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석을 다질 차례
모처럼의 주말.
나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어제 카렌과 나눈 대화를 돌이켜보았다.
카렌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받아들일게. 아니···.’
갑작스레 무릎을 꿇는 모습에 어찌나 당황했던지.
‘길드 검은손의 후계자 카렌 돌로레스, 레핀 가문의 세자르 님의 가신이 되길 청합니다.’
우연치 않게 그녀를 가신으로 거두게 된 직후, 이런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어쩌면 내가 지닌 이능이란, 정해진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아닌가 하고.
원작에서 이 시점의 팰러스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반년 후 졸업을 앞둔 만큼 아카데미 안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다수 학생의 선망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나의 등장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지.’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스포트라이트가 사생아 동생에게로 갔으니 지금쯤 기분이 엿 같지 않을까.
세자르가 된 지 몇 달 만에 원작과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상기하자 감개무량한 기분이 든다.
‘팰러스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던 카렌부터가 나의 가신이 되었지.’
앞으로의 계획은 이렇다.
검술대회 우승자에게 ‘왕궁연회 초대권’이 주어지지 않았던가.
팰러스는 이미 사교계 데뷔를 마친 데다 이번 방학을 맞이해 ‘그랜드투어’라 불리는 중세판 유학을 다녀오기로 했으니, 연회에는 참석 못 할 거다.
그리고 나는 그의 부재를 이용해···.
‘왕궁연회에서 놈보다 한 발 먼저,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할 것이 있으니.
나는 도전과제 달성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것을 꺼냈다.
[도전과제 ‘보물섬의 흔적’ 달성! - 고대 유물의 단서를 얻었습니다.]
[보상 ‘유물 지도’를 수령했습니다.]
사파이어 반지가 ‘입장권’이라면, 이 지도는 그 위치를 알려주는 셈.
좀 있으면 학기가 마무리되니 여유시간을 활용해 발닉과 디터를 데리고 ‘고대유물’을 손에 넣으러 가야겠다.
그리고 이제는 갱신된 도전과제 목록을 살펴볼 차례.
-이능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나요?
-레핀 공작에 대한 장기적인 독살 위협을 저지했나요?
-고대 유물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나요?
-회색 다이어울프에게 목이 뜯길 뻔했나요?
-누군가를 인위적으로 각성시켜보았나요?
이능자를 찾고, 유물을 발굴하는 건 다 좋은데 말이지.
‘다이어울프 뭔데.’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또다시 목숨의 위기가 등장한다 이건가.
뭐, 고대유물을 그렇게 쉽게 얻으리라고는 생각 안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건 그때 가서 대비하기로 하고.
두 번째 구절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
레핀 공작에 대한 장기적인 독살 위협이라.
그냥 독살도 아니고 ‘장기적’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을 미루어보면···.
‘공작에겐 딱히 별다른 감정이 없지만.’
세자르가 적자로 인정받고,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 있어줘야 한다.
나는 곧바로 책상 앞에 가 앉아 깃펜을 집었다.
『존경하는 각하께,
세자르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일필휘지로 편지 작성을 마친 후, 디터에게 편지 전달을 부탁했다.
‘그럼 이제 디터와 카렌, 두 명의 이능자를 가신으로 거둔 거니.’
앞으로 남은 건 세 명.
레핀 가문의 적자로 인정받는 순간부터 많은 것이 달라질 거다.
그리고 최근 각성한 또 한 명의 이능자가 있으니···.
‘앨빈 밀.’
앨빈을 등용할 차례였다.
* * *
최근 레핀 공작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공작이 없는 틈을 타 공작부인이 왕처럼 굴며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던 몇 달 전과는 달리.
이제는 공작이 공작저에 자리를 잡은 채 상황을 하나씩 정리해나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공작저의 총관 카얀은 그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편지를 가져다드리면 더더욱 기분 좋아하시겠군.’
레핀 공작이 데려온 이후로 내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사생아 소년 세자르.
그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딴 사람이 되었고.
그 무심한 공작의 마음을 흔들어 아카데미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공작은 아카데미에 밀정을 심어놓고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을 정도였으니.
‘말씀으로는 소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서라 하시지만···.’
사실은 소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 더 가까웠다.
세자르가 데려간 공작가 사병인 발닉도 실력이라면 알아주는 사내이지만···.
