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51화 (51/176)

대가리를 부수는 괴력의 소유자

우리는 구멍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빛이라고는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게 전부라 처음에는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이건···.”

눈이 서서히 적응함에 따라 그 실체가 드러났다.

앨빈이 흥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맞죠? 지하도시.”

“···그런 것 같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곳은 말 그대로 거대한 지하도시였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사방이 새카맣게 어두운 가운데, 암벽인지 나무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물체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암벽 발치부터 중간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집이나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말 그대로 ‘지하에 자리잡은 도시’.

헌데 원작에선 어째서 이곳을 발견하지 못한 걸까.

대규모의 발굴단이 파견되어 꽤 오랫동안 조사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 이 반지 덕분인가.’

이곳으로 들어오고 나니 반지의 진동이 한층 강해졌다.

도시라기엔 작고, 마을이라기엔 거대한 이 공간에 반지가 공명하는 듯하달까.

그 기이한 진동을 느끼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폐허가 된 지 오래다.

디터와 발닉 또한 전대미문의 광경을 마주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엄청나군.”

앨빈은 그 가운데서도 제일 흥분한 모양새였으니.

“우와아, 엄청난데요!”

원작에 나온 추측대로 이곳이 드워프가 거주했던 곳이 맞다면 그 학문적 가치는 어마어마할 거다.

‘현생에서라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됐을 정도의 유적지로군.’

놀란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앨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도서관을 뒤지다가 알아낸 게 몇 가지 있는데요.”

“뭔데?”

“이 근방에서 전해내려오는 설화 중에 이런 게 있거든요.”

최초의 인간 왕국이 세워지기 전, 그러니까 기원전 300년에 타스카이 부족과 고대종족 하나가 대접전을 벌였던다.

그 전투의 승자는 타스카이 부족이었는데, 고대종족의 도시를 통째로 수장시켰다나 어쨌다나.

“···수장이라.”

수장이란 건 과장된 표현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얘기였다.

“여기 나오는 고대종족이 혹시 드워프가 아닐까요? 드워프가 이런 지하도시를 건설했다는 기록이 종종 나오거든요.”

원작을 읽어봤는데 네 말이 맞대, 라고 할 수는 없어서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발닉이 미간을 좁히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 조사하고 이곳을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근처가 화산지대라서 기반이 약하거든요.”

그 역시 이 광경에는 많이 놀란 눈치였지만, 실용적인 성향의 용병답게 의외의 포인트를 짚었다.

“···화산지대?”

처음 안 사실이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원작에선 그런 언급이 없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화산 활동을 하지 않는 휴화산에 가깝지요. 그러니 폭발할 위험은 없지만, 지반이 약하다 보니 종종 산사태가 일어나곤 합니다.”

“허.”

“아마 지하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근방의 암석들이 워낙 무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산지대’라는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앨빈이 방금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타스카이 부족이 고대종족의 도시를 통째로 수장시켰다고 해요.’

이 두 가지를 가만히 놓고 보니 돌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닌가.

‘폼페이 최후의 날!’

베수비오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과 화산재로 뒤덮여 박제되어버린 도시 폼페이처럼,

‘고대 종족의 도시’ 또한 수장된 게 아니라 ‘용암장鎔巖葬’이 된 게 아닐까.

‘무엇보다 고대 전설이나 설화는 대부분 구전, 즉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거치며 그 원형이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니.’

그 점을 고려한다면 내 가설도 그리 허무맹랑하지는 않지, 라고 생각할 때.

앨빈이 이런 말을 꺼냈다.

“이곳이 정말 드워프의 도시가 맞다면··· 혹시 드워프의 보물상자도 있지 않을까요?”

“드워프의 보물상자?”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 디터와 달리, 발닉은 그런 얘기를 들어봤다는 반응이다.

“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그쵸?”

발닉과 몇 마디 더 주거니 받거니 하던 앨빈은 디터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드워프들이 사용하던 고어로 보물상자란 ‘최후의 보루’를 뜻하거든요.”

