 단련도 열심히 하고, 이능 수련도 꾸준히 할게요.”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말고도 준비할 게 있긴 한데.”
“준비할 거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앨빈.
“연회용 예복 있어?”
“예복은 왜.”
“1주 뒤에 있을 왕궁연회, 참석 안 할 거야?”
국왕에게 내 존재감을 알릴 절호의 기회가,
곧 찾아올 테니까 말이다.
* * *
해로드 왕가가 오랜 시간을 통치해온 나라 에스닐.
그 수도에 자리한 왕궁은 에스닐 왕국의 국력에 비해서는 소박하기 그지없었으며, 왕궁 연회가 열리는 연회실도 마찬가지였다.
‘무인들의 시대’를 이끌었던 영웅 중 한 명이기도 했던 선왕 유스톤 3세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박한 실내 장식에서 강직하고 기개 넘치던 선왕의 성품이 느껴진다 할 것이다.
그러나 브렉 헬리오스는 아니었다.
‘이제 해로드 왕조의 시대는 끝났다.’
오늘날의 왕실은 풍전등화였다.
아홉 살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총명하다고 하나, 지병 때문에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는 소년 국왕.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모후 안느가 섭정을 맡고, 그 오빠인 젊은 노바스 공작이 그녀를 힘겹게 보좌하고 있으니.
‘일부 겁없는 이들은 해로드 왕가의 종말이니, 왕가에 저주가 내렸으니 떠들어댈 정도이지.’
더 나아가 헬리오스 백작가의 장남 브렉 헬리오스는 이렇게 확신했다.
···팰러스 레핀이야말로 진정한 왕이 될 자이며, 헬리오스 가문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그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어찌 보면 그런 연유에서였다.
‘평소라면 이런 허름한 연회 따위는 참석도 안 했겠지만···.’
팰러스의 배다른 동생 세자르.
그 빌어먹을 자식에게 쓴맛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다짐하며 브렉이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브렉 공자님!”
“공자님, 간만에 뵙습니다!”
“격조했습니다.”
자신의 인기와 영향력을 실감하는 것은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이 아닌가.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이들의 수다가 이어지던 가운데, 누군가가 폭탄 같은 화제를 던졌다.
“아, 혹시 봤습니까? 레핀 가문의 세자르 군이 왔던데.”
“그것도 어마어마한 미인과 함께 있던데?”
“페킹튼 가의 차남도 같이 있더군요.”
“···이 자리가 어디라고 감히 서자 따위가!”
“그거야 그렇지만, 듣기로는 이번 검술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던데요?”
세자르를 화제 삼아 떠드는 것은 이들뿐이 아니었다.
“검술대회에서 우승을···.”
“결투를 신청해온 검술 교관을 몇 마디 말로 이겨···.”
“레핀 공작은 어째서 서자를 아카데미에···.”
“가문의 수치, 사생아를···.”
오른쪽, 왼쪽, 앞, 뒤.
사방에서 세자르의 이름이 들려오고 나서야 브렉은 깨달았다.
사실상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의 관심이 ‘레핀 가문의 세자르’에게 쏠려 있으며.
이 이질적인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시기, 질투, 멸시 따위가 한데 섞여 묘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세자르 군은 어디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인재이긴 하지요.”
브렉은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아, 브렉 공자님이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시니 잘 아시겠군요.”
“검술대회에서 활약하던 것도 보셨습니까?”
그놈의 빌어먹을 검술대회.
내심 부아가 치밀어올랐지만, 그는 짐짓 관대한 선배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 실력이 상당하더군요.”
“브렉 공자님이 그리 말씀하실 정도라면-”
“누구의 호위를 맡든 훌륭하게 제 일을 소화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애초 검술대회란 평민들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한 기회의 장이 아닙니까.”
그 한 마디로, 브렉은 세자르의 검술을 한낱 ‘호위기사’가 되기 위한 소질로 치부해버렸다.
그건 그렇다며 누군가 맞장구치자, 한술 더 떴다.
“우리처럼 신의 가호를 받고 태어난 이들은 못 가진 자들을 위해 한 걸음 물러서줘야 하는 법이지요.”
“하긴 노바스를 비롯해 전통 있는 가문들은 참가하지 않는다고 듣긴 했습니다.”
분위기가 살짝 변했다.
방금 전만 해도 세자르에게 온통 쏠려 있던 대화 주제가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옮겨갔으며.
“역시 브렉 공자님이십니다.”
“혜안이 깊으신 줄은 알았지만···.”
앞다투어 브렉의 관대함을 칭송하기까지 했으니.
이 ‘진지한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 있던 어린 영애들의 선망 어린 눈빛이 브렉에게로 향했다.
‘암, 이래야지.’
검술대회에선 평정을 잃은 탓에 본래의 폭력성이 드러나고 말았지만, 브렉은 어디서나 ‘완벽한 귀공자’로 통했으니 말이다.
그때, 구석에 혼자 서 있는 키 큰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낯이 익은데···.’
오늘 따라 근사하게 차려입어 첫눈에 못 알아봤지만, 저 안경과 순한 인상의 얼굴을 보니 그 자식이 맞다.
‘앨빈 밀!’