‘암살을 막아낼 정도로 훈련받은 자는 아니지 않은가.’
공작은 미간을 좁히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한 반응에 총관 자신은 지나친 기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총애를 받는다 해도 그래 봤자 서자일 뿐. 사생아의 목숨을 누가 구태여 노릴까 싶어서 말이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더니 조리장 벤이 답답하다는 듯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하, 총관님은 마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셔서 그럽니까?’
전에도 마님은 유독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세자르 님을 못살게 굴었다며 말이다.
그때야 총관은 자신이 이 공작저 내부의 사정에는 심할 정도로 어두웠음을 깨달았다.
‘반성해야겠군.’
그 뒤로 세자르 도련님의 밀정과 꾸준히 연락을 취하며 각하께 정기적으로 보고를 드렸다.
-세자르 도련님이 모든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입학하셨답니다.
-도련님이 건방진 동급생을 주먹 한 방으로 기절시키셨다고···?
-검술 대련에서 1대5로 완승을 거두었답니다!
-세자르 님이 학생단체를 스스로 만드셨답니다.
-세자르 도련님이···.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도련님 본인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 아닌가!
총관은 즐거운 마음으로 공작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공작은 여느 때처럼 무감정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총관이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편지를 내밀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세자르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고···.”
공작의 축 처진 입가 끝이 실룩거리는 것을 총관은 못 본 척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실 수 있게 얼른 나가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총관 카얀이 눈치빠르게 집무실을 나간 뒤 공작은 맘 놓고 편지를 뜯어보았다.
『존경하는 각하께,
세자르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검술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고자 펜을 듭니다. (중략)』
검술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공작의 입가에 절로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생각 외로 시시콜콜한 세자르의 편지를 읽으며 로건 공작은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상했다.
‘나 또한 검술대회 우승에 목을 맸었지.’
경기장 한가운데에 설 때 사방에서 들려오던 그 뜨거운 함성.
오로지 승패만을 눈앞에 두고 전력을 다해 부딪쳤던 기억.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순수한 순간들이 공작의 머릿속에 다시금 재생되었다.
“···그것도 다 좋은 추억이로군.”
미소를 머금은 채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공작은 끝머리에 적힌 ‘추신’을 보고 움찔했다.
-추신.
최근 건강은 어떠신지요.
소화불량, 식욕감퇴, 감각둔화. 만약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되는 사항이 있다면 당장 주치의를 불러 진찰을 받으시고···.
공작의 눈동자가 맨 마지막 줄로 향했다.
‘식사 시엔 항상 은 식기를 사용하십시오.’
은 식기라.
공작은 안락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최근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터였다.
몸 구석구석이 쑤시고 소화가 안 되었으며 식욕이 부쩍 줄었다.
잡념으로 복잡한 머릿속에, 세자르 또한 비소 중독 증세를 보인 적이 있다는 주치의의 보고가 떠올랐다.
‘짚이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자신은 눈앞에 뻔히 나온 해답을 보길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비록 남녀간의 애정은 없을지 모르나, 십여 년을 함께해온 전우애는 있을 거라며.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오판이었다.
애시당초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
공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두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에야 총관을 호출했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충성스러운 카얀의 눈을 보며 공작이 담담하게 말했다.
“조리부 사용인들을 전면 조사하게.”
또한 그들이 만드는 음식에서 비소가 소량이라도 검출되는지 조사하라는 말에, 카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비소··· 말씀이십니까?”
공작저 내의 독극물 유입이란 결코 쉬이 넘겨서는 안 될 중대한 사안이니 말이다.
그러나 공작은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지시를 이어나갔다.
만일 검출된다면 그 비소의 유입 경로가 어디인지.
이를 지시한 최종 책임자가 누구인지···.
“절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명명백백한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공작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빛났다.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도려낼 차례였다.
* * *
검술대회가 끝난 지 이틀 뒤에야 앨빈은 깨어났다.
“앨빈! 걱정했잖아!”
카렌의 말에 앨빈은 어쩔 줄 몰라했다.
“걱,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나는 앨빈의 어깨를 툭 쳤다.
“네 덕에 결승전도 이겼는데.”
소년은 눈에 띄게 어색해했다. 이렇게 대놓고 칭찬받는 데 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때, ‘앨빈’의 호감도창이 눈앞에 떴다.
