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약사에게 열쇠는 도적에게
‘출생의 비밀을··· 지금 이렇게 알려준다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단서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더 자세히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마지막 경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시상식이 거행되었으니까.
“앨빈이 이걸 못 봐서 아쉽네.”
카렌의 말에 리암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장 한가운데에 금세 연단이 설치되더니, 학장이 그 위에 올랐다.
지루한 연설이 잠시 이어지고 나서 본격적인 시상에 들어갔다.
“준우승팀 ‘왕국수호청년단’의 대표선수는 앞으로!”
웅성웅성.
관중의 시선 속에서 한 명의 선수가 앞으로 나섰다.
브렉이 나오려나 했지만 아니었다.
영 못 마땅한 표정의 사울이 앞으로 나서서 상을 받고 들어갔다.
“우승팀 ‘우리는 애매한 사이단’ 대표 선수, 앞으로 나오도록.”
카렌과 리암이 나에게 눈짓했다.
나는 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연단 위로 올라갔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단원이 네 명뿐이래···.”
“급조한 단체로 검술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고?”
“검에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안경 병신도 의외로 활약했잖아.”
호기심, 선망, 부러움, 질시가 한데 섞인 눈빛.
아카데미에 들어올 적만 해도 ‘공작가의 수치’라 불리던 세자르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음이 느껴진다.
“우승을 축하하네, 세자르 군.”
“감사합니다.”
학장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우승자의 특전을 설명했다.
“다들 알다시피 대표선수 세 명은 각자 상금 5만 크로네를 받으며.”
그 말에 관중석에서 와 하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한테 5만 크로네는 대수롭잖은 금액이지만 평민층에게는 엄청난 돈이니까.
“우애단 학생들은 원하는 공간을 활동실로 배정받을 수 있으며, 올 가을 왕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받는다.”
그 말에 학생들의 환호성이 한층 커졌다.
저 아래 우애단 녀석들이 몹시 뿌듯한 얼굴로 실실거리는 게 보인다.
학장이 내게 작은 보석함을 건네며 덧붙였다.
“그리고 올해는 특별히 ‘지혜의 반지’라는 부상이 있다.”
초록색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라고는 해도, 값어치 자체는 대단하지 않은 일종의 기념품이다.
다만 이게 고대 유물의 단서가 될 줄은 이 시점에는 아무도 몰랐으니 말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말이지.’
“다시 한 번 축하하네, 세자르 군. 소감 한 마디 하겠나?”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박수 갈채를 받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애매한 사이단의 단장, 세자르입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셔서 말씀드리는데, 우애단은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친목 모임이 아닙니다.”
“···세자르 군?”
“어디까지나 ‘애매한 사이’의 학생들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인 단체입니다. ···말하자면 ‘이익단체’인 셈이죠.”
힘 주어 말하자 어쩐지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현재는 신규 가입자를 받지 않고 있지만, 단체 규정이 정비되는 대로 정식 모집을 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만.”
“···그, 그래.”
헛기침을 하는 학장을 뒤로 하고 나는 미련없이 연단을 내려왔다.
위에 올라가 저런 얘기를 한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시상식 연단에 오르기 직전 카렌이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우애단 가입 문의가 쇄도한 거 알아?’
마지막 시합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이 그녀에게 몰려왔단다.
가입 기간이나 조건이 어떻게 되냐.
활동 내용이 뭐냐, 그냥 그냥 친목을 위해 들어가도 되냐는 등 온갖 질문 공세에 시달렸단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검술시합으로 홍보까지 한 셈이군.’
덕분에 쓸 만한 놈들이 들어오면 겸사겸사 좋지 않겠나.
시상식이 파한 후, 우애단 단원들과 함께 앉아 있던 선수 대기석에 반가운 얼굴들이 다가왔다.
“도련님, 축하드립니다.”
“주군!”
[옹옹!]
발닉과 디터, 그리고 디터의 품에 안긴 농농이.
“농농아!”
농농이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이는 카렌.
그래도 얼굴을 한 번 본 덕인지 우애단 단원들과 내 식솔들이 제법 친근하게 인사를 나눴다.
“이야, 도련님 그새 또 실력이 일취월장하셨던데요. 이거 이러다 이 발닉이 너무 뒤처질까 봐 걱정됩니다.”
“걱정되면 수련을 하든가.”
“주군, 안 그래도 열심히 하는 중입니다.”
디터는 환하게 웃는 낯으로 발닉과 함께 수련에 매진하는 중이라 했다. 좀 있으면 군사학부 시험을 치를 거라는 말에, 우애단 단원들이 덕담을 건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는데,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세자르 군의 호위기사들인가 봐.”
“저기 아기도 있는데. 누구 아이일까?”
“다들 사이가 엄청 좋아 보이네···.”
