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54화 (54/176)

누군가를 이능자로 만드는 법

처음만 해도 앨빈은 이능을 쓸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능을 쓰는 방법을 몰랐다.

일종의 고대 신전처럼 보이던 황량한 풍경은 어느새 검술 경기장처럼 변모한 가운데.

그는 자신과 마주 선 사내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다크엘프.’

신화 속에나 있을 법한 존재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도 모자라 그와 검을 맞댈 기회를 갖게 되다니.

앨빈은 흥분을 주체 못 하며 허리에 찬 검을 빼들었다.

지난번 검술대회 이후로 우애단 단원들과 검술 대련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크읏!”

[이런 애송이를 내보내다니, 아쉬운걸.]

챙, 챙강!

다크엘프의 검을 간신히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순식간에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검을 받아쳐낼 때마다 그 충격에 손목이 찌르르 울렸다.

‘물론 이 정도도 과거와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지만···.’

아무리 발전했다 해도 승부에서 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앨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간만의 승부라 기대했는데.]

게다가 문제는, 지금 저 엘프 사내가 자신을 봐주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잖은 게임 같은 건 하지 말고 그냥 검으로만 싸웠으면 좋았을 것을···.]

엘프 사내의 혼잣말에 싸움을 지켜보던 여자 엘프가 앙칼지게 외쳤다.

[하, 지금 장난해? 검 바위 종이 게임을 제안한 건 오라버니잖아!]

그 옆에서 서 있던 발닉이 그녀를 흘긋 보며 한마디했다.

“성격이 불 같군요.”

“···다크엘프니까.”

경기장에 선 두 사람에게서 눈을 못 떼던 세자르가 여상하게 대꾸했다.

어쩜 저리 태평하실까.

발닉은 한숨을 쉬며 조심스레 물었다.

“도련님은 걱정 안 되십니까?”

“뭐가.”

그는 대답 대신 경기장 한가운데 선 앨빈을 눈짓으로 가리켰지만, 세자르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저 엘프 사내는 상당한 강자입니다.”

저나 도련님이 나서도 이기기 쉽지 않은 상대일 텐데···.

발닉은 지금 저렇게 앨빈이 상대의 검을 막아내는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자르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기다려 봐.”

“하지만-”

“절대 지는 일은 없을 테니.”

그의 ‘도련님’은 확신을 갖고서 그렇게 장담했으나···.

‘도련님,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겁니까.’

막상 앨빈은 점점 더 밀리고 있었다.

허억, 허억.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물러서다 보니 어느새 경기장 가장자리에 이르렀고.

그런 그를 향해 상대 엘프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어쩌지. 거기서 뒤로 더 나가면 경기장 이탈인데. ···순진한 어린애를 데리고 노는 건 이 정도로 하고, 이젠 제대로 끝을 내야겠군.]

그러더니 고쳐쥔 검 끝을 앨빈에게 향했다.

다크엘프가 전광석화처럼 달려든 순간!

‘질 수··· 없어.’

앨빈이 전신에 엄습하는 절망감과 싸우며 의지를 다진 순간.

‘그래, 질 수는 없지.’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며 온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어라?’

이윽고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

아까와 딱히 달라진 것은 없는데도, 더는 자신이 육체의 주인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몸을 내주고서 그 광경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바라보는 이 해괴한 기분이란···.

[잠깐, 이건 대체.]

그 찰나의 변화를 곧바로 알아차렸는지 다크엘프가 당황한 순간을,

앨빈 아니 ‘앨빈의 몸을 차지한 누군가’는 놓치지 않았다.

“와라.”

[너, 아까 그놈이 아니구나!]

심지어 그 말에 여유롭게 웃으며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수다는 그 정도면 충분하니···.”

두 다리 간의 보폭은 최대한 넓게 잡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며,

한 세기 전의 검사처럼 한 팔을 허공에서 둥글게 말고 서 있는 ‘진짜 검객’이 말했다.

“이제는 검의 대화를 나눠봄이 어떠한가.”

* * *

흑의 기사, 에드먼드 경이 본격적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방금 전만 해도 소란스럽던 좌중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진정한 검객이란 저런 건가.’

발닉과 디터는 물론이고 두 명의 엘프 또한 그들의 대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챙, 챙강, 챙강!

‘흑의 기사’와 다크엘프 사내가 맞붙을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때렸다.

다만 아까 전과 다른 양상이라면,

앨빈이 엘프 사내의 검을 막아내기만 하던 방금과는 달리-.

[이런 검은··· 난생 처음이다!]

챙캉! 캉, 챙캉!

