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49화 (49/176)

이건 먼치킨급 능력인데

앨빈이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대략 사정은 짐작할 만했다.

내란에 휘말려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려낼 수 있었던 게 손자인 앨빈이 아니었을까.

짐작이긴 하지만 앨빈은 지금의 ‘밀’이라는 성을 내어준 농부의 집에 맡겨 자랐을 거고 말이다.

‘그럼 불과 열 살 무렵부터 세자르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던 건가.’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소년에게 대체 무슨 편지를 쓸 수 있었을까.

그것도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서라니.

앨빈이 보낸 편지 내용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온갖 설화와 환상으로 이루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의 앨빈 역시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 없는, 평범한 마을 아이에 불과했을 테니.’

어쩐지 입안이 씁쓸한 가운데.

앨빈은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의 가문이 그 지경에 이르렀는지, 세자르와 할아버지가 무슨 관계였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본인의 손주를 보러오신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동급생들에게 얻어터지기나 하는 형편없는 놈이 ‘흑의 기사’의 손자라니 이거야말로 우스운 일이겠지만-”

“앨빈.”

나는 힘주어 말했다.

“자기 비하는 그 정도 하고.”

“···.”

“네게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는 건 알고 있나?”

앨빈은 말 없이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아마 어느 정도 짐작했을 거다.

···브렉과의 경기 때,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제 몸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그게 설마··· 이능인가요?”

조심스레 묻는 소년의 목소리에서 조바심이 묻어났다.

“그래. 넌 이능을 각성한 거다. 결승전에서 네가 브렉을 완전히 압도했던 것, 혹시 기억 나나?”

“어렴풋이 기억은 나는데···.”

앨빈은 기억을 더듬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기이한 감각이었어요. 제 몸이 제 의사대로 움직이지 않고, 이 몸 안에 제가 갇혀 있는 듯한···.”

그렇다면 혹시···.

나는 앨빈의 이능을 얼추 짐작하며 말을 받았다.

“어떤 이능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네게 특별한 능력이 생긴 것만은 분명해.”

앨빈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니 하는 말인데, 앨빈. 네 힘을 날 위해 써줄 수 있겠나?”

“···!”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설득했다.

너의 조부께서 어떤 연유로 내 후견인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원대한 포부가 있다고.

더불어 -앞서 카렌에게 말했던 것처럼- 다섯 명의 이능자를 가신으로 거두면 공작가의 적자로 인정받게 될 것임을 솔직히 털어놓았으며.

“하지만 그저 적자로 인정받기 위해 널 가신으로 들이려는 건 아니다.”

네가 지닌 능력이 진심으로 탐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지만, 앨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세자르 님의 그릇이 다르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목소리가 씁쓸했다.

“저 같은 놈에게 이능 하나 생겼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제가 끼어들어봤자 세자르 님의 원대한 포부에 오히려 방해가 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앨빈.”

카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지만, 앨빈은 여전히 자조적인 표현을 이어나갔다.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제가 괜히 망쳐놓느니 뒤에서 응원하고 싶어요. 진심입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앨빈을 등용하는 데 설마 그의 낮은 자존감이 장애물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터였으니까.

‘어떻게 접근해야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떨군 앨빈을 불렀다.

“앨빈. 네 주장은 모두 틀렸어.”

“···?”

앨빈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준비했던 논거를 꺼냈다.

“일단 첫째. 넌 자신에게 이능이 생겨도 달라질 게 없다고 했지만···.”

앨빈에게 전해주려고 들고 온 ‘왕궁연회 초대권’을 보이며 말했다.

“넌 이능을 이용해 브렉을 이겼다.”

“일명 ‘밥맛 없는 브렉’ 말이지.”

카렌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애단이 최종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네 덕분이야. ···이래도 달라진 게 없어 보이나?”

죽은 생선 같던 앨빈의 눈동자에서 희미한 빛이 일었다.

