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대체 무슨 훈련인데?
세자르가 도착한다는 소식에 공작저는 새벽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세자르의 유일무이한 측근이나 다름없던 제이콥은 유난히 성화였다.
‘간만에 돌아오시는 거니 확실히 준비해놔야 한다!’
세자르 도련님이 원래 쓰시던, 복도 끝에 자리해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오던 낡아빠진 방 대신-
제일 귀한 손님을 위한 객실을 골라 그 안의 가구와 집기를 전부 새것으로 바꾸었다.
세자르 도련님이 아카데미로 간 이후 들려온 그의 활약에 공작저 사용인들 대부분이 감명받았지만,
제이콥에게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도련님의 그 말씀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이곳에 발 붙이고 있지 못했겠지.’
아카데미로 출발하기 전, 세자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이콥, 네 노선을 분명히 해라. 집사장인지 총관인지. ···어느 쪽 배가 기울어지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얘기다.’
제이콥은 총관의 사람이 되기를 택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했고, 덕분에 그 사달이 났을 때 파란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자르가 도착했고.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도련님은 예상 외의 인물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쪽은 내 가신, 앨빈.”
“바, 반갑습니다··· 신세를 지게 되어 영광···.”
“디터는 알 테고, 이쪽은···.”
공작가의 사병이었던 자신의 호위에게 ‘발닉’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줬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인물은 다름 아닌 두 살짜리 아기였다.
“얘는 농농이라고 부르면 돼.”
[앙! 앙앙!]
“···?”
“발닉이 용병 시절 어느 마을에서 만든 아이다. 이제야 아빠를 만난 셈이니 다들 친절히 대해주도록.”
발닉은 뭔가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제이콥은 그 설명만 들어도 가엾은 아이구나 싶어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농농 님, 이리 오시지요.”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안겨오는 농농이가 -그 완고하다는 총관을 비롯해- 모든 사용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
어쨌거나 제이콥을 비롯한 공작가 사용인들은 열과 성을 다해 세자르 일행을 대접했다.
“도련님, 목욕 물이 뜨겁진 않으신지요.”
“향유를 대령해놓았으니 써보시지요.”
“도련님, 침대보를 갈아드리겠습니다.”
“짐은 침실에 정리해두었습니다.”
조리장 벤이 온 실력을 발휘해 준비한,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식사도 훌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이 그냥 점심 식사이지 사교모임에서나 선보일 법한 정찬에 가까웠다.
···몇 달 전만 해도 이 공작가의 천덕꾸러기이자 골칫덩이였던 '세자르 도련님'이,
금의환향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터였다.
그렇게 세자르의 귀가 첫날은 기분 좋게 흘러갔고 다음 날 아침.
제이콥은 총관의 기별을 받고 세자르가 있다는 사냥터로 향했다. 발걸음을 빨리하자 저 멀리 서 있는 세자르가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 봐도 우리 도련님은 근사하군, 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부르려던 순간.
“발닉!”
세자르가 하늘 위를 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발닉이라면 도련님을 모시는 호위기사의 이름이 아니었던가?’
긴가민가하며 도련님의 시선을 쫓자, 머리 위쪽에서 무언가가 휘익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사냥터에서 관리하는 공작저 전서구다.
‘하지만···.’
발닉 경은 도련님 발치에, 풀밭 위에 덩그러니 누워 있다. 두 눈을 감고 있는 것 보니 설마 저 자세로 잠이라도 든 건가 싶은데.
세자르의 말이 이어졌다.
“발닉, 동그랗게 돌아봐.”
제이콥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하늘을 날던 새하얀 비둘기가 원을 그리며 날았다.
“···?”
설마 도련님이 벌써 저 새를 길들이신 건가?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는데, 세자르의 명령이 이어졌다.
“발닉, 이번엔 하트 모양으로.”
아까만 해도 곧바로 명령에 따르던 비둘기가, 이번엔 어째선지 허공에서 날개만 펄럭인다.
“하. 트. 모. 양.”
단호하게 되풀이하자 그제야 비둘기가 전진하기 시작했고, 방금만 해도 원을 그리던 새는···.
‘···진짜로 하트 모양으로 난다고?’
공중에서 하트 모양을 그리며 커다랗게 날았다.
“···?”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비둘기가 저렇게 나는 법도 있나 싶어 제이콥이 멍하니 서 있는데, 뒤늦게 세자르와 눈이 마주쳤다.
“제이콥?”
