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 가도 서울로 가는 법
무너질 것 같은 앨빈은 어느새 벌떡 일어나 있었다.
늘 헤프게 웃던 얼굴이 싸늘하게 굳은 가운데, 어설프게 잡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옮겨쥐었다.
“하, 꼴에 근성은 좀 있나 보지? 손을 바꿔봤자 아무 소용 없을 텐데···.”
브렉이 조소하던 순간.
부웅-!
앨빈의 검이 그의 눈앞을 갈랐다.
“···!”
새파랗게 질린 브렉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렌이 속삭였다.
“앨빈의 움직임이 변했어.”
아니. 움직임만 변한 게 아니었다.
표정부터 눈빛까지 싹 가라앉은 것이 아예 딴 사람 같았다.
···마치 다른 인격이 들어온 것처럼.
부웅!
또다시 날카롭게 찔러들어오는 앨빈의 검을, 브렉이 힘겹게 막아냈다.
“이런 씨발!”
챙! 챙강!
방금 전만 해도 일방적인 구타에 가깝던 상황이 돌변했다.
앨빈이 찌르면 브렉이 막아내는 것으로.
브렉은 처음만 해도 제법 막아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버거워 보였다.
어느새 한참 뒤로 밀려버린 그를 앨빈의 검이 쉴 틈 없이 압도해왔다.
그 상황 자체도 놀라웠지만, 내가 놀란 부분은 다른 쪽이었다.
‘저건 대체.’
앨빈의 자세가 무척 독특했다.
왼손에 든 검으로 브렉의 약점을 노리는 가운데, 오른팔은 허공에서 둥글게 말고 있다.
<쾌걸 조로> 같은 무성영화 검투 장면에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자세가 아닌가, 생각하는데.
“흑의 기사.”
“···!”
리암의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단어가 흘러나왔다.
“흑의 기사로 불렸던 에드먼드 경의 검이 꼭 저랬는데.”
흑의 기사··· 에드먼드 경?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라고 자문하던 순간.
부웅!
챙! 챙캉챙캉!
앨빈이 아까보다 더 강력하게 브렉을 몰아붙였다.
흡사 전광석화 같다.
은회색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 은빛의 잔상이 남는 가운데.
“흐악!”
브렉이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발을 헛디뎠다.
···앨빈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부웅! 슈우우웅!
1미터에 불과한 검신이 몇 미터로 늘어나는 듯한 시각적 착각과 함께-
훤히 드러난 브렉의 목을 노리고 들었고.
“안 돼!”
브렉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기이한 기운.
‘설마, 이능을 사용한 건가?’
···비겁한 자식.
‘잠재우는 자’라는 이름답게 그의 손동작이 끝나자마자 앨빈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지만.
검을 쥔 손만큼은 힘이 빠지지 않았다.
놈의 코앞까지 날아든 검이 기어코 푸욱! 하고 브렉의 목을 찔렀다.
“우욱!”
그와 동시에 털썩! 하며 앨빈이 기절해버렸다. 진행요원들이 들것을 가지고 와 앨빈을 싣고 나갔다.
“내가 가볼게.”
걱정스러운 기색의 카렌이 그쪽으로 달려가는 한편, 관중석에선 대체 누가 이긴 거냐며 웅성거렸다.
심판이 손을 들었다.
“시합 종료! 앨빈 밀 승리!”
아주 잠시간의 침묵 후.
우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 속에서 경기가 종료되었다.
“3분이 지났어, 세자르.”
가슴을 쓸어내린 리암이 나를 돌아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나가서 싹 쓸어버리고 와라.”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일어섰다.
···연유가 무엇이든 간에 앨빈이 승리를 가져다준 만큼, 반드시 이번 시합을 이겨야 한다.
* * *
사교계에 그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검 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주목받기 시작한 사울과 달리.
‘롯 카디움’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복병에 가까웠다.
롯은 애초 귀족도 아니다.
대부분 흰 피부에 총천연색의 눈을 지닌 토박이 왕국민과는 달리, 가무잡잡한 피부에서부터 이국적인 인상을 풍기는 이민족.
무예를 숭상하는 그녀의 부족은 왕국의 개척전쟁에 패배했고, 이에 롯 또한 전쟁 노예가 되었다.
‘저기 저 계집이 꽤 쓸만해 보이는걸.’
