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52화 (52/176)

닿는 것은 모조리 부숴버린다

다시 몇 시간 전.

나무상자에 반지를 가져다대자, 푸른 빛이 변화하며 새로운 문구를 만들어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눈앞의 공간이 변화했다.

‘···!’

강렬한 충격이 머릿속을 섬광처럼 뒤흔들고 지나간 후.

제정신을 차리자 기이한 공간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저 천장에서 내려오는 붉은 빛이 시야를 밝혀준다.

‘척 보기에도 이질적인 곳이군.’

눈앞에는 네모나게 깎은 돌을 쌓아 만든 고대 신전 같은 것이 있었다. 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제단 위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른다.

척 보기에는 스톤헨지나 그리스로마 시대의 신전 같지만···.

저 멀리서 그아아악- 하고 들려오는 괴성이라든가,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 따위 때문일까.

‘흑마법사의 제단 같은 느낌이군.’

어쩐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신 공양이라도 해야 할 분위기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아공간의 일종일까요?”

발닉의 말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발닉과 디터는 그다지 놀란 눈치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전에 고대 던전에 들어가봤던 덕분인 듯하다.

반면 앨빈은 얼마나 놀랐는지 두 눈이 튀어나올 기세다.

“어, 어, 어···.”

보물상자를 통해 아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본인이면서, 막상 직접 경험하니 그 충격이 어마어마한가 보다.

‘하긴, 책으로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천지차이이지.’

그때 발닉이 돌연 이런 질문을 던졌다.

“헌데 도련님, 어떻게 이런 반지를 얻으신 겁니까?”

그의 시선은 내 손가락에 끼워진 사파이어 반지에 가 있다. 앨빈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건 얼마 전에 검술대회를 하고 받으신 거 아닌가요? 어떻게 그걸 여기에 활용하실 생각을···.”

소년의 궁금증은 이거였다.

‘검술대회의 기념품 격으로 나온 반지가 어째서 이곳의 입장권으로 작동하는 건가.’

이것은 나 역시 원작을 읽으며 의아해했던 부분인데, 이를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반지 역시 다른 던전에서 나온 전리품의 하나였지만, 유물을 옮기는 과정에서 일꾼 하나가 이를 제 주머니에 슬쩍했으며···.』

밀수상에게서 보석상의 손으로 옮겨가고, 그렇게 수많은 거래를 통해 마지막에 이른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고.’

안 그래도 이런 질문이 나오리라 예상했던 터였고, 이전에 카렌에게 써먹었던 핑계를 재활용하기로 마음 먹은 차.

“디터, 발닉, 앨빈.”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내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것이 알레스신께서 내려주신 축복인 ‘이능’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이능’이라는 말에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몇 달 전부터 그런 힘을 갖게 되었지.”

“···!”

세 명의 얼굴을 천천히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 그때였을 거다. ···이 힘을 이용해 내 현실을 바꾸고, 더 나아가 미래를 바꾸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리고는 발닉과 디터에게로 눈을 돌렸다.

“발닉, 디터. ···너희 두 사람이라면 내가 예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잘 알겠지.”

두 사람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마주 보는 것이, ‘아 이래서 도련님이 딴 사람이 된 거였구나’라고 지레 짐작하는 눈치다.

“앨빈,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것으로 대신해도 괜찮을까?”

앨빈 또한 고개만 끄덕였는데, 눈빛이 멍한 것이 살짝 넋이 나간 느낌이다. 하긴 같은 이능이라고 해도 미래를 본다는 건 사기 능력에 가까우니까.

어쨌거나 앞으로도 종종 이런 경우가 발생할 테니, 미리 이런 식의 연막을 쳐두는 건 나쁘지 않다.

‘셋 다 의문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군.’

아니, 의문이 풀린 정도가 아니라···.

“도련님 말씀을 들으니 한층 안심이 되는군요.”

“주군만 따르면 걱정할 일이 없지요.”

디터와 발닉의 표정을 보아하니, 나에 대한 묘한 신뢰가 한층 강해진 느낌이다.

새하얀 공간 위에 돌연 글자가 나타났다.

[아공간 ‘최후의 보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첫 번째 관문 ‘다이어울프의 시험’에 내보낼 전투인원을 선발하십시오.]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 디터가 입을 열었다.

“주군.”

“응?”

“여기는 제게 맡겨주실 수 있으실까요.”

자신이 그간 수련해온 것을 시험해보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디터의 눈이 강한 의지로 빛났다.