“아, 다름이 아니고··· 총관님이 도련님을 찾으십니다.”
그렇게 짤막한 용건을 전한 뒤.
비둘기가 공중에서 하트를 그리던데요···? 라고 차마 물을 수는 없어 제이콥이 말을 흐리자.
세자르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 발닉이 훈련 중이라.”
“훈련···이요? 대체 어떤,”
“비둘기가 공중에서 하트 무늬를 그리게 하는 훈련이랄까.”
발닉··· 역시 저 비둘기가 발닉이었던가.
“저 전서구한테 발닉이란 이름을 붙이신 겁니까?”
제이콥이 진지하게 자신의 가설을 입 밖에 낸 순간, 세자르는 ‘아’ 하더니.
이윽고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제이콥은 도련님의 속을 여전히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 * *
우리는 드워프의 도시를 나오자마자 기숙사로 돌아가 농농이만 데리고 다시 출발했는데, 농농이가 중간에 순간이동을 해준 덕에 이동 시간을 상당히 단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자마자 황제 같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일까. 겨우 하루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여독이 다 풀린 느낌이다.
발닉은 그 와중에 당장 이능 훈련을 시작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니.
‘야생에서 자란 저는 여독 같은 거 모르는 거, 아시잖습니까.’
전에는 시키는 일만 딱딱 하던 사람이 개화환을 먹은 후로는 조금 달라졌다.
시키지 않은 것까지 찾아서 하는 것은 물론이요. 보는 사람이 걱정이 될 정도로 열의에 가득 차는 것이 아닌가.
‘공작저에서 관리하는 전서구 정도면 첫 상대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열정적으로 훈련에 매진한 발닉은 꽤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심지어 아까는 비둘기를 하트 모양으로 날게 하지 않았던가.
그 광경을 본 제이콥이 얼마나 얼빠진 얼굴을 하던지.
‘곧 공작각하께서 부르실 거라 하니, 방으로 돌아가 계시지요.’
그 말에 방으로 돌아온 나는 막간을 이용해 발닉의 호감도창을 재확인했다.
『가신 ‘발닉’(충성도 75점)
- 이능자 ‘동물을 지배하는 자’ (숙련도 lv. 1)
- 설명 : 동물의 육체에 빙의하여 그 정신을 지배한다. 정신 지배에 성공하면, 해당 동물의 몸에 들어가 그 육체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
- 지속시간 : 30초
- 쿨타임 : 24시간
- 성공조건 :
1. 대상 동물과의 친밀도가 높을수록 성공 확률이 높다.
2. 대상 동물의 지능이 낮을수록 성공 확률이 높다.
3. 한 번 성공한 대상 동물에게는 언제든 빙의할 수 있다.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지속시간은 증가하고 쿨타임은 감소합니다.)』
동물의 몸에 빙의해 그 정신을 차지하고 육체를 조종한다니, 아무리 봐도 사기적인 능력이 맞다.
일견 강력하지 않아 보일지 모르겠으나,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능력이니 말이다.
‘곤충 따위를 문 틈으로 들여보내 밀담을 엿듣는다든가, 맹수에게 빙의해 상대를 공격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지.’
온갖 이능자가 등장했던 원작 <왕도의 대가>에서도 이런 능력은 등장하지 않았다. 역시 발닉이 자연적으로 이능을 발현시킨 경우가 아니라서 그런가 싶은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자르 도련님, 총관 카얀입니다.”
“들어와요.”
말로만 듣던 총관은 아주 깐깐해 보이는 60대 노인이었다. 과거 무예를 어느 정도 익혔는지 체구가 크고 건장했으며, 두 눈은 날카로운 안광을 내뿜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이제는 제법 청년다운 태가 나시는 것이 몇 달 사이에 늠름해지셨군요.”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쪽은 초면인 것과 달리, 전에 세자르를 본 적이 있나 보다.
카얀은 몇 마디 더 덧붙이고는 본격적인 용건을 전했다.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네.”
···공작이 날 부를 줄은 몰랐는데.
‘여간해서는 찾는 일이 없던 양반이 왜 이러나.’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껌벅거리자 총관의 주름진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 * *
벽 한가운데에 걸린 검과 방패 장식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검소한 집무실.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에 봤던 것과 변함이 없는 풍경 한가운데에 공작은 앉아 있었다.
어제 아침, 세자르가 돌아왔다는 것을 시작으로 온갖 소식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혼자 오신 게 아니라 일행을 데리고 오셨어요!’