브렉이 제 아버지를 따라 원정갔던 곳에서 데려온 전쟁 노예가 바로 그녀였다.
‘검술 실력만 따지면 사울보다 강할 것 같단 말이지.’
어릴 적부터 검술을 ‘배워서’ 익힌 이들과 달리,
그녀의 검은 본능 혹은 척수반사에 가까웠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검이랄까.
브렉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 덕분에 롯은 헬리오스 백작가의 사병이 되었다. 이제는 아예 ‘브렉 도련님’을 따라 아카데미 군사학부에 입학해 그를 호위하고 있는 참이었으니.
‘그런 만큼 이번 기회에서 내 가치를 입증해 보여야 한다.’
능력 있는 자에겐 관대하지만, 실패하는 자에겐 가차없는 브렉 도련님이다.
그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롯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평소 실력의 절반도 내보이지 않던 예전과는 달리, 세자르와의 싸움에선 가진 것을 전부 내보였다.
하지만.
‘기이한 상대다.’
상대는 여태껏 본 적 없는 검술을 구사했다.
그녀가 속한 부족의 검술은 말할 것도 없고, 왕국 전통검법이나 이국에 뿌리를 둔 검술과도 달랐다.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움직임 때문일까.
롯은 평소보다 좀 더 긴장한 채 전투에 임했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체력을 소비하고 말았다.
‘시간 종료! 양 선수 모두 휴식을 취한다!’
있는지도 몰랐던 규정 덕분에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겨우 3분간의 휴식이다.
거칠어졌던 호흡이 돌아오는 데는 충분할지 몰라도, 컨디션을 완전히 되찾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챙강! 캉!
처음 전투에 접할 때보다 도리어 강력해진 세자르의 검격을 받으며, 롯은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이자는 왜 이리 팔팔해 보이지.’
아까 전만 해도 전신에서 비 오듯 땀을 흘렸던 세자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눈 아래가 시커멓고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지금은 외려 푹 자고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개운해 보이지 않는가.’
그 사실에 당황했기 때문일까.
순간 방심한 나머지 빈틈을 노출하고 말았고.
부웅!
세자르의 검이 곧바로 그곳을 노리고 들어왔다.
“흐읏!”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둔중해지는 몸.
롯은 아까보다 날카로워진 공격을 간신히 피해내는 것이 한계였다.
‘말도 안 돼.’
챙! 챙강!
두 검 사이에선 여전히 불꽃이 튀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접전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이미 승패를 점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질 것이 분명하다.’
실력이 비슷한 사이에서 체력의 차이가 비정상적으로 난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뻔하지 않은가.
그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비겁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수를 쓰기로.
‘애초 나는 기사도 아니며, 명예나 긍지 따위는 없다.’
자신은 그저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꼴사나운 노예가 아니던가.
노예가 명령을 어길 때에 돌아올 무시무시한 처벌.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어든 할 수 있다고 롯은 자신을 정당화했다.
‘남들이 모르게만 한다면 상관없다.’
자신이 언젠가 ‘그 힘’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팰러스는 분명 그렇게 답했었으니까.
* * *
카앙! 캉!
그녀와 검을 부딪칠 때마다 그 강력한 충격에 손목이 부르르 떨려왔다.
‘어마어마한 힘이군.’
저 사슴처럼 날씬한 몸 어디서 저런 괴력이 나오는 걸까.
그러면서도 단 한 번의 빈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움직임은, 흡사 전투가 생활화된 한 마리의 맹수처럼 보였다.
생각하지도, 계산하지도 않는-
오로지 본능에 따른 공격.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따지면 나보다 강하다.’
아무런 변수도 없이 단둘이서 계속 싸웠다면 필시 그녀가 이겼을 터다.
하지만 내게는-
‘쾌유환이 있었으니!’
체력과 기력이 완전히 회복된다는 설명을 보긴 했지만, 그것을 몸소 체험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냥 힘이 나거나 피로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몸 전체가 새로이 태어나는 감각을 방불케 한달까.
‘스무 시간은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기분이군.’
그 사실을 상대 또한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 자신의 움직임은 시간이 흐를수록 둔해지는 반면, 나는 여전히 팔팔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그 사실에 잠시 당황했는지 노출한 빈틈을-
‘지금이다!’
나는 놓치지 않았고.
캉! 챙캉!
롯은 그 사이로 찌르고 들어간 내 검을 간신히 막아냈다.
