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43화 (43/176)

비장의 무기를 받았으니까

검술대회 대진표 작성은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었다.

잘 마무리됐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고.

‘빌어먹을! 앨빈, 앨빈 이 자식 어딨어!’

울릭은 자신이 ‘우애단’의 연극에 껌벅 속아넘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앨빈이 황태단에서 탈퇴할 것임을 알리자 놈은 분을 주체 못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너, 너··· 검술대회에서 보자! 내가 네 놈을 제대로 밟아주고 말겠어!’

그렇게 앙심을 품은 것까진 좋았는데.

“울릭 단장님이 꽤 속이 쓰리겠네요.”

앨빈의 말에 다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단의 대진운이 몹시 안 좋았으니까.

‘운이 없어도 더럽게 없지.’

황태단은 실력만 따지자면 3위권 안에 드는 강팀이다. 원작에서는 대진운이 잘 따른 덕분에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단장 울릭이 나와 맞붙는 바람에 14위로 예선을 통과한 데다 1회전부터 상당한 강팀과 맞붙게 생겼다.

게다가.

“이대로라면 8강에서 팰러스단과 붙겠는데?”

카렌의 말마따나 팰러스단 또한 검술대회에 참가한다고 들었다.

‘원작에서는 참가 안 했는데.’

이 또한 나로 인해 생긴 변화인 듯하다.

처음만 해도 ‘팰러스의 트라이던트’라고 불리는 우만, 브렉, 타릭이 모두 참가하는 줄 알고 무척 긴장했지만.

카렌이 고급 정보를 알려줬다.

“브렉이 자진해서 참가했다는데? 본인이 제일 아끼는 후배들을 데리고.”

팰러스 본인이 직접 움직인 건 아닌가 보다.

브렉은 원작에도 상당한 검객으로 나오는 만큼, 이번 참가자들 중 제일 강력한 경계 대상일 테고.

“그 후배라는 놈들 이름이 뭐야?”

“군사학부의 사울과 롯.”

기억에 없는 걸 보면 비중 없는 엑스트라 같으니 그나마 좀 해볼만 하지 않을까.

‘울릭 놈, 나랑 엄청 붙고 싶어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으니 분해서 죽으려 하겠는데.’

뭐 그래 봤자 어차피 나한테 발리겠지만.

“그거야 그렇고, 우리랑 붙을 놈들 얘기 좀 해보자고.”

1회전은 부전승이고, 2회전인 8강에서 만나는 게 우리의 첫 상대가 될 텐데.

“아마 8강전 상대는 명태단이 될 거야.”

명태단과 1회전에서 붙는 팀의 전력 차가 너무 심해서 다들 명태단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고 덧붙이는 카렌.

그러자 리암이 명태단 선수들과 검술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있다며 그 셋의 강점과 약점을 세세히 설명했다.

“그래서 네가 그놈들 이겨, 못 이겨?”

내 질문에 리암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이기지.”

“그럼 됐어.”

리암의 말로 미루어보면 명태단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닐 듯하고.

“카렌, 네가 보기엔 4강전 상대가 누가 될 것 같나?”

카렌이 대진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속단하긴 이르지만, 예선을 4위로 통과한 ‘윈저단’이 되지 않을까? 물론 예선 실력은 본 실력과는 다르다는 게 정설이긴 하지만···.”

공식명칭은 따로 있지만 다들 ‘윈저단’이라 부른단다.

왜냐면 이 단체는 오로지 윈저 가문 출신들만 소속돼 있으며, 평소에는 아무 활동도 하지 않다가 검술대회 때만 참가하기 때문.

‘윈저 가문은 원작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가문이지.’

윈저 가문은 전통 있는 명문 무가다.

다만 수도 주변에 자리한 페킹튼, 드컨 등의 가문과는 달리, 험준한 북부를 거점으로 삼으며 ‘국경 수비대’를 지휘하는 가문이다.

일종의 지방 호족 같은 느낌이랄까.

가문 구성원 전원이 무예에 능하며,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늘 유지해왔다.

“작년에 아깝게 우승을 놓친 만큼, 올해는 더 필사적일 거야. 그리고 이번에 참가한 선수들은···.”

윈저 백작의 둘째 아들, 막내딸, 조카.

이렇게 세 명이라고.

“검술 실력 자체는 너희 둘보다 아래일지 모르겠지만, 셋 다 괴물 같은 체력의 소유자야.”

험난한 북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체력 훈련을 받는단다.

“4강전에선 체력을 잘 안배해야겠군.”