‘도련님 풍채가 아주 근사해지신 게··· 몇 달 전과 아예 다른 사람 같습니다.’
‘다들 어디서 싸움이라도 한바탕 하고 온 모양새이던데요.’
‘···아기도 데려오셨던데요?’
아기라니, 무슨 아기?
궁금증을 못 이긴 공작은 남 몰래 세자르 일행의 식사 장면을 훔쳐보고 온 터였다.
“···?”
세자르가 그 몇 달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건 잘 알았다.
소년의 행적을 보고받을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뿌듯함이 들곤 했고. 가끔은 소년의 그런 맹랑한 모습에서 지난날의 ‘그녀’를 겹쳐보기도 했지만···.
지금 그의 시선은 책상 위에 펼쳐진 세자르의 편지에 가 있었다.
자신이 비소에 만성 중독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게다가 그 아기는···.’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세자르입니다, 각하.”
들어오라는 말에 안으로 들어선 세자르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앙상하고 병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키도 훌쩍 큰 데다 무엇보다 체격이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고, 얼굴에 살이 제법 올랐으며 두 눈에는 날카로운 총기마저 깃들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못 알아봤겠군.’
공작이 맞은편 자리를 권하자, 세자르는 여유로운 기색으로 앉아서 입을 열었다.
“각하, 격조했습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공작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일전의 편지로도 적어보냈지만,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걱정해준 덕분에 괜찮다.”
비소가 나올 줄은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냐.
그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공작은 평정을 가장했다.
예의상의 안부말이 잠시 오간 뒤 그는 본격적인 화제를 입에 올렸다.
“네가 어린 아기를 데려왔다고 들었는데.”
“···아, 벌써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세자르는 공작이 대뜸 이 얘기를 꺼낼 줄은 예상 못 한 눈치였다.
“두어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똘똘하고 귀엽더군요. 발닉이 전에 용병 생활할 때 스쳐지나가듯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인데, 이번에 우연히-”
“그 아이,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경지를 넘어선 무인답게 육감이 극도로 발달한 공작은 확신할 수 있었다.
사용인들 사이에서 방긋거리며 아기 행세를 하는 저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뭔가 다른 것에 가깝다는 것을.
“···.”
세자르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당황하는 것은 잠시뿐 다시 여유롭게 받아치는 것이 아닌가.
“하긴 각하께서도 인간 외의 지적 존재들을 만나보셨겠군요.”
“···.”
“불세출의 영웅으로 불리던 젊은 시절에는 ‘4인의 기사’와 함께 고대 던전을 찾으러 모험을 떠나시기도 했으니.”
소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공작은 무언가 의아함을 느꼈다.
각하께서, 가 아니라 각하께서도, 라면···.
‘자신 역시 그런 존재를 만나봤다는 건가!’
공작은 목소리의 떨림을 억누르며 말했다.
“세자르, 그렇다는 건 너 역시-”
“각하께 이걸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세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단에 감싸서 들고 온 것을 천천히 풀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건 설마.’
새 모양의 금속 장식이 달린 화려한 투구.
청동 칼자루가 달렸으며 넓적한 검날에 화려한 물결 무늬가 새겨진 주철검.
지금의 해로드 왕조가 왕국을 통치하기 전, 이 대륙의 패권을 나눠 쥐었다는 ‘7부족 시대’의 물건이 아닌가.
“각하, 이것들은···.”
공작이 제 눈을 믿을 수 없어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 세자르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다름 아닌 ‘드워프의 도시’에서 갖고 온 것들입니다.”
“···!”
“말하자면 일종의 고대 유물인 셈인데-”
“세자르.”
공작은 목소리에 실린 조바심을 억제하며 말했다.
“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내가 아는 세자르가 아닌 것-”
“애초에 절 아시긴 하셨습니까?”
공작은 순간 흠칫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세자르에게서 원망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지내며 무수히 많은 일을 겪을 동안, 저는 각하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
“하지만 그마저도 제게는 행운이었습니다. 각하가 아니었다면 과거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제게 베풀어준 은혜에 다시금 감사한다는 세자르를 보며 공작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게 대체 무슨 변화가 생겼길래···.”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레 달라진 소년.
성격이 바뀜은 물론이고,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사실까지 알아내버리는···.
“설마.”
공작과 눈이 마주친 순간, 세자르가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제게 미래를 보는 힘이 생겼다면 믿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