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동맹을 맺는 법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자라니.
심장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고개를 들자 카렌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
“너한텐 처음부터 어쩐지 늘 허술한 모습만 보여줬는데. ···앞으론 더 그럴 것 같아 걱정이네.”
확실하다.
그녀가 던진 단답형 질문에 내가 대답을 했고,
카렌은 ‘이능’을 사용해 내 대답의 진위를 파악한 것.
‘어쩐지 뜨끔한걸.’
지난 기억을 돌이켜봐도 딱히 거짓말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도적길드 후계자가 이런 이능까지 갖고 있다니, 사기 아닌가.
뒤늦게 심장을 진정시키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럼 얼른 들어가자. 지금이 마침 휴식 시간이라 경비가 없거든.”
카렌은 ‘만능열쇠’로 도서관 문을 가볍게 땄다.
내가 감탄하듯 그것을 바라보자 카렌이 피식 웃는다.
“눈빛이 왜 그래, 도적 처음 봐?”
···아니 진짜 도둑이구나 싶어서 말이지.
우리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입장했다.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그녀가 큰소리쳤지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쪽이야.’
카렌을 따라 안쪽의 후미진 복도로 들어가자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표지가 붙은 문이 보였다.
‘여기에 온갖 금서들이 잔뜩 자리해 있지.’
‘···넌 어떻게 그걸 다 아는데?’
카렌의 속삭임에 나 또한 목소리를 낮춰서 묻자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배시시 웃어 보이는 카렌.
허술한 구석이 왕왕 보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도적 길드의 후계자다 이건가.
아까의 그 만능열쇠로 금서구역 문까지 쉽게 딴 그녀는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놀라운 광경인걸.’
금서구역 내부는 일반적인 서고와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바닥부터 천장에 이르기까지 책장 대신 금고로 가득했으니까. 번호가 매겨진 철제 금고 각각에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내 열쇠에 적힌 번호는 41번.
“네가 찾는 건 아마··· 이쯤인 것 같은데.”
카렌이 41번 금고를 찾아냈다. 자물쇠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퉁,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풀렸다.
‘어디.’
금고를 열자 안에는 얄팍한 두께의 책이 들어 있었다. 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서류철에 가깝달까.
나는 그 길로 문제의 서류를 들고 나왔다.
* * *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쥐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가운데,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발닉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곧바로 서류를 펼쳐보았다.
손으로 쓴 거라 알아보기 쉽지 않았지만, 분량이 많지 않은 덕분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서류의 요지는 이거였다.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해 사고사했다고 알려진 이언 왕세자가···.
“사실은 암살을 당한 거라고?”
고 이언 왕세자는 현재의 아홉 살짜리 국왕의 삼촌뻘이다.
왕세자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2왕자가 새로운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2왕자 역시 마차 사고를 당하고 말지.’
이 사고로 2왕자와 어린 딸이 죽음을 당하고, 결국 선왕이 타계한 후 아홉 살짜리 소년이 왕 자리에 오르는 불안정한 정국이 된 것이다.
그것이 원작의 앞부분에 간략하게 등장하는, 왕위 계승 다툼이 생기게 된 배경.
‘요컨대 이언 왕세자의 죽음이야말로, 이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지.’
하지만 원작에도 사고사라고 나왔던 것이 실은 암살이었다니···.
저자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도 이언 왕세자를 지지했던 충신 중 하나가 익명으로 작성한 게 아닐까. 민감한 사항이다 보니 금서구역에 보관돼 있었을 거다.
‘요컨대 이언 왕세자 암살사건 파일이다, 이거지.’
그 사실 자체는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대체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쓸모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잘 기억해두자.’
상황을 봐서 필사본을 만든 뒤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든가 해야겠다.
그나저나 왕세자 암살이라니 떠오르는 이름이 있는데.
‘흑의 기사가 내란에 휘말렸다고 했던가.’
오랜만에 호감도 목록을 불러내자, 과거에 물음표투성이로 나와 있던 부분이 그럴싸한 설명으로 바뀌어 있다.