지금은 다크엘프 쪽이 상대의 검을 막아내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으니까.

[내 일생에 이런 검을 쓰는 자를 만날 수 있다니···.]

물론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엘프 사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게는 무한한 영광이다! 위대한 검객이여, 그대의 존함을 내게 알려주지 않겠나? 내 그대와 나눴던 검의 기억을 오랫동안 잊지 않으리···.]

“···그대는 입으로 승부하는가 보지? 나 또한 봐주는 건 이 정도 하고.”

피식, 하며 웃던 앨빈 아니 ‘흑의 기사’는 검을 고쳐쥐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제는 마무리를 봐야겠군.”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의 이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최고 30초이며 이제 몇 초 남지 않았다는 걸.

그 사실에 마른 침을 삼키며 눈앞의 광경에 다시 집중한 순간.

흑의 기사가 검의 속도를 높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다!’

쌔애애액!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은빛 궤적이 허공을 쏜살같이 갈랐다!

[···!]

다크엘프가 경악의 신음조차 내지 못한 사이, 상대의 검은 어느새 그의 검을 쳐냈고-

챙강!

그가 제 손아귀에서 날아간 검을 허망하게 쳐다보는 순간, 앨빈의 검이 다크엘프의 목 끝에 닿았다.

엘프의 눈이 커졌다.

“엘프 검객이여. 그대의 패배를 인정하라.”

한편.

그 광경을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지켜보던 발닉과 디터 또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특히나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의 발닉을 돌아보며 나는 씩 웃어 보였다.

“거봐. 지는 일은 없을 거라 했지?”

“도련님은 어떻게···.”

“미래를 본다니까, 날 아직도 못 믿겠어?”

“···!”

그리고 그대로 다크엘프가 자신의 패배를 시인한 순간.

예의 그 푸른 빛이 나타나 기쁜 소식을 알렸다.

『세 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도전에 성공한 도전자들은 ‘정산소’로 이동합니다.』

* *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으···.”

관자놀이를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뜨자, 아까 그 절벽 아래로 되돌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탁 트인 곳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재가루뿐인 회색의 풍경.

“···아으,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머리가···.”

“으윽, 세자르 님.”

발닉과 디터, 앨빈도 이내 하나둘씩 깨어나 두통을 호소했다.

나는 두 눈을 껌벅거리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고.

“그러니까··· 아까 우리가 보상으로 받은 게.”

내 눈앞에 있는 자그마한 자루 네 개와 나무함이다, 이 말이지.

어디 자루부터 열어볼까.

“오오오.”

주먹만 한 자루 속에 가득한 금덩어리와 온갖 보석을 본 일행의 눈이 튀어 나올 듯 커졌다.

그리고 나무함은 아까 드워프의 도시에서 봤던 건데···.

끼고 있던 사파이어 반지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는 터, 나무함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대자-

끼익 하며 저절로 함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든 것은.

“이건···.”

단순한 막대 형태의 금속 장식이 달린 금 목걸이였다. 언뜻 보기엔 싸구려 모조품 같았지만···.

‘엄청난걸.’

아이템의 정보가 눈앞에 뜬 순간, 감탄하고 말았다.

『‘무효화의 목걸이’(가격 : ????)

- 설명 :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타 이능자의 ‘이능’을 무엇이든 무효화할 수 있다.

- 비고 : 가장 위대한 드워프 장인이 만든 ‘다섯 종족 목걸이’ 시리즈 중 하나. 통칭 ‘다크엘프 목걸이’라고 불린다.』

다른 이능자의 이능을 무효화할 수 있다니 말 그대로 ‘전설급’에 가까운 아이템이다.

게다가 팰러스 역시 이능자가 아닌가.

정확히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그와 대면하며 받은 인상으로는 일종의 정신계 능력인 것 같았다.

‘그런 능력이라면 더더욱 이 목걸이가 제 효과를 발휘할 터.’

기대감 때문인지 심장이 아플 정도로 세차게 뛴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목걸이를 집어드는데, 그 아래서 동그란 진주알 같은 것이 또르륵 하고 떨어졌다.

이건 또 뭐지 싶어 알을 집어든 순간.

『‘개화환開花丸’(가격 : ????)

- 설명 : 이능을 인위적으로 각성시키는 환약. 물 없이 씹어서 복용하되, 역한 냄새 때문에 토기가 올라올 수 있으니 주의 요.

- 비고 : 재능이 전혀 없는 사람을 각성시킬 수는 없으며, 발현 가능성이 있는 사람만 각성시킬 수 있다. 발현 가능성 여부는 ‘이능자 테스트 사면체’로 확인 가능하다.』

···이것도 대박인걸.