“그리고 두 번째. 넌 자신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침대에 수북이 쌓인 편지를 가리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건 바로 네 편지였다.”

···사실은 공작이 전해주기 전까진 한 번도 읽어본 적 없지만.

“내가 그 저택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나는 놀란 앨빈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낱 열 살짜리 어린애에게 가해진 무관심 속의 학대, 방치, 폭력···.

‘나중엔 암살 시도까지 겪을 정도였지.’

내가 아닌 ‘세자르’의 과거사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둘은 눈에 띄는 반응을 보였다.

카렌은 입 안으로 욕설을 삼키며 분노하는 한편, 앨빈은 세자르의 고통에 공감이라도 하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택 바깥에도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네가 편지로 알려주지 않았다면···.”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으려니 가슴 한 켠 쿡쿡 쑤신다.

“나는 그 좁디좁은 벽장 속에서 나오지 못했을 거다.”

앨빈의 순수한 눈빛을 보니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러니 이제는 내가 널 꺼내줄 차례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앨빈을 등용할 수 있느냐니까.

“너희 세비어 가문의 가훈이 ‘목숨은 스러질지언정 충의는 사라지지 않는다’가 아니었나? 조부의 뜻을 따라 진정한 기사가 되고 싶다면.”

그에게 손을 내밀며 힘주어 말했다.

“나를 따라라, 앨빈.”

앨빈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더니.

돌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앨빈?”

카렌의 목소리는 무시하며 소년은 내 앞에 천천히 다가와 섰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조부에 비해 너무도 부족한 몸이지만, 에드먼드 세비어의 손자 앨빈 세비어, 감히 세자르 님을 주군으로 모시길 청합니다.”

기사 서임이라도 받는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어서 바닥에 앉는 앨빈.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기다리는 소년에게서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가문의 최후 생존자라.’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전언이라고는 얼굴도 모르는 소년에게 편지를 대필하라는 것이 전부였으며,

힘들게 들어온 아카데미에서는 또래의 폭력과 무시에 시달리던 소년.

앨빈 밀, 아니 앨빈 세비어의 굳은 결심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기대에 부응하는 것만이 그의 결심에 보답하는 길이다.’

그것을 되새기며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 부탁해.”

일부러 농담처럼 대꾸한 순간.

반가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앨빈’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50을 기록해 ‘앨빈’의 이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즉시 앨빈의 호감도창을 확인했다.

『‘세비어 가문의 최후 생존자’ 앨빈(호감도 50점)

- 이능자 ‘영혼 빙의자’

- 설명 : 특정한 영혼에 빙의할 수 있는 샤먼의 일종.

- 지속시간 : 30초

- 쿨타임 : 24시간

- 발동조건 : 해당 영혼과의 친밀도가 50 이상인 경우(*해당 인물을 생전에 많이 만났거나, 그의 행적을 기록한 전기를 읽을 경우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흑의 기사 에드문드 세비어 경이 생각나더군.’

앨빈의 몸놀림을 보며 리암은 그렇게 말했었다.

조부에게서 검술을 배웠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 영혼에 빙의했기 때문이라니.

‘이건 거의 먼치킨급 능력이 아닌가.’

에드먼드 경의 영혼에만 빙의할 수 있다고 해도 사기급 능력인데, ‘발동조건’을 보면 ‘친밀도가 50 이상인’ 영혼에게 빙의할 수 있단다.

친밀도를 어떻게 올리느냐면, 인물을 생전에 자주 만났거나 그의 전기를 읽어서 올릴 수 있다는 거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능력이다.

강력한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 * *

그 후로 시간이 제법 빠르게 흘렀다.

불과 한 달간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중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우애단의 단칙을 정해야 한다니까?”

검술대회 종료 시점부터 가입 문의가 쇄도했던 차.

우리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카렌과 앨빈은 나름의 절차를 걸쳐 신입단원을 받았다.