-‘흑의 기사’ 에드문드 세비어(80점, 형태 ‘죄책감’)
고 이언 왕세자의 최측근으로 ‘전설’로 불리던 존재. 세비어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카렌이 전해준 에드먼드 경의 쪽지와, 공작에게서 받았던 ‘후견인의 편지’도 꺼내보았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두 개의 필체가 아예 다르다.
‘역시 다른 사람이 쓴 게 분명해.’
에드문드 경 본인은 5년 전에 죽었다 하니 ‘세자르’에게 보내진 편지들은 다른 누군가가 대필한 게 분명하다.
전에도 읽은 내용이지만 한 번 더 정독해볼까.
“···.”
그렇게 집중해서 읽은 지 5분 후.
나는 감겨가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뭔 놈의 편지에 수면 마법이라도 걸어놨나, 몇 문장만 읽어도 잠이 쏟아진다.
‘아니, 이놈은 애초에 편지의 기본 원칙을 모르는 놈이라니까.’
-안녕, 세자르. 건강하게 잘 지내니.
상대의 안부를 묻는 건 단 한 줄뿐이고, 그다음엔 온통 본인의 여행 이야기다.
어디에서 어디로 갔는데 뭘 봤고, 거기서 뭘 발견했다. 그다음엔 또 어디로 갔는데···.
‘심지어 만연체야.’
재미도 의미도 없는 글을 개행도 하지 않은 벽돌문단으로 우다다다 써놨다.
이 정도면 거의 6천자는 될 듯한데?
이게 웹상에서 연재됐다면 진작에 ‘하차합니다!’를 외치고 도망쳤을 각이다.
“게다가···.”
본인이 돌아다니며 체험한 것을 써놓은 듯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 말의 진실성이 의심된다.
사마귀처럼 생긴 괴수 맨티스라든가.
눈이 마주친 상대를 돌로 만드는 거대뱀 바실리크스라든가.
전설이나 설화에 나올 법한 존재를 만나 단칼에 끝장냈다는 영웅담은 기본이다.
“···던전도 몇 개씩 클리어했다고?”
대륙에 단 열 개만 존재한다는 던전.
그중 절반을 자신이 직접 공략했으며 거기서 나온 금은보화로 떼부자가 되었다는 거다.
‘아무래도 내 대리후견인은 허언증이 있는 듯한데.’
보기만 해도 졸음이 쏟아지는 문장을 되새기듯 읽던 내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온갖 지방의 민간 설화니 신비한 이야기 따위를 끝도 없이 쏟아내는 고고학 덕후···.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앨빈 밀.’
평소 빵셔틀 취급을 받던 그는 검술대회 때 브렉을 완전히 압도했었다.
브렉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때의 앨빈이 나나 사울, 롯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실력을 펼쳐 보였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알던 안경 소년이 아니라 아예 다른 영혼에 씌인 것 같았지.’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리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흑의 기사 에드문드 세비어 경이 생각나더군.’
앨빈이 입원한 병동을 방문한 그는 자신이 에드문드 경의 검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한때 모든 기사의 귀감이며 전설로 꼽혔던 ‘흑의 기사’가 언젠가 페킹튼 성을 방문해 그의 아버지와 대련한 적이 있었다며.
‘불과 여덟 살이었지만 뭣 모르는 어린애가 보기에도 에드문드 경의 검은··· 이 세상의 경지가 아니었다.’
신출귀몰, 전광석화라는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신기에 가까운 검.
헌데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기묘한 자세를, 경기 중에 앨빈이 취했다는 거다.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말했을 뿐이다.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 신경쓰지 마라.’
앨빈의 검이 흑의 기사와 닮았다는 말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
“앨빈은 분명 자신이 농가 출신의 평민이라고 했는데.”
게다가 세비어 가문은 진작에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머리를 잠시 굴려보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왕세자는 사실 암살당했다.
어쩌면 단순히 음모론으로 치부당할 수 있는 이 정보를,
십분 활용할 계획이 있었다.
* * *
다음 날 나는 카렌을 만나자마자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왕세자의 죽음에 관한 비화.
“어, 그건···.”
생각지도 못했던 규모의 비밀을 알게 된 카렌은 몹시 당황했다. 이런 일은 모를수록 좋다는 걸 다른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나 역시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해서 비밀을 털어놓은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음흉한 속내가 있었는데.