선봉, 중견, 대장을 누구로 정하느냐도 중요하다. 아마 이때부터가 전술이 중요해지는 시점이 될 거다.

나는 리암과 앨빈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훈련하러 가볼까?”

리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앨빈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 * *

검술대회 본선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시합이 쉴새없이 이어졌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받은 것은 ‘우리는 애매한 사이단’, 즉 우애단의 첫 경기였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우애단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세자르’가 만든 학생단이기 때문에.

둘째, 그 우애단이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예선 1위를 차지한 것도 모자라···.

“16강을 부전승으로 올라왔다고 했나?”

우만의 말에 타릭은 고개만 끄덕였다.

덕분에 이 8강 시합은 우애단의 첫 경기였다.

“···놈이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던데.”

“놈이라니, 누구 말하는 거야?”

브렉의 말에 우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브렉, 두뇌가 있으면 좀 생각을 해보는 게 어때?”

“그러니까··· 세자르 놈 얘기라는 거지?”

우만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고, 그 둘을 바라보던 타릭은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브렉이 투덜대며 중얼거렸다.

“우만 저 새끼는 그냥 얘기 좀 해주면 어디 덧나나.”

팰러스 님 계실 때랑 안 계실 때랑 달라도 너무 다르단 말이야.

그의 혼잣말은 군중의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와아아!!

휘이익!!

경기장에 들어오는 선수들을 향해 관중석에서 환호를 보냈다. 관중석에 앉은 것은 대부분이 아카데미 학생들이지만, 근처 주민들이나 아카데미 관계자도 제법 자리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환영의 의미를, 누군가에게는 비웃음의 의미를 담은 휘파람 소리도 들려왔다.

“열기가 어마어마하군.”

우만의 말에 타릭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평민 놈들이 즐길만 한 게 이런 유희밖에 없잖아? 지들이 직접 못 죽이니까 남들이 죽이고 죽는 걸 보면서라도 대리만족하는 거지.”

“타릭. 검술대회에선 진검을 쓰지 않는다.”

“나도 알아, 누가 뭐래? 여기야 코흘리개들끼리 겨루는 거니 어쩔 수 없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피 보는 게 당연한 일 아냐?”

“···미친 새끼.”

브렉이 진절머리난다는 듯 고개를 젓자, 우만이 한마디했다.

“딴소리 말고 경기에나 집중해. 세자르의 검술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니.”

“하, 우리가 저 사생아 놈의 전력까지 파악해야 해? 난 왼손만으로도 저놈 정도는 얼마든지-”

“브렉.”

우만의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브렉이 입을 합 다물었다.

“목적이 뭔지 잊지 마라. 이번 대회에 나가겠다고 네가 자진해서 나선 거잖아. ···기왕 그렇게 나섰다면, 팰러스 님께 무결하고도 완벽한 승리를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나.”

그 엄숙한 어조에 타릭은 웃음을 터뜨렸다.

“넌 뭐, 팰러스교 신자냐?”

“···타릭.”

“아, 알았으니까 잔소리 좀 하지 말라고.”

타릭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난 지금 당장이라도 저 새끼 목덜미를 꺾어버리고 싶어 죽겠으니까.”

그의 눈길이 경기장 한가운데에 당당히 서 있는 호리호리한 소년, 세자르에게 향했다.

“경기 시작!”

심판의 구호가 떨어지자마자 세자르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뻣뻣하게 얼어붙은 채 놓칠세라 검을 꽉 쥐고 있는 상대와는 달리, 세자르의 움직임은 여유롭고 부드러웠다.

동작 하나 하나가 끊김없이 물 흐르듯 이어졌고.

일정한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두 발은 흡사 댄스 스텝을 밟는 듯하다.

“···제법이네.”

세자르의 모습에 집중한 타릭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과연, 팰러스가 견제할 만하다.’

팰러스는 늘 그랬다.

탐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제 손에 넣어야 하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반드시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니.’

언제나 가면처럼 완벽한 팰러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것을, 타릭은 처음 본 터였다.

저 멀리 관중석에서 두 개의 검이 맞붙을 때마다 강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챙! 챙강!

처음만 해도 제법 호각세처럼 보였지만, 채 1분도 되지 않아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대다수 관중이 어느새 입을 모아 하나의 이름을 연호했다.

“세자르!”

“세자르!”

“레핀 가문의 세자르!”

검을 모르는 입장에서도 두 선수의 실력 차이는 확연했다.

레핀 가문의 수치라 불리던 세자르는, 상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압도했고-

챙그르르!

사나운 금속성과 함께 상대 선수의 검을 날려버렸다.

경기장 구석에 검이 꽂힌 동시에 심판이 경기 종료를 선언했다.