드워프가 만든 보물상자는 일견 평범하게 생겼지만.

누군가가 거기에 ‘열쇠’ 역할을 하는 물건을 갖다대는 순간, 열쇠의 소유자는 본 적 없는 아공간으로 이동된다고.

보물상자가 일종의 텔레포트 장치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아공간에 잠든 진짜 보물을, 온갖 흉포한 맹수가 지키고 있다고 말이죠.”

그 맹수들을 이겨낸다면, 보물을 가지기에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고고학 덕후를 데려오길 잘했네.’

더욱이 설정집에 따르면 드워프라는 종족은 금은보화를 애지중지한다 했으니, 이 안에 상상을 초월하는 보물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것을 확인하려면 보물상자부터 찾아내야겠지.

나는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발닉의 말이 맞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수색을 마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왼손에 낀 사파이어 반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드워프의 보물상자를 찾는 거다.”

여기까지 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 * *

우리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불빛 하나 없이 새카맣던 눈앞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밝아졌다.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종류의 광석이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광석을 가공해서 만든 등燈이라고 해야 하나.’

일종의 광석등에서 은은한 푸른 빛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들리는 것이라고는 사박사박, 울리는 우리의 발소리가 전부였다.

“···이 넓은 곳에 어째 인기척이 전혀 없다니, 어쩐지 오싹하군요.”

발닉의 말마따나 이상한 일이었다.

과거 이곳에 드워프가 살았다면 그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머리뼈 같은 것이 어딘가 있을 법도 한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워낙 오랜 시간이 흘러 풍화돼버린 걸까.

우리는 골목에 이를 때마다 표식을 남기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마을 광장으로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앨빈은 잔뜩 흥분한 채 박물학자마냥 온갖 잡지식을 쏟아냈다.

“이건, 이건··· 혹시 <푸르힐라르의 서>에서 등장했던 그 검일까요?”

“어, 이건 뭐지? 이런 형태의 보석은 왕국 안에서 여간해서 취급되지 않는 건데. 역시 유물이라 그런지···.”

그런 앨빈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며 한참을 걸어가는데, 돌연 반지 낀 손이 지이잉- 하고 울렸다.

‘이건!’

손을 들자 이제는 아예 반지의 보석알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옆에 선 디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군, 이건···.”

“쉬잇.”

보석알의 빛이 점점 커지더니 어딘가로 쭉 뻗어나간다.

나는 빛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다.

“저기로 가보자.”

“···.”

디터는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 네 사람의 발이 닿은 곳은-

“설마··· 마을 우물 아래에 보물상자가 숨겨졌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앨빈의 말마따나, 보물상자는 광장 한가운데에 자리한 우물 속에 숨겨져 있었다.

발닉이 우물 바닥에 내려가 갖고 올라온 ‘보물상자’는 생각 외로 초라한 나무함처럼 생겼다. 눈에 띄는 것이라곤 열쇠구멍이 없다는 것 정도?

‘그거야 열쇠가 아닌, 이 반지로 여는 거니까···.’

나는 ‘드워프의 보물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무함에 반지를 가져다대보려던 순간.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에 강력한 진동이 느껴졌고.

“이건···!”

나무함에서 푸르른 빛이 파앗 하고 쏟아져 나왔다. 흡사 판타지영화에나 나올 법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는데.

푸른 빛이 시야를 어지럽히며 지나간 뒤로 일련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드워프의 보물상자

-상자는 용감한 이의 도전을 거부하지 않는다.

-상자는 단 한 번만의 도전을 허용한다.

-도전에 실패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실패자에게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

도전자는 ‘입장권’을 상자에 갖다대시오.』

“이, 이건 대체!”

“맙소사···.”

푸른 빛으로 쓰인 문구를 다들 넋을 놓고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즉, 실패해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는 거로군.’

설정집에서 드워프가 평화를 지향하는 종족이라더니 그런 성격이 이런 데까지 반영되는 것 아닌가 싶다.