* * *

도전과제의 달성을 위해서는 내가 다이어울프와 마주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이쯤에서 디터가 자신의 이능 스킬을 개화시켜야 한다.’

원작에서 디터는 단순한 괴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팰러스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전장을 오가며 경험을 쌓은 덕분인지,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장수로 거듭나기에 이르렀으니.

‘하지만 나와 함께하면서부터는 그럴 기회가 적었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이번 관문을 디터에게만 온전히 맡기기로 마음먹었고.

앞서 언급했던 대로 디터가 다이어울프들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거대한 철퇴를 시원하게 휘둘러 놈들의 머리를 부술 때마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깨갱! 하고 단말마가 울렸다.

‘압도적이군.’

그 광경을 나와 발닉, 앨빈은 투명한 벽 너머로 지켜보는 중이었으니.

“와, 디터 경이··· 저렇게 싸우실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디터의 온화한 모습만 봐왔던 앨빈은 특히나 놀란 눈치였다.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디터의 실력이 상당한걸.”

“뭐, 워낙에도 전투 감각이 좋은 편이긴 했습니다만··· 최근 몇 달간 디터 놈이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발닉은 제가 더 자랑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그렇게 감탄하는 것도 잠시, 우리는 다시 디터의 전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

그러나 다이어울프는 끝도 없이 쏟아져나왔다.

애초 이곳은 실존하지 않는 아공간.

저 맹수들 역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알 수 없는 힘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에 가까우리라.

크르르릉!

크르르를!

거대한 체구의 다이어울프들이 일제히 이를 드러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하기 그지없는 맹수 다섯 마리가 디터를 둘러싼 채 서서히 압박해왔다.

그것이 아무리 허상에 불과하다 해도.

아무리 이곳에서의 죽음이 실제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흐으, 섬뜩하네요.”

저런 광경 앞에선 그 누구라도 간이 오그라들 법도 한데, 디터는 외려 여유로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저런 맹수가 익숙하다 하더군요.”

발닉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입장에선 저절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광경.

‘다이어울프는 협공의 본능을 지닌 맹수다.’

언젠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늑대 이십여 마리가 거대 불곰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본 적 있다.

그때 아마 이런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던 것 같다.

‘이 개과류의 생물은 생각 외로 높은 지능을 자랑하는, 협력 플레이의 귀재들입니다.’

적당한 격차를 유지하며 포위망을 좁히는 맹수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가운데.

“크와아아앙-!”

대장격으로 보이는 놈의 울부짖음을 시작으로,

다섯 마리가 동시에 디터에게 달려들었다.

보다 못한 앨빈이 다급히 외쳤지만.

“디터 경!”

부우웅!

···디터는 당황하는 대신, 여유롭게 철퇴를 휘둘렀다.

퍼걱!

철퇴에 맞은 한 마리가 단말마를 내지르며 바닥에 떨어져나갔고.

철퇴를 들지 않은 디터의 거대한 왼주먹이 맹수의 목덜미에-

퍼억! 하고 직격했다.

“···!”

앨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침만 꼴깍 삼키는 건 나나 발닉 역시 마찬가지였다.

‘혀를 내두를 정도군.’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오른손에 든 철퇴와, 왼손의 주먹으로 사방의 맹수를 처리해내는 디터의 모습은···.

발닉이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살육의 신 같군요.”

그래. 나 역시 그에 동의한다.

안 그래도 강대한 체구를 자랑했던 디터는 최근 혹독한 근력 훈련과 벌크업을 감행하며 더더욱 몸이 단단해진 터였고.

퍼억! 쿠에엑!

주먹 한 번 휘두를 적마다 맹수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내리는 광경 속에 선 그는, 그야말로 ‘인간 병기’처럼 보였으니까.

그렇게 디터가 마지막 맹수를 처리한 순간, 앨빈이 벅찬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디터 경이 이겼어요!”

우리 모두가 안도한 그 순간-

크르르르릉!

“말도 안 돼.”

발닉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디터가 처리한 다이어울프들의 사체가 쌓여 있는 저 앞에, 새로운 다이어울프들이 잔뜩 나타났으니까.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숫자의 개체들이 말이다.

수십 마리의 다이어울프가 순식간에 디터를 포위했고.

컹컹! 크르르릉!

섬뜩한 울부짖음과 함께 덮쳐들었다!

“디터! 안 돼!”

“디터 경!”

“디터!”