어떤 기준으로 단원을 뽑는 게 좋겠냐는 카렌의 질문에 나는 한 가지만 강조했다.

‘밥값할 수 있는 놈.’

‘···그게 뭐야.’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카렌은 사람 보는 눈이 나쁘지 않았다.

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재능을 갖춘 인재들로 단원을 뽑았으며, 가려낸다고 가려냈는데도 그 수가 20명에 이르렀다.

“지금까진 우리뿐이었으니 단칙이 없었어도 괜찮았지만, 이제 서른 명에 가까워졌잖아.”

아침부터 닦달하는 카렌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하면 되고. ···앨빈?”

“네, 세자르 님!”

금방이라도 폭발하려는 카렌에게 얼른 앨빈을 붙여주었다.

겉보기엔 어리버리해도 앨빈은 일머리가 훌륭한 편이니 카렌의 수고를 훨씬 줄여줄 거다.

“그럼 수고.”

“···.”

입을 다문 채 날 노려보는 카렌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카렌, 넌 내 가신이잖아. 이런 자잘한 업무는 가신이 알아서 하는 것 아닌가?’

‘···!’

카렌이 약 올라 죽으려 했지만,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빛이 내 뒤통수를 따갑게 했지만 뭐 어떠랴.

‘은근 놀리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 * *

그로부터 1주 뒤.

아카데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첫 번째 방학이 찾아왔다.

이 한 달여의 휴식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저마다 다양한 계획을 세웠는데.

‘페킹튼 성으로 돌아가 검술을 단련해야겠지.’

‘길드에 가서 그간 밀린 일을 처리해야 돼. 어휴,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힘 빠지네.’

‘저는··· 음··· 글쎄요.’

돌아갈 곳이 확실한 리암과 카렌과는 달리, 앨빈은 딱히 갈 곳이 없는 모양새였다.

자신을 키워준 농가로 가도 상관은 없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닥 환영받는 존재는 아닌 듯했다.

‘여차하면 기숙사에 머물러도 상관이 없고요.’

우애단 단원들의 방학 계획을 전해들은 발닉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럼 도련님은 어쩌실 겁니까? 역시 공작저에 돌아가시려나요?”

공작 각하께서 도련님의 방문을 고대하실 것 같다며 발닉과 디터가 뭐라 뭐라 얘기를 나눴지만.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뒤늦게 말했다.

“그거야 천천히 가면 되고,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할 일이라뇨?”

고개를 갸웃하는 발닉과 디터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보물찾기나 하러 갈까?”

원작의 결말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독자들 사이에서도 회수하지 못한 떡밥이냐, 흔해 빠진 맥거핀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던 소재.

···고대유물을 찾으러 갈 작정이다.

‘원작에서 유물이 발견되는 것은 올해 겨울쯤으로 몇 달 뒤의 일이지만.’

왜 이를 가리켜 미회수 떡밥이냐고 하느냐면,

발굴된 후에도 보물상자의 열쇠를 찾지 못한 채로 오랜 시간이 흐르며.

원작 후반부에서 ‘사파이어 반지’가 그 열쇠임이 밝혀진 뒤에도 유물에 관한 미스터리가 온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작가가 완결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이 말이다.

게다가 언젠가 작가 ‘역4서’가 작가의 말에 이렇게 남긴 적이 있었거든.

‘이건 팰러스한테 주면 안 될 것 같네요. 너무 어마어마한 힘이라 밸붕 올 듯.’

그 말대로 작가는 팰러스한테 이 유물을 안 줬을 뿐더러 유물의 정체가 뭔지도 밝히지 않았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고대 종족과 인간이 전쟁을 벌이던 고대사에 관한 무언가’가 아닐까 하는 게 고인물 독자들의 주된 추측.

‘몸이 달아 죽겠네.’

내 개인적인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그놈의 ‘밸붕’이 올 법한 어마어마한 유물을 꼭 손에 넣고 싶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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