‘카렌이 이 일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한다.’
그런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카렌의 얼굴이 돌연 심각해졌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이건 그냥 순수한 호기심인데··· 이능자를 찾는 목적이 뭐야?”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말과는 달리,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아카데미 학생 카렌이 아닌, 거대 길드를 책임질 후계자로서 던지는 듯한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만일 여기서 카렌을 확실하게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앞으로 나는 세력을 점점 더 키워갈 거다.
다만 그럴수록 남들의 주목을 받고, 팰러스의 견제 또한 심해지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니.
그런 상황에서 유능한 밀정들, 즉 ‘정보대’를 육성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끝없는 암살 시도, 내란과 음모가 끊이지 않던 <왕도의 대가> 후반부는 그야말로 ‘정보전’의 연속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정보대의 대장으로 카렌만큼 적합한 인재도 없지 않을까.’
문제는 어떻게 그녀를 내 가신으로 삼느냐다.
뭣보다 순진한 얼굴과 달리, 카렌은 이능까지 써가며 상대의 본심을 확인하는 능구렁이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저 능력에도 허점은 있다.’
그 점을 되새긴 나는 결론을 내렸다.
···이 허점을 이용해 도박 아닌 도박에 승부를 걸어보기로.
“카렌.”
내 목소리에 카렌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네 질문에 답하기 앞서, 나 역시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
그녀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두 눈은 기대감으로 빛났다.
“나 역시 너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다.”
“···!”
카렌이 두 눈을 껌뻑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떤 능력인데?”
이 와중에도 역시 이능을 사용하는구나.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미래를 아는 능력.”
카렌의 눈이 커졌다.
소설로 읽은 미래 지식.
‘리메이크’ 덕분에 생겨난 상태창과 도전과제-보상 시스템.
흔히 말하는 이능과는 성질이 좀 다르지만, 그 본질을 따지자면 결국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그림자 검객이라는 이능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능력이지.’
그녀의 ‘참과 거짓을 간파하는 이능’의 허점을 노리기 위해, 나는 일부러 ‘이능’이라고 하는 대신 ‘특별한 능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한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진짜구나.”
···카렌의 이능은 이를 ‘진실’이라고 판별할 테니까.
내 말을 의심치 않는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의 넌 아카데미에 다니는 여학생일 뿐이지만, 이곳을 나서는 순간부터 모든 길드원의 안위를 책임지는 지도자가 되겠지.”
아카데미 재학 시절 팰러스를 늘 고까워했으면서도, 원작에서 결국 그녀는 팰러스의 밑으로 들어간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을지 고민해보았는데, 생각 외로 답은 간단했다.
‘제아무리 뒷골목의 제왕이라 한들, 아니 하층민들의 목숨줄을 쥔 만큼···.’
권력에 아부해야만, 정권의 개가 되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의 개인적 신념보다도,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생존이 카렌에게는 우선과제였을 터다.
“그런 만큼 당연히 현 시점에서 가장 힘 있는 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 테고.”
“···그 자식이 설령 엄청나게 밥맛 없는 놈이라고 해도 말이지.”
“밥맛 없는 놈 말고, 썩 나쁘지 않은 놈과 손을 잡는 건 어때?”
“무슨 말이야?”
“아까 네가 질문했지. 이능자를 찾는 이유가 뭐냐고. 그건··· 공작과 약속했기 때문이다.”
카렌은 가만히 내 말을 기다렸다.
“내가 이능자 다섯 명을 찾아 가신으로 삼으면, 레핀 가문의 적자로 삼겠다고.”
“···!”
“내게 ‘미래시未來視’가 있는 만큼 시간이 좀 걸린다 해도 그건 언젠가 기정사실이 될 거야.”
그 말에 카렌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는 아마도 보잘 것 없는 사생아 세자르가 아닌, 레핀 가문의 적자로서 활약할 ‘세자르 공자’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제안하고 싶다, 카렌.”
카렌과 두 눈을 맞춘 채 진지하게 말했다.
“나와 군신 관계를, 아니···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는 게 어때.”
카렌의 눈동자가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