거대한 맹수 수십 마리에 둘러싸인 디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은회색 털로 이루어진 ‘늑대의 산’에 잠겨버린 듯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순간.

“···어?”

늑대의 산이 부르르 떨렸고.

퍼어어어억! 귓전을 때리는 굉음과 함께-

“으아아아악!”

용암을 분출하는 화산처럼, 그 가운데서 디터가 두 팔을 쫙 펼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상상도 못한 광경에 두 눈이 절로 커진 순간, 메시지가 떴다.

[가신 ‘디터’의 경험치가 한계를 돌파했습니다.]

[새로운 이능 스킬 ‘섬멸의 일격’을 각성합니다.]

섬멸의··· 일격?

듣도 보도 못한 스킬의 등장에 당황해 있는데.

디터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거대 철퇴를 부웅 휘둘렀고-

파파파파파팡!

철퇴에 스치자마자 맹수들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

“···맙소사.”

“신이시여.”

디터가 금속 몽둥이를 현란하게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 피 분수가 일었다.

그렇게 몇 차례 연타하자 금세 수십 구의 맹수 사체가 산처럼 쌓였다.

“후우, 후우···.”

온몸이 늑대 피에 젖은 채 디터가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리는데, 푸른 빛의 문구가 나타났다.

『1차 관문 ‘다이어울프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 * *

다음 관문에 돌입하기 전,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디터는 아직까지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으니.

“디터, 수고했다.”

“···흐어, 감사,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씩 웃으며 눈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는 디터.

온몸이 피칠갑이 되었지만, 본인의 피는 하나도 흘리지 않았다는 게 핵심이다.

“후우···.”

아직도 전투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디터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흘려보내며 한숨을 쉰다.

‘보는 내 입장에서도 엄청난 사투였으니,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이겠지.’

하지만 디터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얘기였다.

“···농농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요.”

“농농이?”

여기서 농농이 이름이 왜 나오지 싶은데, 디터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농농이는 물방울무늬 이불 없이는 잘 안 자는데, 보모가 잘 챙겨주고 있을까요.”

“···.”

“행여라도 혼자 울고 있지는 않을런지···.”

뒷말을 잇지 못하는 디터를 보며, 나도 어떤 의미로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너 어느새 진짜 아빠가 된 거냐.’

나는 사실 그닥 걱정하지 않았던 게, 일단 보모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일 뿐더러.

농농이 녀석이 생각보다 굉장히 눈치가 빠르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아기가 낯을 가리네, 정도로 생각하지만···.

‘본능적으로 악의를 감지한달까.’

디터나 발닉이 곧잘 잊는 것 같은데, (외모도 그렇고) 노움족 기준으로는 아직 아기라고 해도 우리보다 몇 십 년을 더 오래 산 요정이 아닌가.

‘무엇보다 농농이에겐 순간이동 능력이 있다.’

문제의 고대 던전에서 우리 세 사람을 순식간에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 능력.

그게 바로 농농이의 순간이동 능력이었다.

···얼마 전 방에 숨어 있던 용병을 잡아낸 것도 그렇고, 농농이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니까.

“디터, 걱정마라. 농농이는 사실 우리보다 훨씬 강할 수도 있거든?”

“그럴까요···.”

그제서야 디터가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뒤늦게 이런 메시지가 떴다.

[가신 ‘디터’의 충성도가 75에 도달해 그의 스킬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신으로 거둬서인지 호감도가 충성도로 변한 듯하다.

헌데 가신의 스킬리스트까지 확인 가능하다고?

『이능자 ‘괴력의 소유자’ 스킬리스트

1. 괴력 (숙련도 max, 지속성 스킬)

- 설명 : 인간의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괴력을 낸다.

2. 섬멸의 일격(숙련도 lv. 1)

- 설명 : 무기에 닿는 모든 것을 섬멸한다.

- 지속시간 : 5초

- 쿨타임 : 2시간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지속시간은 증가하고 쿨타임은 감소합니다.)』

···닿는 것을 전부 박살내는 스킬이라니.

이름만큼이나 무시무시하네, 라고 생각하던 그때.

또다시 그 푸른 빛이 나타나더니 허공에 문구를 새겼다.

[두 번째 관문은 ‘히드라의 경계’입니다.]

히드라라니,

설마 독사의 머리가 여러 개 달려 있는 신화 속 괴물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히드라를 상대할 전투인원을 선발하십시오.]

···맞나 보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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