『아카데미 학생 앨빈(호감도 45점)
- 이능 ????의 소유자(*호감도 50 이상 시 해금됩니다)
- 특성 : ‘공상가’, 겁쟁이, 소심, 책벌레
- 비고 : 할아버지가 남겨준 ‘책무’에 양가적 감정을 품고 있음.』
‘···.’
왜 이제야 뜨는 거야.
지금껏 고민해온 것이 무색할 정도로, 호감도창에는 단서를 떠먹여주는 듯한 내용이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가 남겨준 책무라···.’
앨빈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그 책무가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다.
‘게다가 생각 외로 호감도가 높네.’
조금만 더 있으면 이능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데 앨빈의 담당의사가 다가왔다.
“진찰해본 바, 몸에 이상은 전혀 없구나.”
다만 그간 피로가 많이 쌓였으며, 그것이 검술대회 때 무리하게 움직이며 극에 달했다는 것.
이제 퇴원해도 괜찮다는 말을 끝으로 의사는 병실을 나섰다.
“다행이야, 앨빈.”
카렌의 말에 앨빈이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혈색이 제법 도는 것이 건강에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다는 것은···.
‘이능을 각성했기 때문인가.’
나 역시 그림자 보법을 완성했을 때 곧바로 기절해 반나절 뒤에야 깨어나지 않았던가.
제법 개운한 얼굴을 한 앨빈을 가만히 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앨빈.”
“네?”
“네게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카렌과의 대화로 깨달은 게 또 있다.
누군가의 비밀을 밝혀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나 역시 그에 준하는 비밀 하나를 드러내 보이는 거란 것을.
미리 설명을 들은 카렌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세자르’ 앞으로 가짜 후견인이 몇 년간 보내온 편지더미를 꺼냈다.
“이거 네가 쓴 거 맞아?”
거의 확신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전날, 앨빈의 필기를 구해다가 편지의 필체와 비교해본 뒤 두 필체가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으니까.
“···어떻게.”
앨빈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얼굴이 창백해졌다.
앨빈, 흑의 기사, 가짜 후견인의 편지.
이 세 가지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앨빈을 추궁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말없이 앨빈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앨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제 앞에 수북이 쌓인 편지더미를 복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볼 뿐.
“···.”
앨빈은 그중 하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쓴 것임이 분명한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그의 표정이 묘했다.
그때의 자신을 그리워하는, 혹은 그 모든 것을 지긋지긋해하는 얼굴.
“···앨빈?”
보다 못한 카렌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지만,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말하기 어려운 속사정이 있음이 분명하니까.
“천천히 살펴봐라. 결심이 서면 그때 말해줘.”
나는 아예 의자를 끌어다가 앨빈의 침대 옆에 앉았다.
그가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릴 작정이었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세자르 님.”
십여 분쯤 지났을 때였을까.
앨빈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맡을 붙였다.
“지금껏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앨빈이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숨을 들이마시더니 힘겹게 다음 말을 뱉었다.
“이건 제가 쓴 게 맞습니다.”
“···이걸 왜 ‘흑의 기사’가 아닌 네가 썼는지 설명해줄 수 있나?”
‘흑의 기사’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앨빈은 무언가에 찔리기라도 한 듯 고통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흑의 기사, 아니 에드먼드 경은 이미 5년 전에 돌아가셨고···.”
내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임종 직전, 저를 불러다 자신이 못 다한 책임을 대신 이뤄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앨빈의 눈이 어딘가 먼 곳을 향하는 듯하다.
“책임?”
“···자신이 후견을 맡은 ‘소중한 분’을 레핀 공작 각하께 맡겼으니, 그분께 한 달에 한 번씩 안부 편지를 작성하라고 하셨죠.”
앨빈의 목소리가 씁쓸해졌다.
“그 소중한 분이 바로··· 세자르 님, 당신입니다.”
“···.”
그때야 이해가 되었다.
앨빈과 처음 만났을 때, 어째서 그가 귀신을 만난 듯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는지.
“그렇담 앨빈 네가 왜 그런 일을 맡게 된 거지?”
마지막 질문에 소년이 눈을 내리깔았다.
“모든 기사들의 귀감, 왕국의 전설이라 불렸던 ‘흑의 기사’ 에드먼드 세비어 경이···.”
옅은 회한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 조부이시기 때문입니다.”
멸문지화에 이른 세비어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
앨빈이 나를 결연한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