“1회전, 세자르 승!”

처음만 해도 세자르 따위는 한입거리도 안 된다며 무시하는 발언을 하던 브렉이 말이 없어졌다.

“···.”

“봐라, 브렉. 세자르는 네 생각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우만의 말을 되풀이하기라도 하듯 타릭이 느리게 중얼거렸다.

“그래. 절대··· 만만하지 않지.”

세자르의 모습이 경기장 밖으로 멀어졌다.

타릭은 그 뒷모습을 비릿한 눈길로 바라보며 제 입술을 혀로 훔쳤다.

“데리고 놀 만하겠는걸.”

한번에 부숴버리기보다는 조금씩 망가뜨리는 쪽이 더 재밌거든.

타릭의 혼잣말에 브렉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친 새끼.”

* * *

첫 번째 대결은 우애단의 완벽한 승리였다.

“우애단의 승리가 아니라 네 승리이지, 세자르.”

리암은 조금 불만 있는 기색이었다.

왜냐, 내가 선봉으로 나가서 세 명을 다 이겨버렸거든.

“삐지지 마라.”

“···하.”

리암은 어이없다는 듯 누가 삐졌대? 라고 되받아쳤지만.

나는 무시하며 자리를 잡았다.

“여기, 여기 앉으세요 세자르 님!”

앨빈이 찾아낸 자리에 다같이 앉았다.

지금 우리는 황태단과 팰러스단의 8강전 시합을 보러 온 터였다.

“둘 다 예상했던 대로 16강전 시합은 무난하게 이겼고···. 지금 팰러스단 대표로 나오는 게 사울 같은데?”

뜨거운 함성 속에서 두 선수가 경기장 중앙으로 향했다.

왼쪽에 선 것은 황태단 단장이자 선봉 울릭.

오른쪽에 선 것은 팰러스단 선봉 사울.

사울과 롯의 검술 실력에 관해선 그다지 알려진 게 없단다. 거기에 선봉으로 내보낸 것을 보면···.

‘셋 중 제일 약한 것이 사울 아닐까.’

브렉 자신은 마지막이자 최강의 패로 남겨놓고서 말이다.

“이번은 울릭이 우세하거나, 호각을 다투는 정도일 것 같은데?”

카렌의 예측에 나 또한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 상당히 지루한 대결이 이어질 수도 있다.

“1회전, 울릭 드컨 대 사울 톨!”

와아아아!

군중의 함성 속에서 두 청년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챙, 챙강! 챙강!

처음만 해도 둘의 대결을 느긋하게 지켜보았지만.

‘저게··· 뭐야.’

어느새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꽉 말아쥐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리암과 카렌, 앨빈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맙소사···.”

3학년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로 알려진 울릭 드컨이, 단 한 번도 반격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으니까.

울릭은 남은 시간 동안 버티기만 하다가 패배를 맞이했고.

“2회전 시작!”

황태단의 중견 선수는 2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가 나가고 마지막 대장 선수가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앨빈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사울이라는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봐도 상당한 실력자 같은데, 맞나요?”

앨빈의 물음에 나는 잠시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아니. 상당한 실력자가 아니라···.”

그다음 순간.

챙강!

시원한 금속성과 함께 사울의 검이 상대의 검을 날려버렸다.

사울 혼자서 순식간에 세 명을 압살하는 광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압도적인 실력자야.”

경기는 팰러스단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리암이 사울을 이기는 건 쉽지 않을 듯하군.’

리암이 어느 정도 놈의 체력을 소모시킨 상태에서 붙는다면 내게 승산이 있겠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브렉이 사울보다 강한 것은 분명하고, 롯은 사울과 비등비등하거나 그 이상일 거다.’

사울과 싸우느라 체력을 소진한 채 나머지 둘을 나 혼자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내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까!’

얼마 전 도전과제의 보상으로 자물쇠 비밀번호를 받지 않았던가.

그것은 존재조차 몰랐던 학생회관 물품보관함에 걸려 있던 자물쇠의 번호였고, 이를 이용해 잠긴 보관함을 열자.

‘···어마어마한데.’

『‘쾌유환’(가격 : ????)

- 설명 : 체력과 기력을 완전히 회복시켜주는 비약. 물 없이 씹어서 삼키시오.

- 비고 : 복용 후 1분 후에 효과가 나타남.』

체력과 기력을 완전히 회복시켜주는, 말도 안 되는 사기템이 들어 있었다 이 말이다.

‘이거라면 승산이 충분하지 않겠어?’

나는 쾌유환이 든 4차원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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