발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더라, 라고 생각에 잠긴 순간.

발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그것들은 어떤 물건입니까?”

고개를 들자 발닉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발닉이 예전에 2가 나왔었지.’

한때 2와 3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던 적이 있었다. 3이 나왔던 유일한 사람인 앨빈은 우연한 계기로 이능을 각성한 반면, 2가 나왔던 발닉은 딱히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은 걸 보면···.

‘3은 자연적으로 곧 각성하게 될 미발현자, 2는 자연적인 각성은 어렵지만 인위적 수단을 통해 각성시킬 수 있는 미발현자가 아닐까.’

한두 개 사례를 가지고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나는 나머지 일행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이건 천천히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은 정산부터 해볼까?”

그 말에 눈을 빛내는 발닉과는 달리, 앨빈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세자르 님. 저는 괜찮습니다. 애초 이곳을 찾아낸 것도 다 세자르 님 덕분이고···.”

소년은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이런 꿈 같은 경험을 할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할 따름인걸요.”

“맞습니다, 주군. 가신으로서 주군을 위해 싸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정산 같은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디터까지 맞장구를 쳤다.

그에 급격히 어두워지는 발닉의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정 의견이 그렇다면···.”

미소 띤 얼굴로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산이 아니라, 주군으로서 마땅한 상을 내려야겠군.”

“···!”

이런 전근대적인 사고야 언제든 환영이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날먹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발닉처럼 유능한 용병의 충성심을 고취하는 데는 ‘적절한 보상’만큼 좋은 게 없으니 말이지.

“다들 이거 하나씩 받고.”

나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는 세 사람에게 보석 주머니를 하나씩 쥐여줬다.

발닉은 흐흐거리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반면, 디터는 겸연쩍은 얼굴이었으며 특히 앨빈은···.

“···.”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소년의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저거 하나면 못해도 저택 한 채씩은 사지 않을까.’

일반인의 관점으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겠지만, 지금의 내게는 큰 의미가 없는 돈이다.

곧 발견될 필로스 금광 때문에도 그렇지만, 공작저에 도착하는 대로 이 유물들을 본격적으로 발굴 및 보존하라고 지시할 거니까.

‘거기서 창출될 가치에 비하면 보석주머니야 아무것도 아니지.’

이렇게 귀한 걸 받아도 될까요, 같은 말들을 끝없이 쏟아내는 앨빈과 디터.

발닉에게 시선을 돌리자, 자본주의를 숭상하는 용병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련님, 언제나 그렇듯 이 발닉은 도련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걸 준비가 돼 있습니다.”

“목숨까지는 걸지 않아도 되고.”

나는 그에게 아까 나무함에서 나온 진주알, 아니 ‘개화환’을 건넸다.

“자네에겐 선물이 하나 더 있어.”

“이건···?”

나는 디터와 앨빈을 가리켜 보였다.

“저 둘에게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다는 거, 자네도 알고 있지?”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눈치가 빠른 발닉이 모를 리가 없다.

“알레스신의 축복이라 불리는 이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디터에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괴력이 있고···.”

방금 전, 흑의 기사를 또다시 불러냈던 앨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앨빈에게는 영혼을 자신의 몸에 불러내는 힘이 있지.”

“···짐작은 했지만 역시 놀랍군요. 근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이거.”

나는 발닉의 손바닥에 올려진 개화환을 가리켰다.

“이거면 자네에게도 그런 힘이 생길 거야.”

“···!”

“발닉 자네는 지금도 너무 유능한 가신이지만···.”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힘주어 말했다.

“이것으로 그대의 숨은 재능을 개화시키고, 그 힘으로 날 도와줄 수 있겠나?”

발닉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잔주름이 지기 시작한 눈가가 희미하게 떨리더니 그의 입이 열렸다.

“도련님, 아니··· 저의 주군이시여.”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 발닉의 보잘 것 없는 능력을 높이 사주시는 것도 모자라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시다니. 무슨 능력이 생기든, 그 힘을 온전히 주군을 위해 쓰겠습니다. 그리고···.”

용병의 목소리가 한층 더 떨렸다.

“···제 목숨을 다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더니 분연히 개화환의 껍질을 벗겨 내용물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맛이 끔찍할 거라고 얘기해주는 걸 깜박했네.

“우욱.”

발닉은 잠시 구역질을 하긴 했지만, 어떻게든 씹어 삼켰다.

그 순간.

다른 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가 나왔다.

[가신 ‘발닉’의 이능이 인위적으로 개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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