“어머, 이쪽 본다!”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 -아니 사내 놈도 몇 섞여 있긴 하지만- 이 우리 근처에서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중이다.
영문을 몰라 미간을 좁히자, 그중 한 명이 쭈뼛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거···.”
“···?”
“그, 그··· 앞으로도 힘내세요! 그럼 이만!”
무언가 잔뜩 든 주머니를 건네더니, 터질 것처럼 새빨간 얼굴로 달아나는 소녀.
소녀가 되돌아가자 아까 그 무리가 내 눈치를 살피며 꺅꺅대더니, 저 멀리 가버린다.
대체 뭐지 싶어 주머니를 살펴보자, 형형색색의 고운 종이로 포장해놓은 선물이 잔뜩 들어 있다.
“···.”
“뭡니까, 그건? 야, 다들 한창 때다 이건가.”
“주군, 대단하십니다.”
저희들끼리 희희낙락하는 발닉과 디터.
특히나 발닉은 두 눈을 음흉하게 빛내며 껄껄 웃었다.
“도련님이 그 날카로운 검으로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셨군요.”
“그만.”
이것들이 은근 놀리는 것 같단 말이야, 생각하는데 그때껏 아무 말도 안 하던 리암이 입을 열었다.
“너··· 이러다 후원자 모임도 금방 생기겠군.”
“후원자 모임?”
되묻는 말에 카렌이 대답했다.
“검술대회나 각종 경기에서 선수를 응원하는 레이디들을 가리키는 말이야. 전투에 나서기 전, 귀부인이 사랑하는 기사의 창에 손수건을 걸어줬다는 풍습에서 유래한 문화이지.”
“뭐, 꼭 레이디가 아닌 경우도 있긴 하지만···.”
카렌과 리암의 말을 들어보니 이곳에도 팬클럽 비스무레한 게 있나 보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어깨를 으쓱하는데.
리암이 작게 혼잣말하는 것이 들렸다.
“···좋겠군···.”
“부러워하지 마, 리암. 너도 네 매력을 알아봐주는 후원자가 곧 나타날 거야.”
카렌이 어깨를 툭 치며 응원의 말을 건네자, 리암의 귀가 또 새빨개진다. ···단순하기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일단 귀가하자고.”
새로이 주어진 ‘보상’을 확인할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 * *
세자르 무리가 축제 분위기에 잔뜩 들떠 있던 것과는 달리, 팰러스단은 거의 장례식장 분위기였다.
간부들 사정을 잘 모르는 1학년생들까지도 그것을 명백히 느낄 정도였으니.
“우리 팰러스단이··· ‘그’ 우애단한테 졌다고?”
“쉬잇!”
누군가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질문을 던지자 나머지 단원들이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뭣 모르는 하급생들마저 간부진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깨달은 우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나가봐라.”
그 말에 안도하며 하급생들이 나간 뒤.
우만과 브렉, 타릭은 무거운 마음으로 간부실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뒤편에 앉은 팰러스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브렉.”
제 이름이 불리자 브렉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는 평소 검술대회에 나가지 않는다. ···너도 그건 알고 있겠지?”
“네, 그, 그거야···.”
뭐라 변명을 하려던 브렉은 우만의 눈짓에 입을 합 다물었다.
···여기서 더 말을 하면 할수록 팰러스의 분노를 키울 뿐임을 너무도 잘 아니까.
톡, 톡, 톡.
팰러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나무 책상을 두드렸다.
그의 손등이 책상 표면에 부딪힐 때마다 브렉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굳이 나간다는 너를 말리지 않은 것은···.”
책상을 두드리던 팰러스의 손이 멈췄다.
“팰러스단의 우승을 기정사실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브렉은 오히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팰러스는 분노하면 할수록, 표정과 목소리에서 감정이 사라지는 사람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내 관심사는 너와 네 수하들이 내 동생에게 과연 어떤 가르침을 주느냐였는데.”
금발의 미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번 일은 너무도 예상 밖이라 어떤 말을 해야 할지조차 모르겠구나, 브렉.”
“죄, 죄송합니다 팰러스 님. 모든 건 제 불찰-”
“그거야 당연한 거고.”
그의 무감정한 눈빛이 브렉의 전신을 훑었다.
“브렉. 너는 이미 나의 신뢰를 잃었다.”
“···패, 팰러스 님! 이번 일은-”
“널 향한 나의 애정마저 사라지지 않도록···.”
브렉을 담던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스스로 답을 찾아보도록.”
팰러스는 브렉을 쳐다보지조차 않은 채 나가라 손짓했다.
우만과 타릭이 먼저 나섰고, 브렉 또한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힘겹게 뗐다.
간부실을 나와 등 뒤로 문을 닫은 브렉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세자르 놈.