‘역시 대단하군.’
그 동물적인 반사신경은 감탄할 만했지만, 그녀는 이제 슬슬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이제 내가 할 것은 상대를 서서히 더 몰아붙이며 자멸의 길에 빠져들게 하는 것뿐.
챙강! 챙강!
몇 합을 더 부딪치는 동안 롯 또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돌연 눈빛이 변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기운은-!’
방금 전, 브렉이 앨빈에게 기이한 힘을 써서 기절시켰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다.
즉, 롯 또한 이능자이며 내게 이능을 행사하려고 한다는 건데.
‘롯 카디움, 롯 카디움이라···.’
그 순간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다.
‘포박의 밧줄을 부리는 자 사일롯’.
원작에선 중반 이후에 가서 잠깐 나오는 비중 없는 캐릭터로, 팰러스 쪽도 아니고 중립 노선에 속한 이능자다.
‘이민족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는, 미지의 검객이라는 설정이었지.’
그때 눈앞에 선 롯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민족 출신.
미지의 검객. 어쩌면···.
‘여기 있는 이 롯이 남자 행세를 한 걸까?’
만일 롯의 능력이 ‘포박의 밧줄’이 맞다면-
나는 내게 닥쳐오는 그 ‘기이한 힘’의 흐름을 느끼며 나의 이능을 발동시켰다.
‘그림자 보법!’
제 아무리 포박하는 힘이라 해도, 밧줄 또한 그림자를 지니게 마련이니.
무언가가 내 두 발을 덜컥 하고 붙잡은 순간.
의미심장한 눈빛을 한 롯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보법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우우웅-
머릿속을 울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시야가 일순 새카매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순간이동했다.’
“마, 말도 안 돼···.”
경악의 신음을 내뱉는 롯의 코앞에서,
나는 검을 부드럽게 휘둘렀고.
챙강!
온 힘을 실은 일격에 그녀의 검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챙그랑! 하고 경기장 바닥에 떨어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몰라, 엄청나게 빨리 움직인···.”
말하자면 ‘그림자 범위 내의 순간이동’이지만, 끽해야 한 뼘 정도 이동했을 뿐이니 눈치챌 수 없는 상황.
나는 가만히 서서 심판의 판정을 기다렸다.
“레핀 가문의 세자르 승리!”
“세자르! 세자르가 이겼다!”
군중의 환호성이 경기장을 울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란 함성이 고막을 얼얼하게 하는 가운데, 그간의 긴장이 갑자기 풀린 탓일까.
피로감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온몸이 쑤시네.’
저 멀리서 리암이 날 향해 걸어온다.
그쪽으로 가려는데 롯이 날 붙잡았다.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생각보다 차분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리자,
그녀는 결과를 도무지 못 믿겠다는 듯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한 거냐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롯은 제 눈을 도무지 못 믿겠다는 허망한 얼굴이다.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의문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비겁한 거 아니고?”
“네? 그, 그게 무슨-”
“이능.”
내가 소리 죽여 말한 단어에 롯이 입을 합 다물었다.
“포박의 이능을 썼지, 안 그래?”
“···!”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부, 부탁이에요. 이 얘긴 누구에게도-”
“아무에게도 알릴 생각 없어.”
“···.”
“그러니 우리는 우승, 그쪽은 준우승으로 기분 좋게 끝내자고.”
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그녀의 곁을 지나치는데, 롯이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정정당당하게 겨루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상관없어.”
나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렇게 멀어지는데, 등 뒤로 롯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당신은 대체···.”
정말로 미안할 것 없다니까 되게 미안해하네.
사실 나도 그닥 떳떳할 게 없거든.
‘그렇지만 뭐 어때?’
우리 옛 조상들도 이런 말씀을 남기지 않으셨던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그러니까 나는 모로 가도 검술대회 우승만 하면, 아니 우승 특전 중 하나인 사파이어 반지만 손에 넣으면 된다, 이 말이다.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반지이지만, 사실은 고대 유물을 보관하는 장소의 열쇠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그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원작에도 나오지 않았으니 그걸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할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경기장을 벗어난 순간.
[도전과제 ‘들킬까 봐 두근두근했음’ 달성! -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능을 사용했습니다.]
[보상 ‘출생의 비밀에 관한 열쇠’를 수령했습니다.]
···출생의 비밀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