다이어울프 이상으로 강력한 맹수들이 튀어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죽는 것만 아니라면 도전해볼 법하지 않은가.

“다들 어떻게 생각해?”

도전하느냐 마느냐.

어쩌면 무의미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뭘 묻고 그러십니까, 도련님. 눈앞에 날 잡수시오, 하는 보물을 두고 그냥 가는 게 말이 된단 말입니까?”

발닉은 자본주의의 첨병다운 발언을 했고.

“그··· 저는 방해가 안 되도록 최대한 열심히···.”

이후로 한참 동안 이어진 앨빈의 말을 요약해보자면, 자신은 도움이 안 될지라도 상자 안에 든 것이 무엇일지 너무너무 궁금하다는 거다.

‘최근에 수련을 꽤 열심히 했다고 했지.’

검술대회 이후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앨빈도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디터는···.

“주군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역시 기대했던 대답이다. 나는 씩 웃으며 4차원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디터에게 건넸다.

“철퇴는 어느 정도 손에 익었나?”

“그럼요, 제 손에 딱 맞던데요.”

건네는 것만도 쉽지 않았던 묵직한 철퇴를, 디터는 가볍게 붕붕 돌린다.

···저 모습만 봐도 등에 소름이 돋는구나.

디터는 최근 둔기술을 연마했다고도 덧붙였다.

“이제부터 네 활약이 중요하다. ···짐승을 잡는 건 자신 있댔지?”

씩 웃으며 ‘맡겨만 주시죠’라고 대답하는 디터.

이번 일이 디터의 활약에 달려 있다는 건 이런 의미다.

‘아공간에는 다이어울프가 반드시 등장할 거다.’

다이어울프.

오늘날에는 잘 출몰하지 않으며 북부 고산지대에서만 이따금 찾아볼 수 있다는 맹수 중의 맹수.

‘설정집 내용에 따르면 일반 늑대의 두 배는 될 법한 덩치에, 칼조차 잘 들지 않는 강철 같은 털가죽을 자랑한다고 했던가.’

나는 앨빈에게 다이어울프의 특징과 약점을 사전에 조사하도록 지시한 터였다.

조사를 마친 앨빈의 보고에 따르면-

‘다이어울프에게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둔기다.’

놈들의 두개골을 한 번에 박살내는 게 가장 쉬운 사냥 방법이라는 것. 일반인에게는 실현 불가능한 방법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괴력의 소유자’가 있지 않은가.

디터가 놈들의 머리통을 얼마나 시원하게 깨부수느냐에 따라-

‘도전의 성공 여부가 좌우될 테니 말이지.’

그리고 잠시 후.

* * *

크르르를!

크르르릉!

은회색 털을 자랑하는 한 무리의 늑대, 아니 다이어울프 무리가 우리를 감쌌다.

목 안쪽에서 올라오는 그르렁 대는 소리에 등골이 쭈뼛해지는 가운데.

크르릉! 왈왈!

제일 호전적인 녀석 하나가 디터에게 번개처럼 달려들었고-

“조심해!”

그 찰나 같은 움직임에,

다른 두 마리가 양쪽에서 협공하듯 덤벼들었다.

‘···이런!’

아뿔싸 싶어 그쪽을 돌아본 순간,

디터는 이미 오른손에 든 철퇴를 허공에서 붕붕 돌리는 중이었다.

‘저게··· 내가 준 그 철퇴가 맞나?’

내 손에 있을 때만 해도 여느 것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해 보이던 그 물건은-

그의 손에서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짐작케 하는 무시무시한 형태로 변해 있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수박만 한 크기의 쇳덩어리가 공중을 날더니,

빠각!

-하고 다이어울프의 머리통을 아작냈다.

“···!”

이윽고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물 만난 고기처럼, 아니 전장의 사신처럼 활약하는 디터를 보며,

나는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바로 이곳이야말로,

그가 지닌 ‘괴력의 소유자’라는 이능을 제대로 개화시킬 공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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