자신에게 예상치 못한 모욕을 안겨준 놈에게, 브렉은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앙심을 품었다.
* * *
그날 저녁.
기숙사에서 휴식을 취한 뒤 나는 보상으로 받은 열쇠를 살펴보았다.
‘아무런 설명도 안 뜨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금속 재질의 열쇠다. 문제는 이 열쇠로 무엇을 열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건데.
그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거야 전문가가 있잖아?’
왕국 최대 도적길드의 후계자 카렌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열쇠는 도적에게!
그리하여 믿을 만한 전문가 카렌을 찾아가 열쇠를 보여준 결과.
“지금부터 우린 범법 행위를 할 거야.”
한밤중에 그녀와 단둘이 아카데미 캠퍼스 한가운데에 자리한 왕립도서관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왜냐 묻는다면.
‘이거 척 봐도 도서관 금서구역의 열쇠네.’
소수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으며, 학생들에게는 엄금된 금서들이 잔뜩 소장돼 있다는 금서구역의 열쇠란다.
“범법 행위에 협조해줘서 고마워.”
“고맙긴 뭘.”
그게 뭐 대수냐는 듯한 반응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이런 게 어디서 났는지는 안 물어봐?”
“왜, 물어봤음 좋겠어?”
“그건 아닌데.”
카렌은 실없긴, 하고 중얼거리더니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도적의 금언 중 이런 게 있지. ···고객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것 참 맘에 드는 금언이네.
“나 지금 고객 된 거야?”
“뭐야, 설마 돈도 안 내고 의뢰를 맡기려 한 건 아니지?”
그 능청스러운 대답에 픽 웃음이 나왔다.
그때, 카렌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너야말로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뭘?”
뭔가를 떠보듯 내 얼굴을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내가 후작가 출신이 아닌 거 알고 있잖아. ···피닉스 클럽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아니었어?”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본인이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혹시 신분을 위조해서 이 학교에 입학한 건가. 그런 거라면 불안해할 만도 하다.
“사실 불안했어. 네가 어디 가서 얘기할 만한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중요한가?”
내 말에 카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가 진짜 후작가의 딸이든 아니든. 나한테는 아무 차이도, 의미도 없어.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입학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네가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거지.”
“···.”
“게다가 잊었나 본데.”
그건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애초 이 세계 사람이 아닌, 현대에서 건너온 내게는 신분 차이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뿐더러.
“일단 나부터가 사창가 출신인데 내가 누구더러 신분을 갖고 뭐라 하겠어.”
“···.”
카렌은 한참이나 눈을 껌벅거리더니 개미소리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뭔가 좀 어색한 기분이 들려던 순간.
[‘카렌’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50을 기록해 ‘카렌’의 이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고 보기에 카렌은 평소처럼 무표정이긴 하지만.
그녀의 호감도창을 곧바로 확인하려던 순간,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나도 너한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잇는다.
“네가 애들한테 던지게 하는 주사위 말이야.”
왠지 올 게 왔다, 라는 느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그거··· ‘이능’을 지녔는지 확인하는 거 맞아?”
“···.”
“이능자는 4가 나오고, 아닌 사람은 1. 그 외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2나 3이 나온다든가···.”
카렌의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떡하지.’
진실을 말하는 게 나을까, 거짓을 말하는 게 나을까.
거짓말을 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잡아떼면 그만이니까.
오히려 진실을 말할 경우 일이 더 복잡해질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주사위를 갖고 있는지, 왜 그걸 학생들에게 던지게 하는지 설명해야 할 수 있으니.
‘하지만.’
자신이 후작가 출신이 아님을 밝히던 카렌의 얼굴이 떠올랐다.
더불어 ‘이능자는 4가 나온다’고 말함으로써 자신 역시 이능자임을 간접적으로 고백한 것 아닌가.
‘카렌은 이미 자신의 패를 두 가지나 보여주었다.’
처음만 해도 두 가지를 이성적으로 저울질하던 나는-
충동적으로 대답해버렸다.
“맞아.”
어쨌거나 한낱 대답이 아닌가.
그것을 신뢰할지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카렌의 몫이니까.
그러자 카렌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말을 어떻게 믿고.’
그렇게 생각하며 뒤늦게 그녀의 호감도창을 확인하자.
???로만 나오던 카렌의 이능명이 공개되었다.
『아카데미 학생 카렌(호감도 50점)』
- 이능자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자’
- 설명 : 질문해서 대답을 들으면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 발동조건 :
1. 상대에게 단답형 질문을 던질 것.
2. 1분 안에 대답을 들을 것.
“···!”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카렌이 활짝 웃는다.
혹시라도 거짓을 말했더라면, 하고 생각하자 뒤늦게 소름이 쫙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