보기만 해도 이가 갈리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브렉은 앨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 여기 대단한 활약을 한 친구가 있군. ···자네가 앨빈 맞지?”
“아, 그게 저는···.”
앨빈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브렉과 수다를 떨던 무리가 몰려와 소년을 감쌌다.
“오, 브렉 공자님이 아시는 분입니까?”
“아카데미의 학우일세.”
“오, 그렇다면-”
“게다가 대단한 희소 가치를 지닌 친구이기도 하지.”
희소가치, 라는 말에 주변인들이 호기심을 내보이자.
브렉이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평민으로는 이 친구가 유일할 테니 말일세.”
호기심은 이내 비웃음으로 변했다.
귀족들이 조소 어린 시선으로 앨빈을 주시하는 것을 지켜보며 브렉이 말을 이었다.
“대단하지 않나, 아무런 배경도, 전통도 없는 자가··· 그 치열한 경쟁을 물리치고 오로지 본인의 능력만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왔다는 게.”
“···.”
“자네도 장학금을 받고 다니는 것 맞나?”
브렉의 말을 받은 것은 앨빈이 아니라 주변 귀족들이었다.
“허어, 요즘은 그런 제도까지 있는 건가요.”
“왕실의 국고가 그런 곳으로 흘러나가니 군비가 부족한 것 아닙니까.”
“요즘 평민들이 얼마나 기세등등해졌는지 모르시는 것 같군요. 그네들은 이제 자신의 계급을 대변할 의원을 뽑아 왕실 의회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답니다.”
“하, 말세이지 말세야.”
그 모든 말의 홍수 속에서 앨빈은 어찌할 바 모른 채 새빨개진 얼굴을 숙였다.
사람들의 관심이 그에게서 멀어졌을 때, 브렉은 앨빈에게 몸을 붙여 귓가에 속삭였다.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네놈이 뭐라도 된 줄 아나?’
‘···!’
‘아무리 그래봤자 네 놈의 몸에 흐르는 피는 변하지 않는 법이다.’
조소하듯 내뱉은 말에 앨빈의 눈이 커진 순간.
날카롭고 귀족적인 인상의 미청년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짚었다.
“앨빈, 여기 있었네.”
···다름 아닌 레핀 가문의 세자르였으니.
화제의 주인공이 등장하자 주변을 둘러싼 이들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말로만 듣던 세자르 님이시군요!”
“아카데미에서 눈부시게 활약 중이시라고 익히 들었···.”
“세자르 님, 저는 킹스턴 가문의 삼남인···.”
“이쪽은 제 여동생으로, 얼마 전에 도로테아 숙녀학교를 훌륭한 성적으로···.”
다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당황한 브렉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들은 가십이 떠올랐다.
‘레핀 공작이 서자를 굳이 아카데미에 편입시킨 이유가 있지 않겠냐.’
혹시라도 세자르를 적자로 인정하려는 것 아니냐고 지레 짐작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빌어먹을.’
벌써부터 새로운 줄을 만들려는 건가 싶어 브렉이 속으로 이를 가는 순간,
세자르가 말을 걸었다.
“앨빈 이 친구의 실력이라면 저보다 브렉 공자님이 잘 아실 겁니다.”
“···무슨?”
대화의 흐름을 놓치고 있던 브렉이 되묻자,
세자르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 앨빈과 마지막 시합에서 맞붙으셨잖습니까.”
“···!”
“오오, 두 분이서 붙으셨단 말입니까!”
“브렉 공자님이 검술대회에 나가셨다니, 그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공자님의 검술은 신기에 가깝다 들었는데 못 봐서 아쉽군요.”
검술대회를 관람하는 것은 아카데미 학생들과 그 주변에 사는 평민들뿐,
귀족사회에서는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이벤트였다.
그 덕에 브렉 또한 검술대회에 참가했음은 다들 모르고 있던 터였는데···.
“브렉 공자님의 실력은 여기 계신 분이라면 누구나 아시겠지만···.”
세자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일까요, 설마 앨빈이 그런 공자님을 이길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앨빈이··· 브렉 공자를 이겼다고?
그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하던 귀족들은, 이내 질문을 쏟아냈다.
“저 친구가··· 브렉 공자님을 이겼다는 말입니까?”
“정말로요?”
브렉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을 열면 자신을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 그의 속을 더욱 뒤집어놓으려는 듯 세자르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브렉 공자님. 진정한 장부란 모름지기 언행일치를 몸소 실천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주변 귀족들을 죽 둘러보더니, 브렉의 목소리와 말투를 흉내 내며 말을 이었다.
“우리처럼 신의 가호를 받고 태어난 이들은 못 가진 자들을 위해 한 걸음 물러서줘야 하는 법이지요!”
“···!”
이에 좌중에서 풋, 하고 숨 죽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마 그것을 몸소 선보이시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평민인 앨빈에게···.”
브렉은 새빨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지만, 세자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일부러 져주실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 말입니다.”
위트 있지만 뼈가 있는 말에 절반은 웃음을 터뜨렸고, 절반은 세자르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주시했으며.
브렉은···.
‘이 씨벌 새끼!’
-라고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려는 쌍욕을 간신히 삼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